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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시민'연희의 탄생과 박처장의 '악의 평범성'
1987, '시민'연희의 탄생과 박처장의 '악의 평범성'
  • 성일권 기자
  • 승인 2018.12.18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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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시민’연희의 탄생과 박 처장의 ‘악의 평범성’

성일권 | 문화평론가

감동 깊게 본 영화는 다시 봐도 새롭고 감동적이다. 그런 영화를 흔히 ‘명작’이라고 부른다. 영상시대를 맞아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나오지만, 거의 대부분은 몇 년, 빠르면 몇 주 지나면 우리 의식에서 희미하게 사라진다. 그건 ‘명작’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제목, 스토리, 주연배우, 감독이 이리저리 헷갈리다 싶더니 어느 덧 깡그리 잊히고 만다. 그러다가 잠 못 이루는 새벽녘에 킬링타임의 목적으로 영화전용 케이블 TV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볼만한 영화를 선택해서 한참 보다 보면 몇 년 전에 봤던 영화임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수록 쇠퇴하는 자신의 기억력 저하를 탓하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쉽게 잊히는 영화들은 처음부터 그저 킬링타임용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잠 못이루는 새벽녘에 순전히 ‘시간 죽일’ 요량으로 TV채널을 돌리다가 올 초에 본 <1987>를 다시 보게 됐다. 얼마 전에 2018년 ‘디렉터스컷 어워즈’의 감독상을 <1987>의 장준환 감독이 받은 이유도 있고, 또한 이 어워즈에서 ‘리틀 포레스트’ 출연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김태리씨가 사실 ‘1987’의 여주인공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유에서였다. <1987>를 다시 보면서, 장준환 감독이 왜 감독들이 주는 상을 받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조금 풀렸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다시 보면서 그의 촘촘한 연출력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저 인기배우 문소리씨의 남편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영화는 군사독재의 폭압에 희생된 이한열 열사의 실제 이야기이면서도 결코 지루한 내용의 다큐멘터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영화들이 군사 정권하의 이야기를 다뤄왔지만, 대부분 스토리가 극적이며, 등장인물이 다소 전형적이라는 아쉬움을 남겼다(어쩌면 필자만의 느낌일지 모를 일이지만). <화려한 휴가>, <남영동 1985>, <26년>, <택시운전사>등의 영화를 보면, 흑백논리처럼 우리 편은 모두 정의롭고, 군인, 경찰은 감정조차 없는 터미네이터처럼 묘사됐다는 생각이다. 이는 착하고 정의로운 주인공 몇 명에게만 스토리가 집중되다보니, 그 밖의 인물들은 그저 악의 무리로 취급된 이유에서다. <1987>은 박종철 열사(여진구)의 죽음을 시작으로 이한열 열사(강동원)의 죽음에서 끝을 맺는다.

그저 ‘평범’하기만 한 대학신입생 연희(김태리)가 등장해 선배인 ‘마음속의 연인’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의 부조리를 자각하게 된다는 내용이지만, 관객들 역시 연희의 의식과 행동의 흐름을 쫓으면서 스스로 연희의 심정으로 세상을 자각하게 된다. 세상에 무관심했던 연희의 각성은 시민 의식의 자각이며, 관객들 역시 그런 연희의 변화를 보면서 잠시 잊고 있던 시민의식을 일깨웠을 것이다. 필자가 감독의 연출력을 새삼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악의 축인 박처장(김윤석)의 캐릭터에 대한 접근방식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박처장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선량한 이들을 가두고 고문하는 악행을 벌이는데, 그건 어떤 출세욕이나 조직의 특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박처장이 가진 나름의 경험과 가치관, 그리고 확고한 신념에 근거한 최선의 ‘책무’로 그려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는 그에게서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나치 전범자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을 느끼기도 했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선량한 장발장을 끝까지 쫓는 자베르 형사의 ‘신념’을 보기도 했다.

 

<1987>은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에 빠지지 않고, 박처장이라는 ‘악인’에게도 신념과 가치관을 부여함으로써, 그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한 가정의 가장이고, 아이들의 아빠이며, 동네의 이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조금 더 오지랖을 넓혀, 감독의 숨겨진 연출 의도를 찾아본다면 지극히 평범하기만 한 우리 관객들이 불의 앞에 ‘정의롭게’ 행동하는 연희가 될 수도 있지만, 나름의 뒤틀린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악행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박처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영화 <1987>의 감동적 비장미에 살짝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문득, 씁쓸한 생각들이 스쳤다. 올초에 <1987>이 인기를 끌자 1980년대 운동권에 몸담았던 이른바 386정치인들이 오락과 교양, 보도 프로그램을 가리지 않고 나와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영웅담과 추억을 늘어놓았다. 물론, 386 정치인들 중에 풋풋한 대학생시절의 초심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과 꿈을 펼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이미 권력에 취해 기득권화하고 제도권화한 이들이 <1987>속의 시대정신을 훼손하는데 앞장서며, 젊은 세대들에게 어느 덧 ‘386=구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어 안쓰럽다.

386 출신의 단체장들이나, 정치인들, 또는 공공기관장들이 낙하산 파행 인사, 성추행, 이권 개입 등의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자신들이 그토록 원망했던 기득권의 ‘꼰대’ 문화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1987년이 갖는 시대적 의미와 가치를 망각한 채, 그저 자신들이 살았던 동시대의 숫자만을 기억하고, 그걸 자신들의 훈장으로 평생 내세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이는 요즘 ‘다스’ 실소유주의 여부와 국정원 자금 유용 및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전수주 비리, 4대강 비리 등 온갖 의혹으로 국민적 공분 속에 재판을 받는 이명박 전대통령의 행태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 전대통령이 한때 6.3동지회 회장으로서 과거 6.3학생운동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6.3학생운동사>를 발간한 ‘주역’이었다는 기억이 새삼 우스꽝스럽게 떠오른다.

우리는 영화 <1987>에 비쳐진 80년대 학생운동을 단순한 숫자로 기억할 게 아니라, 그 너머의 현상과 의미를 찾아봐야 한다고 본다. <1987>의 제작진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삭제되거나 배제된 존재들의 외침은 지금 어디에 잠겼을까?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뒤로 한 채 시대정신의 의미를 숫자로 단순화하고 상징화할 때, 어쩌면 87동지회장의 훈장을 달고서 최고 권력자가 되는 제2, 3의 이명박을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1987> 개봉 무렵에 386 정치인들이 마치 자신들의 잔치인양 요란을 떨다가 잠잠해졌지만, 영화가 일반 대중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아 보인다. 영화 속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성찰의 시간을 주었고, 그 시대를 경험치 않은 젊은 세대에겐 윗세대와의 오해의 벽을 허무는 상호이해의 계기를 주었다. 영화 <1987>이 킬링타임용 1회성 소비재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고 또 보고 싶어하는 명작으로 자리매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글• 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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