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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불안’이라는 안개의 성역
이곳, ‘불안’이라는 안개의 성역
  • 이영주/미디어평론가
  • 승인 2010.10.0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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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ée 특집] 계급의 불안함


▲ <놀이>, 2008-이은정. 오는 11월25~28일 파리 아트페어 <‘맥 파리’(MAC Paris)의 샹페레관에서 작품 전시 예정.
‘불안’의 심리는 왠지 모르게, 특정한 이유나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채 자꾸 우리의 몸과 마음이 불편하고, 불쾌하며, 조마조마하고 뒤숭숭하며, 무엇인가 큰일이 닥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과 함께 위기감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은 원인이나 대상이 상대적으로 명확한 공포(恐怖·Fear·Dread·Scare)와 달리 참으로 애매모호한 심신의 상태다. 불안은 참으로 끈적끈적하게 심신에 달라붙어(습착) 우리를 괴롭힌다.

그런데 불안이 완전하게 어떤 원인이나 대상 없이 나타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불안할까? 누군가는 ‘정확히 누구인지, 언제인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가진 권력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명예를, 재산을, 가족을, 연인을, 생명을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빼앗길지 모른다고 불안해한다. 이것들이 바로 불안의 원인이 아닐까? 우리는 불안을 멈추거나 불안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그 불안의 원인을 소유하거나 통제하려 한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들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아들 오이디푸스를 죽이라고 명령하듯이, 우리는 불안의 원인을 완전히 소유하거나 완전한 자기통제 아래 두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투쟁한다. 권력, 명예, 재산, 연인, 가족, 생명, 지식 등을 완전하게 소유하거나 통제하려는 긴 투쟁 말이다. 그래서 불안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동시에 불안을 낳는다. 이 ‘욕망-불안/불안-욕망’의 고리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불안이 낳은 통제 욕망

우리 모두가 불안하다고 해서 불안의 형식과 내용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체에 따라 다른 불안의 양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불안의 양식이란 각각의 불안이 특정한 방향으로 양식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런 불안의 양식들 속에 던져져 있다.

정치사회학자 이종영의 사유를 빌려보자. 그는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지배양식을 구분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부르주의 계급의 지배(양식)에 앞서 성립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새로운 역사적 총체성을 성립시킬 만한 힘을 아직 갖지 못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자본가 계급은 단지 자본주의 생산양식만을 지배할 뿐이며, 화폐권력이 충분히 강화됐을 때 자본가 계급과 그들을 지원하는 집단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다. 이들은 국가권력을 통해 사회를 재조직하며, 그런 재조직이 바로 부르주아 지배의 시작이며 새로운 역사적 총체성의 탄생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의 지배는 자본주의 생산양식보다 늦게 오며, 부르주아의 지배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고, 또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발전시키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목적이 아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지배의 향유고, 생산은 그를 위한 수단이다.(1)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가 계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가 계급과 이들의 동맹자로 이뤄진다. 그리고 이 동맹으로서 부르주아 계급은 생산관계와 재생산관계의 차원을 총체적으로 구성하며 부르주아의 지배를 형성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사회 전체의 총체적인 지배계급으로 자본가 계급과 이들의 ‘사회적 신체들’(les corps sociaux)(2)이 동맹한다. 자본가 계급을 중심으로 한 동맹으로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부터 사회 전체에 이르는 부르주아적 지배양식을 형성한다.

폭력을 평화로, 악을 선으로 둔갑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지배하며 이로부터 노동자를 지배하며, 나아가 사회에 대해 집합적인 지배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지배기구를 확립하며, 폭력 행사의 분업을 실현한다. 동시에 지배기구의 확립은 권력의 제도적 분배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배기구는 새롭게 분배된 권력의 유효한 작동과 관철을 보장하며, 지배기구의 요소인 법, 의례 체계, 신화적·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이 목적을 위해 동원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지배를 향유하며 지배의 재생산을 위한 수단을 욕망한다. 화폐, 지배기구, 권력 등이 이 수단에 포함된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양식화가 ‘모든 것을 전복한다’는 점이다. 즉 폭력을 평화로, 악을 선으로, 지배가 통치나 정치로 둔갑한다.

부르주아 계급의 불안은 이런 지배양식에 대한 집착과 완전한 재생산에서 발생한다. 이들은 자신의 지배가 중단되거나 흔들리지 않기를 욕망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수단을 그야말로 완전하게 소유하고 통제하기를 욕망한다. 생산수단과 화폐, 그리고 권력과 신화와 이데올로기는 이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욕망하기를 중단하지 않는’ 대상이다.

부르주아는 불안해서 쉴 수 없다

그들은 항상 불안해한다. 누가 생산수단을 넘보거나 빼앗아갈까 불안해한다. 권력과 신화 체계가 불안정해지거나 이 자리를 누가 넘보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뚜렷하고 명확하며 당장 눈앞에 나타난’ 대상이 없을지라도, 이들은 항상 테베의 왕 라이오스처럼, 신탁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타자를 완전히 통제하고 자신 앞에 복종시키려 한다(이런 지배를 향한 욕망은 부르주아 계급 내부의 사회적 신체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그래서 부르주아 계급은 각각의 지배의 향유를 위해 자신에게 분할된 권력을 욕망하며 이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꾸미고, 만들어내고, 말하는’ 등 ‘중단 없이 -하기’를 실천한다. 이들의 불안은 조금도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거나 쉬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미래주의와 유토피아적’ 담화를 중단 없이 쏟아내며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고, 정복하고, 무엇인가를 없앴다가 다시 만드는 ‘지배의 향유를 위한 불안에 찬 맹목적인 노동’을 수행한다. 또 지배기구를 더욱 정밀하게 다듬고 무엇인가를 계속 덧붙이며 확장시킨다. 온갖 기획회의와 전략회의, 액션플랜에 몰입하는 테크노크라트나, 이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자원을 창조하는 이데올로그도 사실은 선과 평화, 정치로 위장된 폭력과 악을 실행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야말로 편안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으며, 자신을 결코 평화롭거나 여유롭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요구하며 명령하며 ‘자신에 대한 복종’을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 집단 외부에서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자신에게 전체적인 헌신과 충성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한다. 그리고 계속 더 큰 생산수단과 더 많은 화폐, 더 큰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욕망한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욕망은 그들의 신체와 영혼에 끈끈한 불안을 야기한다. 그 불안은 다시 부르주아 계급의 더 큰 지배와 권력의 욕망을 야기하며, 이로부터 이들의 폭력과 악은 확장된다.
 
노동자의 집, 통제의 공간

노동자의 불안은 일차적으로 생산관계에 기초하지만, 생산관계 외에 집과 문화 속에서도 유발된다. 집에서 우리는 가정의 재생산과 보존을 고민하며, 그래서 결코 쉴 수 없는 심신의 괴롭힘이 존재한다. 더 나아가 집은 끊임없이 나와 타자를 비교하고, 특정한 분류체계 속에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도록 하는 텔레비전과 인터넷, 정보로 가득 찬 공간이다. 또 집은 더 이상 향유의 장소가 아니라 생산 과정을 준비하거나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행해지는 공간이다. 또 가정과 거리, 생활 공간 속 자본주의의 스펙터클은 노동자가 관념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더 본질적인 세계로 여기도록 하면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우리 감각기관에 직접 스며드는 형태로 제시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노동 주체의 재생산은 노동 주체의 불안을 확장하고 영속화함으로써 안정적으로 뒷받침된다. 대부분의 노동(생산)은 타인에 의한 노동력 처분과 생존의 물질적 수단과 화폐 교환에 기초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처분해서 물질적 수단을 확보할 수 있는 화폐를 확보해야 하는 특정한 생존 방식을 구성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평가받아야 한다. 개인은 이 평가에 직면해 자신을 숙련되고 안정적이며 처분자의 기대와 기준에 맞는 노동력으로서 자신이 가꾸는 실천을 행한다.

타자의 평가와 처분 상황에 직면한 개인은 통제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다. 생존 수단 확보에 대한 불안, 정체성에 대한 불안, 타자의 평가 기준에 부합되는지에 대한 불안과 함께 존재와 현실의 모순 속에서 발생하는 불안이 공존하면서 주체를 불안하게 한다. 그리고 이 불안은 영혼을 침식한다.

노동자의 불안이란 궁극적으로 노동자를 다시 세계 속에 정박시키고 거주하도록 만드는 존재의 근본 구성틀이자 기제로 보인다. 이런 차원에서 하이데거가 “현대란 풍요의 시대가 아니라 궁핍한 시대다. 그리고 안락과 안정의 시대가 아니라 두려움과 긴장이 지배하는 시대다”라고 말한 것을 좀더 강렬하게 이해할 수 있다. 르페브르가 현대성을 ‘벗어나고 싶지만 또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일상성’으로 포착하면서 과잉된 자기 억압의 ‘테러리스트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이것이 바로 ‘소비 조작의 관료제 사회’(3)에서 연유한다고 말할 때 노동자의 불안 양식에 조금이나마 선명하게 접근할 수 있다.
 
습착된 불안, 어떻게 하지?

유동하는 공포와 습착된 불안, 우리 일상을 에워싸고 있는 두 유형의 괴물이 아닐까. 무기를 들고 직접적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경찰과 군대,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신체를 강탈하고 가둬버리는 권력, 그리고 갑작스러운 계약 해지와 해고 등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유동하는 공포’. 언제든지 내가 이런 사건과 사태를 겪게 될 수 있다는 막연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불길하고 꺼림칙한 ‘습착된 불안들’. 그래서 공포와 불안은 어디서부터, 누구로부터, 왜 시작되고 확장되며 재생산되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공포와 불안이 출현하게 될지, 나아가 이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의 조건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를 둘러싸고 공포와 불안을 야기하는 것에 대한 무력한 동참자나 직접적인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꿈꾸고 저항하기.

글•이영주 
내밀사회문화연구소 소장.

<각주>
(1) 이종영, <부르주아의 지배: 원천, 메커니즘, 매개, 효과>, 새물결, p.19, 2008.
(2) 이종영이 같은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메이야수(Claude Meillassoux)의 ‘사회적 신체’란 자본가 계급이 해야 할 일을 대리해주는 집단, 즉 자본가 계급의 동맹자를 의미한다. 사회적 신체에는, 첫째 생산관계 속에 직접 위치하고 있으면서 자본의 지휘 기능을 위임받은 집단, 둘째 테크노크라트, 셋째 자본의 이데올로그, 넷째 국가기구 담당 집단이 포함된다. 이종영, 같은 책, p.31~32.
(3) 강수택, <일상생활의 패러다임>, 민음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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