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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모험을 시작한 두 여인을 위한 헌사-<로마>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모험을 시작한 두 여인을 위한 헌사-<로마>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2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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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로마>(2018)에서도 주인공 클레오를 나타내는 기표는 여럿이다. 클레오는 정부에 땅을 빼앗긴 어머니의 딸, 시골에서 멕시코시티로 상경한 처녀, 중산층 가족의 성실한 가정부, 부유한 주인 가족과는 다른 종족(이는 키와 피부색 등 신체적인 특징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 사내와 풋사랑을 하다가 임신한 여성이다. 무엇보다 ‘엄마’로서의 클레오의 행적이 대조적이다. 클레오는 주인집 아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주는 (유사)어머니이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일 것으로 짐작되는)페페를 비롯한 아이들도 클레오를 가정부로만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클레오는 정작 혁명의 열기가 뜨거운 거리에서 양수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아이를 갖지 못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클레오의 삶은 파란만장하며 드라마틱하다.

<로마>는 클레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종족, 신분, 계급, 모성, 연애, 혁명과 같은 의미심장한 기표를 매달고 항해를 시작한다. 그런데 영화의 플롯은 비교적 단조롭고 소박하다. <로마>의 서사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클레오의 삶을 따라 단선적으로 흘러간다. 또한 클레오의 대사는 짧고 낮으며, 그녀의 움직임은 느리고 잔잔하며, 표정의 변화도 제한적이다. 하지만 클레오의 행적이 지닌 의미는 가볍거나 작지 않다. 클레오가 워낙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장점은 여기에 있다. <로마>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무슨 깃발을 치켜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너무 무겁거나 날카로워서 부담스러울 법한 소재들을 솜씨 좋게 다독거려서 클레오의 발걸음처럼 담담하게 묘사한다.

 

<로마>에서는 불륜 남편을 둔 4남매 엄마 소피아의 곡절이 서브플롯 역할을 한다. 소피아의 삶은 클레오의 삶과 일부 겹치고, 서사의 중요한 날줄이 되어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임신한 클레오를 남겨둔 채 무책임하게 도망친 무도인 청년과 소피아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지식인 남편의 뻔뻔한 외도는 1970년대 초반 멕시코 사회의 어떤 변화의 징후를 드러낸다. 슬픔을 안으로 삭이는 클레오와 “새로운 모험”을 강조하는 소피아의 성격은 외형상 대조적이지만, 그들의 모든 행적은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 속에서 깊은 울림을 만든다. 그래서 서정주 시인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노래했다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나를 키운 건 팔할이 클레오와 소피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페페는 클레오에게 “내가 늙었을 때 파일럿이었는데…”, “나는 늙었을 때 항해사였는데…”와 같은 내밀한 꿈 이야기를 하며 친밀감을 나타낸다.

클레오와 소피아는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인물이다. 클레오는 시골 출신의 순박한 가정부이다. 소피아는 생화학자, 중산층 주부, 지성미를 갖춘 엘리트이다. 시련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클레오는 아픔을 그저 견디고, 소피아는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하소연하면서 슬픔을 드러낸다. 하지만 클레오와 소피아는 남성과의 관계, (유사)엄마라는 측면에서는 거의 동일한 위치에 놓여 있다. <로마>는 한 집에서 살아가는 두 여성의 연대와 모험을 통해 동시대의 모순을 포착한다. <로마>가 클레오의 행적을 다큐멘터리처럼 묘사한 것도 사실성을 강화시켜주는 요인이다. 자전적인 이야기, 연기 경력이 전무한 주연배우, 줄곧 인물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카메라는 <로마>의 이러한 덕목을 돋보이게 만든다.

 

 

<로마>의 카메라는 대체로 과묵하고 무덤덤하다. 예를 들어 클레오가 아기의 침대를 사러간 매장에서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양수를 쏟고, 민주화 시위로 인해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괴로워하고, 마침내 어렵게 병원에 도착한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1층 전경을 롱 쇼트로 잡는다. 그래서 관객들은 병원 1층의 수많은 환자들 속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린 후에야 클레오를 발견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카메라는 클레오의 긴장된 표정, 다급한 발걸음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카메라는 피사체와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성과 보편성을 획득한다. 즉 이 병원 장면의 롱 쇼트를 통해 클레오는 멕시코시티 시민의 한 사람이 되고, 모든 시민들이 클레오가 될 수 있다. 당연히 클레오의 고통은 클레오‘만’의 고통이 아닌 것이 된다.

<로마>를 이야기하면서 대구를 이룬 두 개의 롱 테이크를 빼놓을 수 없다. 먼저 병원의 수술실 시퀀스. <로마>는 클레오의 출산 준비와 사산 장면, 의사들이 아기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장면, 아기의 시신, 죽은 아기를 가슴 위에 올려놓고 흐느끼는 클레오의 모습을 한 묶음으로 길게 보여준다. 이때에도 클레오는 울음을 안으로 삼킨다. 바닷가 시퀀스는 병원 수술실과 정반대이다. 클레오는 바다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파도가 밀려와 얼굴을 때리고, 파도가 키를 넘어도 멈추지 않는다. 클레오는 아이들을 구한 뒤 소피아에게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며 흐느낀다. <로마>에서 클레오가 거의 유일하게 감정을 직설적으로 토해내는 장면이다. 클레오가 죽음에서 구해낸 아이들과 죽은 채로 낳은 자신의 아이…….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들과 죽음의 세계로 떠난 아기가 한 자리에 모인다.

클레오의 대사 직후에 소피아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애들은 괜찮아.” 소피아의 이 대사는 정직하다. 죽을 뻔했던 두 아이는 무사하고, 그래서 클레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클레오의 태도에는 한계가 있다. 클레오의 진짜 슬픔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대사는 서늘하다. 소피아가 의도적으로 혹은 이기적이어서 그 말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소피아는 결국 클레오를 감싸 안아준다. 영화 포스터의 그 장면이다. 이 바닷가 시퀀스에서 클레오가 맞이한 파도, 클레오가 헤치고 나간 파도의 의미는 다양할 것이다. 그 파도는 종족, 신분, 계급, 빈부 격차, 연애, 사산, 혁명과 같이 클레오를 억압한 무수한 세상사의 은유일 것이다. 클레오는 묵묵히, 한걸음씩 걸어가며 파도와 맞선다. <로마>의 이 바닷가 장면이 장엄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로마>의 마지막 장면도 긴 여운을 남긴다. 바닷가 여행에서 돌아온 클레오가 빨래를 안고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사라진 후, 카메라는 클레오가 사라진 계단과 먼 하늘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철제 계단과 건물 벽 사이로 보이는 좁은 하늘 위로 여객기가 지나가고, 크레딧이 올라가고, 그동안 외화면에서는 개 짖는 소리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칼갈이의 호객용 나팔 소리가 들린다. 빨래를 다 널 시간이 지난 후에도 클레오는 옥상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클레오는 옥상에서 홀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죽은 채로 태어난’ 아이를 떠올리며 울음을 우는 것일까? 아니면 여객기를 바라보며 멕시코시티가 아닌 곳, 로마가 아닌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는 것일까? 어느 경우이든, <로마>가 클레오와 소피아의 새로운 모험 혹은 여행에 방점을 찍고 싶어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주의할 점은, 감독이 그 모험과 희망을 함부로 장밋빛으로 채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클레오가 단 한 번도 스스로는 모험이나 여행, 희망과 같은 단어를 발음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클레오 같은 인물에게 상처란 그런 것이다.

클레오의 상처는 복합적이다. 그녀 스스로 인식하는 상처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상처도 있다. 클레오의 상처에는 복잡다기한 요소가 혼재돼 있고, 각각의 요소들은 클레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클레오는 가정부이면서도 엄마의 역할까지 도맡아 한다. 그러나 클레오는 어디까지나 종족이 다른 가정부이며, 클레오에게는 가정부라는 신분이 내면화되어 있다. 그녀는 거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TV를 보다가도 언제든지 잔심부름을 해야 한다. 바닷가의 식당 앞에서 소피아와 네 아이가 의자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에도, 클레오는 그들 옆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클레오는 소피아의 가족이나 다름없지만 가족 그 자체는 아니다.

 

<로마>는 몇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1970년대 초반 멕시코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클레오와 우익 무장단체에 가입한 클레오의 옛 애인은 120명이 살해된 ‘성체 축일 대학살’의 현장에서 마주친다. 그 청년은 클레오에게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안겨준다. 소피아의 친척집에서 열린 새해맞이 파티에서 클레오의 친구들이 지하에서 따로 파티를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클레오와 소피아의 가족 사이에는 미묘한 틈이 있다. 그 균열은 개인 간의 연대와 유대만으로는 봉합할 수 없는 것이다. <로마>는 그 틈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드러낸다. <로마>가 클레오와 소피아의 다르면서도 같은 행적을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배경이다. 중형차와 소형차, 도입부의 바닥 물청소와 결말의 옥상 장면 같은 대비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링도 효과적이다.

앞에서 ‘두 여성의 연대와 모험’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두 여성’을 ‘두 인물’로 치환하면, 감독의 전작인 <그래비티>가 떠오른다. <그래비티>와 <로마>는 공간과 서사구조 등이 다르지만, 여성 인물의 행적과 메시지 측면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다. <그래비티>의 스톤 박사는 사고로 어린 딸을 잃은 후 세상과의 모든 교류를 끊고 살았다. 그녀는 매일 저녁 8시에 퇴근해 음악만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며 정처 없이 드라이브를 했다. 그리고 상처를 잊기 위해서 지구에서 600km나 떨어진 우주에서 허블 망원경을 고친다. 하지만 스톤 박사는 매트의 도움과 희생으로 모험을 시작하고, 마침내 지구로 귀환해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한다.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 호수에 떨어졌다가 뭍으로 올라오는 결말, 개구리의 헤엄 등은 스톤 박사의 모험의 의미를 강조하는 요소들이다. 스톤 박사가 홀로 남은 우주선에서 지구의 개 짖는 소리,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오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로마>의 파도치는 바다, 아이의 죽음과 구출, 개 짖는 소리, 옥상에서 바라보는 여객기 등도 <그래비티>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 스톤 박사는 지구로 귀환하는 과정을 “엄청난 모험”이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았던 삶에서 탈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소피아는 “새로운 모험을 하자.”라고 말한다. 클레어도 그 모험에 묵묵히 동참한다. 이 지점에서 클레오의 마음을 쉽사리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클레오가 젖은 빨래를 널어 말리듯, 아마 그럴 수는 없겠지만, 가슴 깊이 묻어둔 울음을 꺼내서 햇살에 널어 말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어찌 됐든, 클레어와 소피아는 모험을 시작한다. 그들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작지만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그 걸음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 영화의 원형질을 만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로마>는 소피아와 클레어 ‘들’을 위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따뜻한 헌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로마>는 현재 국내 일부 개봉관과 넷플릭스에서 상영 중이며, 2019아카데미상의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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