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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설날 늙은 모자가 있는 풍경
[안치용의 프롬나드] 설날 늙은 모자가 있는 풍경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9.02.02 17: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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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많이 늙었네.”

오랜만에 보는 아들 얼굴을 보시다가 식사 중에 한 말씀한다. 별 말씀을 다하신다. 중늙은이 된지 이미 오래인데. 일률비교가 어렵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는 나보다 어려서 며느리 보았고 손자손녀도 보았다. 지금 죽어도 요절 소리를 못 듣게 된지 한참이다.

 

내가 보기엔 어머니가 더 늙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 즈음이 되어서야 마주하게 된, 그야말로 노모는 영락없는 꼬부랑 할머니. 낙상의 후유증으로 걷는 게 마음대로 안 될뿐더러 계단 오르기는 더 버겁다. 화장실을 물어 봐서 근처까지 안내했더니, 혼자 갈 수 있다며 손을 뿌리치고 꼬부랑꼬부랑 걸어간다.

 

서로를 늙었다고 생각하는 모자가 함께하는 점심. 전화로 한 얘기를 또 반복하는 어머니 앞에서 아들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갈비탕 속의 갈빗살을 발라내는 데 집중한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불확실하지만, 내 관점에 아마도 소가 살았을 때 땅을 보는 쪽에 붙었던 살은 잘게 잘라서 국물만 있는 어머니 갈비탕 그릇에 재투입하고, 심장을 비롯한 소의 내부와 붙어있던 쪽의 살은 통으로 발라 내 입으로 들어온다. 사실 내 입안에서 씹힌 부위가 쫄깃해서 갈빗살의 더 맛있는 부분이지만, 미각도 흐릿한 노인네 입안에선 제대로 씹히기 힘들어 이렇게 뼈를 경계로 안과 밖이 분리된다.(소 갈빗살의 안과 밖을 제대로 파악했는지는 자신이 없다.)

 

건너편 모자는 이쪽 모자보다 더 늙었다. 먹고 나가는 저쪽 어머니는 거의 땅에 붙어서 걷는다. 아들 허리는 내 허리정도로 꼿꼿해 보이지만 어쩐지 그의 어깨 위에, 내가 진 세월보다 많은 세월이 올려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 다과를 마주한 모자. 옛날 같으면 과도를 빼앗을 텐데, 지금은 과육의 거의 반을 껍질과 함께 버리는 아들의 사과깎기를 대충 바라본다. “사과가 맛있네.”

 

며칠 전 합정동 뒷골목에서 만난 어느 꼬부랑 할머니. 폐지가 산만큼 쌓인 리어카를 과속방지턱 앞에 두고 그 앞에 서서 멀리서부터 나를 바라본다. 리어카 미는 데 익숙하지 못하여 턱을 넘는 과정에 사과상자 같은 게 떨어진다. 약한 동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조금만 더 밀어달라고, 약속에 늦지 않을 만큼만 리어카를 밀고 갈길 간다. 뒤돌아보니 자 몸을 하고 리어카를 미는 할머니 등 위로 겨울바람이 묵직하게 지나간다.

 

라디오 뉴스에 경부고속도로 정체가 심해 밤 10시쯤 해소될 것 같다고. 잘 빠지는 올림픽대로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PC 앞에 할 일이 쌓여 있다. 확연히 쇠약해진 내 오른손 중지와 자판을 번갈아 쳐다보다 PC 부팅 버튼을 누른다. 어머니는 낮에 혼자 집에 있을 때 식탁에 앉아서 옛날 살던 집이 있던 방향으로 창밖을 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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