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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완벽한 타인> ― 말하자면 ‘거칠게’ 망가져버린 1시간 30분에 관한 이야기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완벽한 타인> ― 말하자면 ‘거칠게’ 망가져버린 1시간 30분에 관한 이야기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02.1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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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처음에 머물렀더라면”

   처음만으로 충분하달까. 짤막한 설정쇼트만으로도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대부분의 것들을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리란 뜻이다. 그렇다면 텍스트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남은 부분들은 그저 단순히 부연의 기능에 그친단 말일까. 실상 있든/없든 전혀 무관하다고 말해볼 만큼이나 비본질적인 성격을 담뿍 머금고 있단 뜻인가? 더군다나, 괜스레 사족을 덧붙이게 됨으로써 영화로 하여금 꽤나 ‘문제적인 요소들’을 품도록 만들고야 말았더라면, 이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곧장 성급한 진단을 향해 내리닫기에 앞서, 조금은 더 자세한 후술이 필요할 성싶다.

 

<두터운 빗장을 부수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다>

   두텁고 불투명한 얼음을 구태여 깨고 들여다 본 영랑호의 수면 아래엔 강과 바다를 오가는 갖은 종류의 물고기들이 득실댄다. 바닷물인지 혹은 민물인지 그 묘연한 정체를 좀체 종잡을 수 없는 석호(潟湖)의 물길 속은, 마치 내밀하게 꿈틀대는 욕망들이 이리저리 엮어지다 못해 끝내는 엉겨 붙어 걷잡을 수 없게 돼버린 ‘인간 존재의 마음과’ 꼭 같은 모양새라고 할 테다. 혹은 좀 달리 번역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어이 두꺼운 장막을 들춰내고 감춰진 혼잡한 진실을 표면 위로 끄집어 올리게 될 경우, 아무렴 쉬이 감당 못할 불화를 낳게 될 것임에, 차라리 그냥 두는 편이 보다 더 나을는지도 모를 만큼의 ‘번잡스러운 혼돈과도’ 같다고 말이다. 그러면 금단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게 어리석은 일이란 결과론적 명제 역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야 말 테다.

   상술한 몇몇 문장들을 스스럼없이 긍정하고 보면, 호수 앞에서 벌어진 아이들의 유치찬란한 다툼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그 남은 부분을 죄다 갈음해버린다고 한들, 영화의 ‘속내’를 전하기엔 전연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 비로소 틀리지 않은 것으로 판가름 나게 될 터이다. 이 다툼은 다른 한편으론 어느 누구에게나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져선 안 될 비밀한 욕망’이 있다는 존재론적 확신을 은유하는 적절한 유비가 되어줄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처음만으로 충분하단 뜻이다. 영화 텍스트에서 발견하게 되는 모종의 당혹감과 곤욕스러움의 시원은, 여기에다 ‘무언가를 덕지덕지’ 얹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라고 보는 편이 옳다고 하겠다.

 

“무엇을 덧댈까, 또 어떻게 덧붙일까? 그 사이에 놓인 심연의 간극”

   물론 이런저런 살점들을 텍스트의 골격 위에다 덧붙인 것 자체가 문제적이라 말할 순 없을 테다. 그건 완성도의 무르익음 내지는 디테일의 성숙함과 결부된 사안이니 말이다. 누가 뭐래도 앙상한 뼈대에 가까운 형태를 완결된 작품이랍시고 건넬 순 없는 법이니까. 아울러, 덧대지 (다루지) 말아야 할 소재나 제재 같은 건 처음부터 부재한단 말 역시도 ‘일단은’ 긍정하고 넘기는 편이 옳을 터이다. 정반대로 뒤집어 보면, 이는 반드시 따라야만 할 명제나 원칙 같은 게 예술작품에 부가되어선 아니 된단 말과도 같다. 예술 본연의 창조성 내지는 자율성의 문제와 긴밀하게 맞닿는 지점이니, 더는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게 전분 아니다. 적어도 ‘어떻게’ 그리고 ‘왜’란 질문을 피해갈 수 없는 까닭이다. 환언하자면 이는 다루지 말아야 할 게 없다는 말과, 무엇을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무방하다는 말이 결코 동의어가 아님을 기억하여야만 한단 뜻이다. 가령 극도로 폭력적인 장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됐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재현된 것인지에 따라 가해지는 평가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 있다. 반면, 설령 그 위협의 정도가 때론 미미하게 여겨질 수 있을 법한 제재라 해도, 혹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다만 있는 그대로 날 것의 폭력만을 그저 전시하듯 현상해낼 뿐이라면, 경우에 따라 심각한 이물감을 촉발시킬 여지마저 다분하다고 할 터이다. ―허니 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됐단 부적절한 비판은 한쪽으로 밀쳐두겠다―

   이렇게 요약해보는 게 가능하겠다. 뼈대에 덧붙여진 디테일들이야말로 영화작가가 품은 의식수준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특별히 이 텍스트의 경우라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거론돼야만 할 게다. ‘개별자들의 완벽한 타인됨’을, 그러니까 ‘비밀스러운 욕망의 현상학’이란 테제를 전면에 내세우기 위한 일념 하에, 다분히 불온하기 그지없는 전략을 무람없이 동원한 것이 아무래도 걸림이 되었노라고 말이다. 좀 더 쉽게 번역해볼 수도 있겠다. 진두에서 흩날리고 있는 깃발(주제의식)에 못지않은 민감성과 무게를 머금은 여럿 제재들이, 그 나름의 존재감을 박탈당한 채 한없이 가벼워진 도구 수준으로 전락해버리도록 만들어버린 게 문제란 뜻이다. 분명 그런 식의 접근은 폭력적이다.

 

“주저앉는 영화의 시간들, 무너져 내리는 영화의 살점들”

   ―고착되고 왜곡된 성 관념을 화기애애한 술자리의 분위기를 가장한 마초적인 에너지로 뒤덮어버린 텍스트 면면의 분위기부터가 다분히 불쾌하다지만― 좀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당혹스러움은 핸드폰의 알림내역을 공개하기로 한 순간부터 폭발하듯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다. 반복해서 말하겠거니와 시도 그 자체는 그리 나무랄 게 없다. 현대인들의 삶을 종속하는 ‘손 안의 블랙박스’를 통해 감춰진 욕망의 지도를 샅샅이 들여다보겠다는 건 분명 재미있는 착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발상의 유쾌함이 표현의 방식마저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는 점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야만 할 터이다.

 

<술자리의 화기애애함으로 모든 것이 포장되다>
<거침없이 뱉어지는 무람없는 말들>

   우선 일차적으론 배우자를 향한 거짓과 부정 그리고 일탈 따윌 담아내는 ―누차 반복하지만 사실 제시 그 자체에 딴질 걸고자 함이 아니다― ‘일그러진 눈길’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부분 동일 사안을 이중 잣대를 통해 바라보려는 가부장적 시선을 경유하고 있는 것은 물론, 이에 대해 뭔가 생산적인/반성적인 말 걸기의 여지를 배태하기 보단, 그저 감각적인 충동 및 쾌와 아울러 장렬히 소비해버리고 마는 단순무식한 경향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선명히 주목해봄직한 건 이를테면 동물권/생명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젠더 퀴어에 대한 감수성의 결여일 테다. 일말의 비판적 성찰도 없이 거반 조롱에 가까운 모습으로 희화화된 채 향유되고 있음을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단 뜻이다.

 

<젠더 퀴어에 대한 부적절한 형상화>
<동물권/생명권에 대한 무게감 없는 조소>

   그 각각이 동시대 우리사회에서 꽤나 예민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임을 고려해본다면, 혹 일견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미혹될는지도 모르겠으나, 실상을 꼼꼼히 따지고 보면 그만한 착각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양보한다 한들 미성숙한 시민의식을 꼬집을 의도라 포장하기란 조금 어려워 보인다. 정녕 거기까지 가닿았더라면 굳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기대야만 할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적절한 후속조치(봉합작업) 없이 임의로 찢어놓은 상처자국을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일 따윈 불가능 했을 테니 말이다. 혐의는 비교적 명백해 보인다. ‘욕망의 미궁’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그 남은 것들을 조미료 취급해버렸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건 텍스트 말미의 ‘부실한 매듭’을 들여다 볼 때 보다 확연하게 도드라진다.

 

“허공에다 바늘과 반창고를 드리워서야”

   모든 것이 판타지라는 판타지? 까다롭기 그지없는 난제들을 구태여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 보란 듯이 하나하나 전시해놓고는, 개중 어느 것 하나 갈무리해 들이지 않고 모조리 환상의 이면에다 묻어버리는 일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유비컨대 이는 효모와 각종 촉매들이 스민 빵 반죽이 부풀대로 부풀어 오르길 기다렸다가 터질 듯이 빵빵해진 걸 확인하곤, 주저 없이 뒤돌아서는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이다. 그건 다른 걸 말해주지 않는다. 애당초 요리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입자들이 서로 치열하게 부대끼며 상처 입는 와중에 그 몸이 부어가는 과정을 그저 관망하며 즐기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음을 드러낼 따름인 것이다.

 

<어설프기 그지없고, 너무나도 부실한 매듭>
<어설프기 그지없고, 너무나도 부실한 매듭>

    테이블 위에 팽개쳐진 채 돌고 있는 반지와, 운전석 핸들 위에 놓인 약지의 반지. 이 두 오브제의 공명과 불화는 그간의 모든 일들이 공상이었음을 지시한다. 쉽게 말해서 핸드폰을 공유하는 게임은 처음부터 없었단 것이다. 그러나 조수석에 앉은 이의 핸드폰 기록은 그 공상 속의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음직한 일들과 조금도 무관하지 않음을 적시해준다. 

 

<영화의 눈길이 유일하게 가닿는 자리, 곧 욕망의 실재성>

   간단히 말해서 이는 텍스트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강조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욕망이란 뜻이다. 얼어붙은 영랑호를 비집고 물고기를 끄집어내보았건 그러지 않았건 당혹감을 유발할 만큼의 어종들이 그 아래 존재하고 있단 사실만은 틀림없는 것처럼, 식사자리를 휩쓸고 지나간 일련의 사건들이 상(像)에 불과하든 그렇지 않든, 아무렴 개별자들의 흉중에서 들끓는 검고 은밀한 욕망의 실재마저 부인할 순 없단 것이다. 이것이 핸드폰 문자내역의 의미다.

   영화의 대사 그대로를 빌려온다면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한들 곁에 선 그이가 ‘완벽한 타인’이란 사실만은 변하지 않으리란 해설일 테다. 바로 이 거대한 선언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럿 민감한 제재들은 무참하게 날것으로 전시됐고, 아울러 생채기를 입었으며, 끝까지 상처를 봉합할 길을 찾지 못한 채 공상이라는 미명하에 작위적으로 포섭됐고, 또 묻히고야 말았다. 마치 케케묵은 고대그리스극의 망령(deus ex machina)에게 의존하는 듯한 허망함으로 말이다.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다. 신중을 기하고자 한 가지 더 살펴볼만 한 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반지의 출현으로 인해서 여하간 텍스트는 불가피하게 ‘액자식의 구성’을 끌어안게 됐단 점이다. 그 구성상의 특징과 목표란 건 명확하다. 액자내부의 상황을 비추어보아 ―계기로 삼아― 되려 액자바깥의 상황을 강조하는 데 윗점이 찍힌단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담 액자 내부에서 다뤄진 텍스트의 민감한 제재들은 자연히 액자바깥의 진실, 곧 ‘욕망의 가없음’을 강조하는 장치 수준에서 동원되고 또 복무하게 된다. 딱 거기까지인 셈이다.

 

<월식-황당무계한 알리바이로의 도피>
<월식-황당무계한 알리바이로의 도피>

   더불어 몇몇 진부한 요소들이 영화의 미학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인자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딸에 대한 부성애와도 같은 껄끄러운 휴머니즘의 요소를 불어넣은 게 적잖은 이물감을 자각케 한다. 보다 근본적으론, 월식이라는 배경부터가 억지스럽다. 그간 계속해서 만남을 이행해왔던 이들이 왜 하필 월식 날에 이런 해프닝을 겪어야 하는 걸까. 단지 34년 전 영랑호에서 다툰 그 날이, 두껍게 얼어붙은 수면 아래를 들여다 본 그 날이 월식이라서? 그러니까 월식의 신비로움에 호소하기 위해서? 인간 존재가 그만큼이나 기묘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난데없는 판타지적 요소의 난입을 모쪼록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로 동원하려고?

   무려 한 시간 반 이상의 시간을 더 연장해서 얻어낸 결과란 게 이 정도라면, 모쪼록 아쉬울 따름이다. 다양한 제재들을 적당한 위기감 없이 활용하는 대신, 차라리 카메라의 동세에 좀 더 집중해서 인간내면의 심층심리를 영화언어로 형상화해내는데 집중했더라면, 한층 더 와 닿는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 그저 웃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기보단 한결 짙은 호소력을 발휘해 영화의 말 걸기 작업에 맞닥뜨릴 수 있도록, 관객들을 눅진한 추체험의 현장을 향해 옮아오도록 그렇게 견인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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