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구매하기
[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와 시인 그리고 영화
[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와 시인 그리고 영화
  • 손시내(영화평론가)
  • 승인 2019.02.18 09: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시(詩)’와 관련된 영화 두 편을 보았다. 하나는 개봉하진 않았지만 전주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된 박근영 감독의 <한강에게>(2018)다. 영화는 젊은 시인 진아(강진아)를 따라 그가 시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며 연인의 사고와 과거의 기억, 현재의 감정을 떠올리는 일상을 보여준다. 그 길목에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시와 시인들이 있는 자리에 대해 눈길을 던지기도 한다.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의 낭독회, 젊은 시인들의 활동이 개인적인 슬픔과 답답함의 시간을 지나는 진아의 상황과 겹쳐진다. 끝내 첫 시집을 완성하게 되지만 그가 쓰는 시는 무언가를 해결해주거나 극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편으로 직업이며 활동이고 앞으로도 이어져갈 삶의 양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최근 개봉한 이시이 유야 감독의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2017)다. 이 영화엔 시인이나 시를 쓰는 활동이 등장하진 않지만, 영화가 원작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 <밤하늘은 항상 최고 밀도의 푸른색이다>이다. 주인공 미카(이시바시 시즈카)의 목소리로 종종 시구가 낭독되는 가운데, 영화는 마치 시집의 구성을 영화로 옮기려 노력하듯 인물들의 얼굴과 독특한 시점쇼트, 불빛의 번짐과 겹침 등을 통해 장면을 이어나간다. 도시의 고독과 무의미한 사랑 등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도쿄에서의 삶과 사람들의 내면을 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런 허무한 세상에서, 관계맺음은 여전히 가능할 것인지, 가능한 사랑의 방식은 무엇인지 묻는다.

 

한강에게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두 편의 영화가 시에 관해, 그리고 동시대의 문제를 대하는 감각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함께 생각해볼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시를 영화로 옮긴다는 것은, 영화가 시적인 형식을 취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흔히 시적이라고 경탄하며 표현하는 탐미적인 화면만은 물론 아닐 것이다. 선형적이지 않은 구조, 여백과 간격을 통한 의미의 생성 등의 형식적 측면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형식들을 통해 영화가 종종 시와 영화 그 자신이 놓인 현실에 대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발화하기를 지속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 또한 전부는 아니겠다. 시라는 예술 형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접근을 참고해(예컨대 단어와 사물 사이의 관계에 관해 말했던 프란시스 퐁쥬) 영화의 형식과 구조에 대해, 그것과 시의 유비 혹은 차이에 대해 세심한 탐구를 해볼 수도 있겠다. 이처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운데, 앞선 질문들과 맥을 함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의 삶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차례로 떠올랐다.

하나는 지난 2017년에 개봉한 테렌스 데이비스의 <조용한 열정>이다. 영화는 1830년에 태어나 1886년까지 살았던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신시아 닉슨)의 삶을 조명한다. 여성의 삶과 역할에 대한 규정이 엄격했던 시기, 그는 많은 밤을 시를 쓰며 보냈다. 그는 자매, 친구와 우애를 나누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꿈꾸고 유머와 재치의 힘으로 삶을 지탱해나가지만, 외로움과 고독, 추함과 고통스러움 역시 영화에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시와 음악을 감상하는 장면에서도 시간의 속절없는 흐름과 거기 담긴 상실과 슬픔이 떠오르고, 몇 번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거치는 동안 영화엔 이별의 순간들이 쌓여간다. 영화의 후반부, 에밀리는 몇 번이고 자신이 얼마나 추해졌고, 못되고 적대적인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해 말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교회의 지도와 질서가 아니라 시를 쓰는 활동을 통해 스스로 영혼과 믿음을 지키려던 젊은 날의 그는, 죽음과 추함과 고통과 결점을 직면해야만 하는 외로운 인간이 되어있다. 게다가 신장염을 앓아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며 때로 괴성을 지르기도 하면서 에밀리는 작은 침대 위에 누워 서서히 죽어간다. 그의 시는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과 고통, 고결함과 편협함 사이를 진동하며 쓰여졌을 것이다. 이 모든 장면들 위로 그의 시를 읊는 에밀리 자신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어린 시절부터 죽고 난 이후 묘지에 묻힌 이후까지를 감싸는 목소리는, 시인의 인간으로서의 삶 위에 예술 형식으로서의 시를 포개둔다.

 

조용한 열정

마지막으로 언급할 영화는 <조용한 열정>과 같은 해 개봉한 파블로 라라인의 <네루다>이다. 영화는 칠레의 정치인이자 민중 시인이었던 파블로 네루다(루이스 그네코)가 국가 권력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한 1948년에서 1949년의 시기를 그린다.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도망자가 된 네루다와 그를 쫓는 비밀경찰 오스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가 영화의 두 축이지만, 추격하는 자와 쫓기는 자가 으레 그렇듯 둘은 좀처럼 만날 수 없다. 네루다의 행적과 그것을 쫓는 오스카의 장면이 번갈아 등장하는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네루다가 드러내는 면모들이라 할 수 있겠다. 노동자와 민중의 시인이자 좌파 정치인인 그는, 유흥을 즐기는 호색한이자 대책 없고 즉흥적인 인물이기도 하며, 도피생활에서 마주치는 거리의 빈민들, 칠레 공산당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층민들 앞에서 그 자신 역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답을 갖지 못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시는 사람들을 움직이고 민중들의 노래가 된다. 영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형식적 특징은 오스카의 내레이션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마치 카메라와 한 곳에 있는 듯이 들려오는 음성은, 네루다를 잡고 싶어 하는 오스카의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없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중얼거림을 이어나간다. 네루다라는 인물에 대해, 그의 시에 대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말하며 이어지는 그 음성은 영화의 마지막, 오스카의 죽음에 이르러 그 자신의 시가 된다. 

 

네루다

두 편의 영화는 시인의 삶을 그가 살았던 시대 속에서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그러면서도 두 영화는 시인들의 인간적인 면모랄 수 있는 부분들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비단 위대한 시인에게도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식의 수사로 귀결되는 선택인 것 같지는 않다. 시인 혹은 예술가의 삶은 그가 만들어낸 예술 혹은 시의 운명과 무관하게 때로 가혹할 만큼 다른 인간의 길을 간다. 거기엔 무지와 편협함, 추함과 고통, 늙음과 죽음이 있다. 물론 삶에는 때로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있지만, 결국 인간의 운명과 예술의 운명은 다른 것이다. <조용한 열정>과 <네루다>는 그 간극을, 그리고 그 간극에도 불구하고 시인과 시를 함께 담을 수 있는 영화적 형식을 고민한다. 영화의 시인들은 세계와의 긴장을 버티며 살아가고 시를 쓰는, 세속의 예술적 인물들이다. 우연히 함께 떠올리게 된 네 편의 영화는, 시와 시인과 영화, 세계와 삶에 대해 조금씩 다르고도 비슷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글 : 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정기구독자님이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바랍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