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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취임 20년만에 첫 '불명예'
조양호 취임 20년만에 첫 '불명예'
  • 김진양 기자
  • 승인 2019.03.27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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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주총서 사내이사 재선임안 부결
"자본시장 촛불혁명" 평가에 재계 긴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취임 20년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지난해 불거진 조 회장 일가의 일탈과 전횡이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조 회장은 주주들에 의해 물러난 첫 번째 재벌 총수라는 불명예를 안게됐다. 

 

27일 대한항공의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의장을 맡은 우기홍 대한항공 대표이사 부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대한항공
27일 대한항공의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의장을 맡은 우기홍 대한항공 대표이사 부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대한항공

대한항공은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빌딩 5층 강당에서 제57기 정기 주주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안건은 △재무제표 승인의 건 △정관 일부 변경의 건 △이사 선임의 건 △이사 보수한도 승인의 건 등 총 4건이었다.

이 중 가장 많은 관심이 모아진 것은 조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여부. 앞서 국민연금을 비롯해 해외 연기금과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등이 반대 의사를 표시한 만큼 경영권 수성 여부를 두고 표대결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결과는 조 회장의 패배였다. 대한항공 측이 이날 오전까지 사전 확보한 위임장 등 주요 주주들의 의결권 내역을 확인한 결과 찬성 64.1%, 반대 35.9%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건은 부결됐다. 대한항공 정관은 '사내이사 선임은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2 이상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약 2.5%의 우호 지분이 부족해 사내이사직을 박탈당한 것이다. 지난 1999년 선친인 고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지 20년만이다. 

이 밖에 박남규 서울대 교수를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비롯한 기타 의안들은 모두 원안대로 승인됐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과 한진칼 등 특수관계인이 33.3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지분율은 11.56%다. 우리사주 지분이 2.14%고 나머지 약 53%가 기타 주주다. 이 중 외국인 지분은 20%정도다.

고성·비방 난무한 혼란의 주주총회

한 시간 남짓 진행된 이날 주총은 시작부터 끝까지 혼란의 연속이었다. 조 회장의 거취가 결정되는 탓에 이른 아침부터 주총장을 찾는 발길이 이어졌고, 건물 외부에는 조 회장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집회도 진행됐다. 주주 명부 확인이 지연된 탓에 예정된 시간보다 10분가량 늦게 시작한 주총은 첫 번째 안건부터 찬반 격론이 벌어졌다. 

대리인 자격으로 참석한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의 발언이 도화선이 됐다. 채 의원은 "조 회장 일가의 전횡적 황제경영으로 회사의 평판이 추락하고 경영 실적도 곤두박질쳤다"며 "과거 한진해운에 대한 지원으로 8000억원이 넘는 손실을 본 사안과 관련해 이사회가 어떤 논의를 했고 내부 시스템이 어떤 검증을 했는지 말해달라"고 질의했다. 

이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부회장인 김남근 변호사도 총수 일가의 배임·횡령 혐의, 관세법 위반 혐의 등을 거론하며 "이사회의 지배구조를 투명화하고 관리 감독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선 방안을 내 달라"고 요구했다. 

회사 측 입장을 지지하는 주주들은 이 같은 주주 발언에 강하게 항의했다. 고성과 비방이 난무하는 상황 속 발언권을 얻은 한 주주는 "안건과 상관없는 돌발 발언들이 나오고 있는데, 아직 재판 중인 사안은 검찰과 재판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27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 대리인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 발언에 주주들이 항의하고 있다. 2019.3.27/뉴스1
27일 열린 대한항공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 대리인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 발언에 주주들이 항의하고 있다. 2사진/뉴스1

이후 주총 의장을 맡은 우기홍 대표이사 부사장은 "반대 토론이 충분히 이뤄졌다"며 재무제표 승인의 건이 원안대로 통과됐음을 선언했다. 이에 채 의원 등이 "실적에 영향을 미치는 질문을 했음에도 아무도 답변하지 않고 안건을 통과시켰다"며 경영진의 무책임한 행동을 질책했지만, 우 부사장은 "(해당 발언이) 회사의 재무제표와 큰 상관이 없는 것으로 판단해 의견을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며 주총 진행을 강행했다. 반대 의견을 감안해 표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주에게는 "몇 주를 가지고 왔냐"며 "그 정도 표로는 안건 통과 여부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답했다. 

조 회장의 연임 부결 선언 직후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현장에서의 표결을 생략한 채 사전 확보된 위임장만으로 결론을 지은 것에 주주들의 불만이 이어진 것. 한 주주는 "현장에 있는 주주들의 찬반을 묻고 이를 속기록에 정확히 남겨야 한다"며 "각 안건마다 찬반이 제대로 집계되지 않은 것은 절차적으로 위법이다"고 지적했다. 이에 우 부사장은 "오늘 아침까지 사전 위임장과 국민연금을 비롯한 대주주, 외국인 주주 등의 주식 수를 파악했다"며 "다른 주주들이 몇 십만주, 몇 만주를 가져왔더라도 결과에 큰 변동이 없기 때문에 선언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투표를 한 적도 없는데 소액주주의 통계가 어떻게 나오냐"며 "공산당과 다를 바 없다"는 항의가 이어졌다. "질서를 유지해 달라"는 우 부사장의 당부에도 찬반으로 나뉜 주주들의 말싸움이 지속됐고, 현장 곳곳에서는 "지저분하다"는 비아냥 섞인 목소리들이 들렸다.  

대한항공은 이날 "외부 환경 변동성이 예상되지만 사업 목표를 반드시 달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서둘러 주총을 마무리했다. 

"자본시장 촛불혁명" vs "연금 사회주의 우려"

전일 국민연금의 반대 의결권 행사 결정으로 부결 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졌던 이날의 결과에 국내 의결권 자문사들은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라며 긍정적 평가를 내놨다. 강화된 주주권 행사로 대기업 총수가 경영권에 제한을 받는 첫 사례가 발생한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 서스틴베스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 앞서 조 회장의 재선임안에 반대 투표를 권고했던 자문사들은 "재벌기업의 총수도 국민과 주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엄중한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예전에는 주총 안건이 올라오면 통과되는 것이 당연시됐는데, 이번 사례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면 회사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좀 더 많은 기관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소액주주들도 전보다 훨씬 관심을 갖고 표 행사에 나서고 있다"고 변화된 사회상을 분석했다. 

이날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최종구 금융위원장 역시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가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한 후 이행하는 좋은 사례를 보여줬다 생각한다"고 조 회장 연임 부결의 의미를 평가했다. 

 

27일 서울 강서구 발산1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한 박창진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 연대 지부장을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조양호 회장의 연임저지에 성공한 뒤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2019.3.27/뉴스1
27일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제57기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한 박창진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 직원 연대 지부장을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조양호 회장의 연임저지에 성공한 뒤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뉴스1

반면 재계의 긴장감은 고조됐다. 이번 케이스의 여파가 얼마나 갈 것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이날 배상근 전무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주주들의 이익과 주주가치를 감안해 신중한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사안임에도 사회적 논란을 이유로 연임 반대 결정을 내린 것을 우려스럽게 생각한다"고 유감의 뜻을 전했다. 

전경련은 이어 "그간 조 회장이 대한항공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노력해 왔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결정으로 판단된다"며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도 반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또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는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있는 만큼 보다 신중했어야 하는데 아쉽다"고도 전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도 "국민연금이 기업경영권을 흔드는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경총은 "기업의 경영권에 대한 평가는 부분적, 일시적 사정을 넘어 장기간의 경영성과와 총체적인 관리능력 등에 대해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지만 국민연금이 조 회장건을 심의한 과정을 보면 심도 있는 논이 없이 여론에 휩쓸려 결정됐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국민연금의 의결권은 기업에 대한 경영 개입이 아니라 국민 노후자금의 수익성과 안정성 확보라는 재무적 투자자로서의 본질적 역할에 초점을 둬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한항공, 당분간 조원태·우기홍 2인 체제

대한항공은 조 회장의 연임 실패에 따라 당분간은 조 회장의 아들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과 우 부사장 등 대표이사 2인 체제로 경영을 꾸려갈 방침이다. 갑자기 결정된 사안으로 향후 계획은 절차에 따라 논의 후 발표한다는 것. 

다만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에 대한 조 회장의 영향력이 당장에 배제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조 회장이 여전히 대한항공의 지분 2.4%를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이고, 지주사인 한진칼을 통해서도 의사 결정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한진칼 지분 17.7%를 갖고 있는 최대주주이며, 한진그룹은 한진칼→대한항공·한진→손자회사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날 대한항공도 "(조 회장은) 사내이사직 상실이며 경영권 박탈은 아니다"라고 짧은 입장을 전했다. 

한편 이날 대한항공의 주가는 전일보다 2.47%(800원) 오른 3만32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장 중 한 때 3만4200원까지도 주가가 올랐으며, 거래량은 187만2550주로 전거래일(53만7159주)의 4배에 육박했다. 조 회장의 연임 실패가 한진그룹 오너 리스크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등 전반적인 체질 개선의 시작점이라는 긍정적 시그널로 읽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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