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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학벌과 르디플로의 지향성
역자의 학벌과 르디플로의 지향성
  • 성일권 l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9.04.30 17:4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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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는 4월호부터 어쩌면 미미할 수 있겠지만 의미심장한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게 뭘까요? 혹시 ‘발행인이 바뀌었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발행인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눈이 밝은 독자분이라면, <르디플로> 지면에 뭔가 변화가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역자들의 프로필에 그동안 적시해온 출신대학과 전공, 번역서를 모두 지우고, ‘번역위원’이라고만 표기한 것이 그것입니다. 독자님이 번역 기사를 읽으실 때 중요한 것은 번역의 질이지, 역자의 프로필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역자의 프로필이 강조되면, 독자님에게 괜한 편견만 초래할 수 있으니까요. 역자들은 대부분 프랑스어 전공자이고, 통번역대학원을 나왔거나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번역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독자님이 <르디플로> 기사들을 읽으실 때 역자들의 프로필을 한 번쯤 들여다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문이 뭔가 이상할 때, 독자님은 역자의 ‘화려한 프로필’에 비추어 자신의 이해력을 스스로 탓하기도 하고, 이와 반대로 학벌에 부합하지 않는 역자의 무성의함을 탓하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번역문이 뛰어날 때 독자님은 역자의 프로필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역자의 프로필을 자세히 게재했던 원래의 의도는 글을 쓴 필자 못지않게, 글을 옮긴 역자도 중요한 존재이기에 그에 대한 충실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편집위원회에서 난상토론 끝에 역자의 화려한 프로필을 적시하는 것이 번역의 질에 대한 일종의 면피용 장치일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르디플로>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인 학벌 사회를 지양합니다. 경험적으로 학벌과 학력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물론 <르디플로>는 문장이 길고 꼬이고 복잡해서, 쉽게 이해되지 않아, 때로는 박사급 이상도 어려워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럼에도 독자님의 대부분은 긴 가방끈을 갖고 있기보다는 참을 수 없는 지적호기심과 남들과는 다른 삶을 추구하는 약간의 ‘허세’를 지닌 분들입니다. 창간독자들은 오랜 기간 구독을 끊지 못해 애(?)를 먹는다고 푸념하십니다. 마치 마약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르디플로>가 시도 중인 역자들의 프로필 삭제가 독자님들의 편견 없는, 진지한 읽기에 나름 기여하길 기대해봅니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요 저서로 『비판 인문학 100년사』, 『소사이어티없는 카페』,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지도』(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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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헛헛 2019-05-05 01:52:41
유쾌한 알림글이로군요 ㅎㅎ

황수천 2019-05-13 22:55:07
맞습니다. 왜곡되지 않고 정확히 번역된 글이 중요하지, '이 사람이라면 아마 잘했을 거야'라는 생각이 드는 장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