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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도우터 오브 마인> - 가족사에서 존재사로, 곪은 내면을 간질이는 통증의 감각을 경유해 마침내 해방과 구원의 자리에 가닿기”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도우터 오브 마인> - 가족사에서 존재사로, 곪은 내면을 간질이는 통증의 감각을 경유해 마침내 해방과 구원의 자리에 가닿기”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05.1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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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모성애가 아니다”

모성, 내지는 모성애? 이 단어 속에 켜켜이 엮어진 촘촘하고도 까다로운 ‘의미의 지층들’을 ―경우에 따라선 충분히 ‘문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법한 지점까지 수반하는― 낱낱이 따져보아 텍스트와 대질해보는 작업 따윈, 구태여 감행해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썩 괜찮은 일이지 싶다. 암만 봐도 <도우터 오브 마인>을 궁극적으로 모성 그 자체를 다루기 위한 영화라 판단하긴 좀 어려운 까닭이다. 통념적으로 가지게 될는지 모를 인식과는 달리 말이다.

만약 모성을 매개 삼아 전개되는 작중인물들의 갈등에만 오롯이 집중하기 위함이었더라면, 굳이 “나의”(of mine)라는 표현을 제목의 일부로 취해야 할 까닭은 없었을 터이다. 차라리 “내”(my)라는 말로 갈음해버리는 편이 함축적인 의미전달에 훨씬 용이할뿐더러, 더 경제적인 표현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 이유를 조금은 달리 생각해봐야만 할 것이다. 우선적으로 떠올려봄직한 건, 후자(‘내’)와는 달리, 만약 전자(‘나의’)가 수식어구로 동원돼 어떤 단어에 들러붙게 될 경우, 다소 독특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이를테면 마치 약간의 틈새나 일체의 공백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인 양 ‘꽉 다물리는 대신’에, 어휘의 의미영역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개방된다고 말해보는 편이, 이에 대한 그럭저럭 괜찮은 설명이 될 터이다. 가령 ‘내 딸’이란 말이 특별한 변론의 여지를 두지 않는 단순한 선언의 어의를 취하는 반면, ‘나의 딸’이란 표현은 주장과 비스름한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주장 비스름한 뉘앙스라니?

간단히 말해본다면 이런 뜻이다. 무엇인가가 나의 것이라는 표현 속엔 그 무언가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그리고 나의 것이 아닌 건 아니라는 전제에 대한 나름의 믿음이 서려있다. 환원할진대 주장에 가까운 뉘앙스란 건 ‘이런 믿음으로부터 발현되는 분위기’를 지칭함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믿음은 사실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래서 확실한 정오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모호성을 갖는단 뜻이다. 그러니, 만일 또 다른 누군가가 동일한 주장을 걸어오게 된다면 꽤나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통 참/거짓을 분별할 수 없는 복수의 것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모든 게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돼버린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모호한 믿음들이 서로 부대끼는 중에 마땅한 출구를 찾기가 어렵게 돼버린 상황. 이것이 곧 텍스트가 직면한 ‘영화적 사태’의 대강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작중의 중심인물들이 저마다 ‘모호한 믿음’에 도취된 이유는 그들 각자가 나름대로 겪고 있는 실존적 문제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실존의 무대 곧 복잡성의 세계 가운데 내던져진 한 명의 존재자로 살아가는/살아내는 어려움에서 기인한 각양 내면적 갈등과 연약함 탓이랄까? 말하자면, 낱낱 인물들은 바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모성이란 알껍데기 뒤로 고스란히 숨긴 채, 외면하고, 방어하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마치 어머니로서, 어머니이기에, 반드시 겪을 수밖엔 없는/겪어야만 하는, 정확히 그런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확실하게 아니라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상 밑에 가려 본질을 은폐하는’ 경우라고 진단해보는 게 조금은 더 적절한 견해일 성싶다.

달리 번역해보자면 일차적으로 텍스트 속에서 이 모성은 모종의 ‘장치’로 복무하고 있다. 아울러, 한 발 더 내딛어보자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럼에도 저마다의 속사정은 판이하게 다른― 두 장치의 격정적인 충돌이, 결과적으론 깊이 감춘 그네들의 진실을 외려 지표로 끌어올려 현상해내는 계기가 된다는 점 또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의식의 표면으로 내던져진 난감한 진실을 마주 대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느냐 혹 그렇지 않으냐의 여부가, 곧 존재론적 자기전회의 가능성을 결정지어줄 최종 준거로 작용할 것임은 물론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꽤나 역설적이게 들릴는지도 모르겠으나― 모호한 믿음(모성)의 대상(딸)이 내면의 효과적 단속을 위한 계기로 복무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론 그것의 빗장을 열고서 끝내 해방을 가져다줄 열쇠가 되기도 한다는 성찰에 가닿는 것 또한,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터이다. 물론, 이 구원자 또한 제 나름의 문제를 겪고 있다. 그녀가 구원의 열쇠를 손아귀에 거머쥐게 되는 건 역시나 제게 주어진 만만찮은 생의 세례를 경유함을 통해서다. 즈음하여 정돈해보자면 ―이상의 논의로부터 미루어보건대― 인물들을 면면히 스케치해보는 일이야말로 텍스트에 다가서는 가장 미더운 길이 될 것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좇고 또 끊임없이 좇다
너머의 어딘가로 가닿은 시선

“인물 스케치, 음습한 내면 풍경의 그림자들”

카메라의 눈길이 최초로 가닿는 자리는 딸 비토리아의 얼굴이다. 영화의 도입부는 어린아이의 움직임을 주밀한 시선으로 끈덕지게 좇아가는 패닝/트래킹 쇼트로 짜여 있다. 긴 호흡으로 소녀의 발걸음을 쉼 없이 추적하는 바로 그 시각, 스크린 속엔 묘한 소리들이 덧입혀진다. 음의 고저차가 날카롭게 두드러지는 반복적 리듬음악과 시끄러운 말소리들이 협연하여 만들어낸 불쾌한 사운드몽타주는 아이의 복잡한 심리, 좀 더 정확하게는 내면세계에 깃든 해소되지 않은 불화의 지점들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해낸다. 어미로 추정되는 이의 허리춤을 폭 끌어안는 순간 거슬리는 소리들이 약간 잦아들긴 하지만, 그렇다 해서 완전히 소멸돼버리는 건 아니다.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반영하는 듯, 어느덧 걸음을 멈춘 소녀의 시선은 오래도록 외화면의 어딘가를 향해 머무른다. 그 응시가 가닿는 자리에, 아마도 그이의 갈증과 관계된 무엇인가가 존재할 것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예측해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분리된 공간 그리고 분리된 존재

   몇몇 쇼트들을 통해 소녀의 갈증은 암시적인 형태로 구체화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에 묻어나는 건, 짙은 의혹과 이질감이다. 마치 그 시각 눈빛으로 타인의 얼굴을 핥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스며드는 이물감을 참아내는 건 꽤 어렵다. 생김새도, 머리색도, 부모와 전연 다르기 때문일까? 몇 분 후 이어질 세 식구의 식사장면에서 아이의 형체는 각진 유리판 속에 외따로 분리된 채 프레이밍 된다. 이로써 조심스레 짐작해볼 수 있는 건, 소녀가 맞닥뜨린 질문, 좀체 해소되지 않는 실존적 의문이란 게, 암만해도 그녀의 삶의 기원과 관계되는 것이리란 점이다. 그건 분명 지금의 부모를 여전히 신뢰하고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공백과 같은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퍼즐의 빈틈과도 같이 말이다.

반면 티나(양모)의 내면을 사로잡고 있는 건, 제 삶의 모든 요소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묶이지 않는 상황을 좀처럼 참아낼 수 없다는, 도착증적이고 자폐적인 욕망이다. 유년기의 외상(trauma) 때문인지, 더러는 스치듯 지나가며 묘사된 바 있듯 ―불임문제를 놓고서 오래도록 가부장적인― 시댁 식구들과의 사이에서 빚어져 온 갈등에 상처를 입어 그만 내면이 넝마가 돼버린 까닭에선지, 그녀는 삶의 안정감이 흔들리는 것 ‘그 자체’를 도무지 견뎌내기 힘겹다. 이렇게 연상해보는 것도 가능할 터이다. 정교하게 쌓인 블록일수록, 어느 한 부분의 이탈이, 능히 전체를 무너져 내리게 만들 만큼의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노라고 말이다.

 

눈을 가린 강박적 욕망

   확실히 지난 10년 간, 자신의 삶을 가지런하게 엮어 지탱해온 끈이자 질서를 부여해주었던 의미적/기능적 중추는 비토리아의 존재였다. 티나는 그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잠든 아이의 발 냄새를 맡아왔다고(그것에서 평안과 만족감을 누려왔다고) 뇌까린다. 아울러,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생부에게서 유전된 것임에 분명한― 그녀의 머리칼이 자신의 머리를 닮아 검은색이 될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기까지 하다. 이는 생활의 보존제인 비토리아에 대한 소욕이 거의 강박적인 집착수준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의 주춧돌을 탈구시키려 하는 간질임에 대해 불안과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건, 어쩜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슬픔 그리고 또 다른 슬픔

안젤리카(친모)의 경우 티나와는 정반대의 어려움을 겪고 있노라 말해보는 게 옳을 터이다. 어떤 원리를 동원해 좀처럼 그 삶을 일매지게 묶어낼 수 없는 존재, 삶의 낱낱 조각들이 부스러지기 쉬운 서벅돌 파편마냥 이리저리 제멋대로 흩날리는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라 진단해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무직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루라도 술에 만취하지 않고선 지나칠 수 없는 생활에 절어 있고, 통상적인 윤리개념은 개나 줘버리라는 듯, 그 어느 누구와도 무람없이 자유연애를 즐기며 섹스를 나누는 그녀에게서, 겉으론 자유라고 쓰되 기실인즉 공허와 절망이라고 읽을 수밖엔 없음직한 음습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도의 생활고에 내몰린 끝에, 유일하게 친구처럼 여겨온 가축마저 팔아넘길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자, 그녀는 등을 쓰다듬으며 거듭 미안함을 토로한다. 카메라는 놓치지 않고 이 장면을 숨죽여 붙들어낸다. 꽤나 긴 호흡으로 말이다. 고정된 시선을 유지하는 동안 반복되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입체화된다. 그것은 헐값으로 팔려갈 자에 대한 미안함인 동시에, 헐값처럼 다뤄 완전히 바스러져버린 자신의 삶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한 것이다.

 

“불화의 씨앗, 시나브로 격화되어가는 갈등의 여정”

일말의 유격도 없이 꽉 짜인 삶, 최소한의 정박지도 없이 흘러 다니는 삶. 개중 무엇 하나도 현실에 뿌리내린 생의 실체성을 담보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허구를 지향하게 될 따름이며, 끝끝내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될 뿐이란 것이다. 앞에서도 간단히 술회한 바 있듯, 은폐된 비밀의 빗장을 열어젖히고 감춘 진실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리는 것은, 비토리아의 존재다. 보다 정확하겐 두 사람 사이에 본격적으로 그녀의 존재가 비집고 들어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문제로 현상되기 시작했노라고 말해볼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최초의 시점은 안젤리카의 청에 따라 티나가 비토리아를 대동하고 그녀의 집을 방문했던 바로 그 때라고 하겠다. 셋이서 처음으로 한 자리에 마주하게 된 이 긴장어린 순간은 의미심장한 형태로 시각화된다. 비토리아는 안젤리카를 올려보고, 안젤리카는 비토리아를 내려다보며, 티나는 위험인물 앞에라도 선 양 ―혹은 자기 삶의 버팀목인 그녀를 빼앗길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양― 비토리아의 두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쥐며 무의식적인 보호 자세를 취한다. 사태가 좀 진정된 이후로도, 보이지 않는/이미 솟아나버린 기류는 사그라질 생각을 않는다. 아이를 바라보며 나란히 마주 선 두 여인 사이의 공간은 침묵, 보다 정확하게는 차마 뱉어내지 못한 말들의 무게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주변 사위가, 심지어 그네들이 눈길이 가닿는 아이의 모습마저도 일제 포커스 아웃돼버린 기이한 상황은, ―이는 와이드스크린의 넓고 납작한 화면특성을 잘 살린 것이다― 둘 사일 맴도는 기류의 미묘함을 확연하게 드러내준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의 피어남
공간을 가득채운 미묘한 무게감

   바로 그날 밤 티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 누운 비토리아를 오래도록 내려다본다. 혹여나 제 삶을 지탱하는 축을 망실해버리게 될까, 스멀스멀 점증하기 시작하는 불안감을 차마 이겨내지 못한 탓이라고 할 테다. 여느 날처럼 만취해 클럽에서 돌아온 안젤리카 역시, 제 자신이 홧김에 좇아버린 반려견의 먹이쟁반을 가까이 당겨 안은 채 맨바닥에 몸을 누인다. 이리저리 격류 위 부표마냥 흘러 다니는 삶의 고통스러움을 선연히 자각한 것, 또 진정으로 자신을 붙들어 매어줄 정박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우치게 된 까닭일 터이다.

잦아들지 않는 불안감
정박점의 필요를 깨우치다

   정확히 이때부터라고 하겠다. 두 여인 사이에서 갈등의 불씨가 강열하게 피 오르게 된 것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오래 묵힌 고름이 비로소 전면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또한 이로 인해 최소한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불화의 시작을, 존재들이 치유 및 고양으로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는 모순형용격의 말로 바꾸어본다고 한들 그리 큰 무린 없을 것이다.

 

충격 앞에 무방비로 내몰리다

   티나가 성모상에게 기도를 올리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 그녀가 원하는 건 단지 ‘모든 것이 예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환원하자면 영혼의 안정감을 수복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하여 그녀는 안젤리카를 설득하기 위해 갖은 수단들을 동원하고자 한다. 남편을 대동한 담판 짓기를 위시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절차적’ 방법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그녀는 홧김에 안젤리카가 남성과 구강성교를 나누는 충격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어린 빅토리아가 목도하도록 만든다. 그리곤 그 일로 인해 외려 아이를 떠나보내게 된다. 이로써 확인해볼 수 있음직한 분명한 진실 한 가지는, 설령 그녀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모정이라는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낭만화-이상화된 정서가, 적어도 그녀를 추동하는 내밀한 힘의 궁극적 근원은 아니었단 사실이다.

 

전혀 다른 삶으로의 발돋움

안젤리카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그 어떤 인간도 진심으로 대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그녀가 무엇인가를 위해 고정된 일자리를 얻게 된 일이라고 하겠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건 비토리아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다. 비토리아야말로 그녀 자신의 삶에 질서와 생기를 부여해줄 유일한 동력원이 되어줄 수 있음을 깨치게 됐단 사실을, 부인할 길은 달리 없을 것이다. 비토리아와 티나의 전화장면에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그리고 대단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꾸준히 드러내는 것은, 그녀를 혹시라도 다시 빼앗길까 잔뜩 경계의 자세를 취하는 안젤리카의 무의식이 표출된 것이라고 ―결국엔 마음을 돌리지만― 말해볼 수 있겠다.

 

“대위법적인 전회, 도리어 회복과 상승의 노정으로”

즈음하여 비토리아의 시선을 통해 일련의 흐름을 재인하고 재구해볼 필요도 있을 터이다. 어찌됐건 두 사람의 영혼이 회복되고 또 한 차원 성장을 경험하는 건, 결과적으론 비토리아로 말미암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녀는 몰래 두 집 사이를 오가며, 티나의 눈을 피해 안젤리카와 교분을 쌓는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쪽에 마음이 완전히 기울었다고 보긴 어려운데, 이는 그녀의 심리적 정황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옷 갈아입기’ 쇼트를 통해서 선명하게 제시된다. 슬쩍 안젤리카의 집에 다녀온 그녀는 누가 보기라도 할까 재빨리 옷을 갈아입는다. 허나 이를 단순히 티나에게 사실을 발각당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만으로 일축해버리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인다. 여기서 두 벌 옷은 두 갈래로 갈린 정체성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텍스트의 말미에서도 드러나겠지만, 옷 벗기(입기)는 쉽게 조화되지 않는 내면의 혼선을 겉으로 현출해내는 강력한 시각적 표상이다.

 

옷 벗기와 옷 입기

   친밀함이 날로 더하여가는 어느 날, 안젤리카의 손에 이끌린 비토리아는 산에 오른다. 이날의 일을 친모확인의 사건 정도로 정돈해봄이 좋을 것이다. 확실히, 비토리아가 산정폭포 한 가운데 몸을 담근 것을 세례(신생)에 비할 법하고, 두 사람이 산에서 내려오는 ―부러 신비감을 더하고자 로우앵글로 포착해낸― 장면을 이른바 변화산에서 내려오는 예수와 그의 제자에 비할 만하며, 좁고도 기다란 일방통행로를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듣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마치 내장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감각마저도 환기시킨다. 상술한 일련의 쇼트들을 통해 안젤리카의 정체를 확인하고 자신의 출생 및 양육에 얽힌 비밀을 전해 듣게 되면서, 비토리아의 마음이 그녀 쪽으로 좀 기울게 되었음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물론, 길러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소멸돼버린 건 아니다. 심지어는 티나의 실책에 분노하여 안젤리카와 같이 살기를 택했음에도, 비토리아는 자신의 열 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파티를 준비해놓고 기다리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라 불러도” 괜찮을는지의 여부를 묻는다.

신생의 존재들
내장 밑바닥까지 들추어내다

   생일날 아침의 ‘전화사건’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에서 강렬한 기폭제로 작용한다. 티나는 이 일로 인해 순간 분별력을 잃고서는 둔기를 손에 쥔 채로 집을 나서고, 안젤리카는 깊은 고민 끝에 아이의 장래를 위해선 자신의 곁을 떠나는 편이 보다 좋을 것이라 여겨, 고의적으로 비토리아를 모질게 대한다. 그렇다 해서 둘 중의 어느 한쪽이 더 성숙하다 말하기 힘겨운 건, 안젤리카 역시도 비토리아를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일(자신에게 정말로 일확천금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조차 대단히 불확실한 일)의 도구로 삼고자 했으며, 그것을 위하여 실제로 여러 가지 기술들을 공들여 가르쳤단 사실을 아무래도 부인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되레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두 사람 모두가 같은 시각 심각하게 동요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동요가 그들이 그간 겪어온 내재적 변화와 전혀 무관하다 말할 순 없다는 점이라 하겠다.

주체할 수 없게 돼버린 주체
불가항력적인 가혹함의 출현

   변화의 과실(果實)은 영화의 말미에서 흐드러진다. 한동안 뜨거운 적대관계를 유지했던 두 사람이 어깨를 기대고 부축하며 내려오는 장면은, 단순한 화해 따윌 말하는데서 그치고자 함이 아니다. 만일 허위의 장막 뒤편에 가려진 스스로의 실제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안아 들이기로 결정할 수 없었다면, 또한 이러한 결정으로 말미암아서, 상대 역시도 그러할 것임을 긍정할 수가 없었더라면, 아무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일 터이니 말이다. 달리 번역하자면 그건 비토리아를 사이에 두고 전개된 불화의 현장 속에서 맞닥뜨린 자기직면의 깨달음이, 오랜 고뇌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영글어, 비로소 열매 맺음의 형태로 밖으로 뿜어져 나오게 된 것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을 터이다. 그 영글어가는 과정을 보다 더 입체적인 시야에서 조망하고 세밀하게 소묘해내지 못했다는 점이, 다른 한편으론 텍스트의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미소 곧 해방된 공동체의 표징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는 것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비토리아는 상의를 벗어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옷을 버렸단 건, 이젠 더는 어느 한쪽의 옷에 상대적인 선호를 둘 필요도, 나아가서는 이 옷에서 저 옷으로 그리고 다시금 이 옷으로 옮아가는 쳇바퀴 운동을 지속할 필요 역시도 사라져버렸단 말이 된다. 물론 최종적으론 더는 어느 누구의 딸이란 위치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신다움을 발견하고 비로소 끌어안게 되었다는 말로 번역해보는 것 또한 가능한 일일 테다. 자기 뒤를 따르는 두 사람이 마침내 가닿게 된 자리처럼, 그 해방의 징표로, 대적하던 서로를 비로소 끌어안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에 뒤를 돌아보며 슬며시 지어 보이는 비토리아의 미소는, 자유로운 자들의 공동체가 이룩되었음을 확인하는 구원자의 선언과도 같다. 이야기가 종결되었음에도/더는 말해질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서 오라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이를 꽤나 오래도록 붙들어 매는 카메라의 긴 호흡은, 존재의 도약이 이루어지는 이 비밀한 순간을 추체험을 통해 보다 현격하게 촉지해볼 수 있도록, 우리를 끈덕지게 견인해 그 공간 속에다 붙들어 매기 위함이라고 할 테다-. 

 

 

 

글ㆍ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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