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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기의 시네마 크리티크] 전기 영화와 음악 영화의 분열점 - <로켓맨>과 <보헤미안 랩소디> 함께 보기
[조한기의 시네마 크리티크] 전기 영화와 음악 영화의 분열점 - <로켓맨>과 <보헤미안 랩소디> 함께 보기
  • 조한기(영화평론가)
  • 승인 2019.06.0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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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켓맨>은 입지전지적인 가수 엘튼 존의 삶을 소재로 한 뮤지컬 영화이다. 주지하다시피 현실을 교란하는 양식화된 과잉은 뮤지컬 영화 장르의 미학이다. 영화에서 엘튼 존의 무대는 극적 연출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현란한 퍼포먼스와 엘튼 존의 히트곡으로 구성된 뮤지컬 넘버가 주는 시청각적인 쾌감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존 인물의 일생을 조망하는 데 과잉된 표현 양식은 양날의 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로켓맨>의 경우 영화에 고인 비감한 정서와 달뜬 분위기의 기이한 공존이 잦은 감정 전환을 요구하곤 한다. 수용자는 영화의 맥락을 세심하게 좇지 않으면(혹은 반대로 완전히 몰입한 경우에도) 정감의 불일치에 부딪히기 쉽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신나는 음악은 신나는 대로, 슬픈 음악은 슬픈 대로 여흥을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

사실 뮤지컬 영화에서 과잉은 필연이며, 미덕이기도 하다. 이 글의 목적은 <로켓맨>의 과잉된 형식을 비판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전기 영화이기도 한 <로켓맨>에서 과잉된 표현 양식과 영화의 서사무대(diegesis)가 어떻게 결부되는가를 간략히 조망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잉의 미학을 보여주는 <로켓맨>의 서사무대는, 엘튼 존의 회상을 통한 내면세계의 재현으로 파악할 때 수월한 접근이 가능하다.

영화는 소심한 소년 레지날드 드와이트가 세계적인 가수 엘튼 ‘헤라클레스’ 존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천재 음악 소년은 부모의 냉대 속에서 자랐다. 드와이트는 사춘기부터 외모 콤플렉스와 동성애 성향으로 인해 심한 속앓이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나 위축됐던 그는 운명처럼 로큰롤과 만나고 팝스타를 동경하게 된다. 클래식을 그만두고 음반사를 찾은 드와이트는 변신을 꿈꾸며 엘튼 존이라는 예명을 짓는다. 작사가 버니 토핀과 함께 무명생활을 견뎌낸 그는 미국 공연을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된다. 이후 존은 승승장구하며 부와 명성을 얻지만, 마음 속 깊이 자리한 결핍을 극복하지 못한다. 오히려 소심한 드와이트와 위대한 엘튼 존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이 그를 더욱더 괴롭게 만든다. 쇼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존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만,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져만 간다. 갖은 중독증과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는 급기야 공연장에서 도망치기에 이른다.

<로켓맨>은 여러모로 <보헤미안 랩소디>와의 비교를 피하기 어려운 영화이다. 실제로 두 영화는 여러 유사점을 갖고 있다. 전설적인 가수의 인생을 조망한다는 점. 두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다룰 때 여러 콤플렉스와 퀴어 문제의 예민함을 피할 수 없다는 점. 주인공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예술가의 고뇌, 특히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간극을 다룬다는 점. 무엇보다 영화의 플롯 구성이 그들의 음악과 긴밀히 연결된다는 점을 공유한다.

하지만 두 영화를 꼼꼼히 살펴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발견된다. 두 영화의 가장 큰 대별점은 첫 시퀀스에서 분명하게 공지된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경우 ‘라이브 에이드’를 준비하는 프레디 머큐리의 뒷모습을 추적한다. 반면 <로켓맨>은 요란한 악마 복장을 한 엘튼 존이 공연에서 이탈해 포커스 그룹 인터뷰에 참여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공연무대를 중심으로 보자면 한 사람은 들어오고, 한 사람을 물러서며 영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화의 모든 서사궤적과 누적된 감정이 하이라이트인 ‘라이브 에이드’의 실황 공연에 맞춰 폭발하는 영화였다. 솔직히 말해 그에 다다르기까지 영화의 미감은 분명 거친 부분들이 있었다. 몇 가지 꼽아보자면, 퀴어와 인종 문제 등 프레디 머큐리의 인간적 고뇌를 다루는 방식을 아쉬워하는 논평들이 많았다. 다른 퀸 멤버의 성격이 기능화된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연대기적인 사건 진행에서 인물과 감정선의 미묘한 결락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지적을 뒤엎은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 요인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주목할 부분은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퀸의 음악이 베푸는 시청각적 쾌감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는 점이다. 싱어롱 열풍을 포함한 영화의 화제성은 영리한 마케팅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플롯에 천착하기보다 퀸의 무대에 대한 핍진한 재현을 선택한 음악 영화였다.

 

 한편, <로켓맨>은 뮤지컬 영화의 장르 관습을 충실히 따른다. 엘튼 존의 히트곡을 편곡한 뮤지컬 넘버는 서사에 적절히 부합하며, 퍼포먼스 장면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러모로 태런 애저튼의 열연이 돋보인다. 플롯 구성과 점프 컷은 <보헤미안 랩소디>보다 매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로켓맨>에선 시퀀스를 클라이맥스에 달하게 만드는 화려한 퍼포먼스와 영화의 정조가 기묘한 불일치를 이룰 때가 있다. 노래와 춤은 더할 나위 없이 현란한데 그 내연은 우울로 가득 찬 부조리한 감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를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로켓맨>에서 서사무대는 환멸에 젖어 공연무대를 탈출한 존의 회고를 통해 재구되고 있다. <로켓맨>은 일종의 겹텍스트로 구성된 자기 고백 서사인 것이다. 존은 사랑하는 음악이 자신을 세간의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모순과 마주한다. 그의 고백은 내면의 결핍을 성찰하는 작업이며, 종국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으로 승화된다. <로켓맨>의 서사무대는 엘튼 존의 내면 묘사에 결속된 것이다.

 

이처럼 두 음악 영화는 주인공의 삶을 재현하는 데 다른 방향성을 보인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죽은 프레디 머큐리를 재소환하기 위해 무던한 애를 썼다. 때론 곁가지로 보이는 명곡의 탄생 일화를 삽입하고,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와 당대의 열기를 사실에 가깝게 재현했다. <로켓맨>은 뮤지컬 형식으로 존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의 결핍과 고뇌가 영화의 정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로켓맨>의 서사무대는 현실로 위장된 심리적 세계이다. 이에 동의한다면 영화에서 낯섦 감각을 유발하는 몇몇 과잉 연출은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과거를 반추하는 존의 심정이 적극적으로 투영된 장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존이 공연 중에 날아오르는 장면은 각별한 해석을 안긴다. 그 환상적인 찰나는 존이 군중으로부터 극도의 압박감을 느끼는 장면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의 삶을 지탱하는 고양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연출은 존이 느끼는 현실과 내면의 긴장관계를 심미적으로 표현한다.

음악 영화 장르에 바라는 수용자의 기대를 고려할 때, 음악의 기능은 플롯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로서도 의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러한 측면에 부응하는 영화였다. 한편으로 뮤지컬 영화에서 뮤지컬 넘버는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영화의 주제를 표상하고 통합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로켓맨>의 뮤지컬 장면은 그러한 역할에 충실하다. <로켓맨>이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놀라운 소구력을 발휘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다만, 유사하지만 다른 결을 가진 영화의 그늘에 가려 필요 이상으로 폄하되지 않길 바란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조한기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수료. 2018 영평상 신인평론상과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 2018 만화비평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문화와 스토리텔링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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