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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쓸쓸함의 물성과 적막의 상태변화- 차이밍량론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쓸쓸함의 물성과 적막의 상태변화- 차이밍량론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06.2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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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의 물성

차이밍량의 인물들은 혼자서는 메울 수 없고 관계를 통해서도 극복할 수 없는 ‘결핍’과 싸운다. 인물들은 출구가 없는 소외의 늪에서 조용히 발버둥친다. 멀리서 보면 그들은 도시화, 자본화의 속도와 불화한다. 개발의 논리가 바꿔놓은 풍경 아래에서 끝없는 유랑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들은 소통의 벽에 가로막혀 고독과 외로움을 떨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차이밍량의 영화를 본다는 건, 언어가 최소화 된 세계에서 적막의 깊이로 내려가는 체험이 된다.

차이밍량의 느린 침묵의 세계는 성찰적 관람을 시도하는 이에게 무수한 질문을 허락한다. 도시의 변방으로 밀려나 겉도는 인물들은 무엇과 불화하고 어디서 소외된 것인가. 파편화된 관계망 안에서 그들이 서로를 구원할 방도는 없는가. 고독한 인물들이 마음을 나누는 공간(폐건물 등)과 사물(매트리스 등)이 있지만, 그들은 왜 안식을 취할 수 없는가. 타인과의 심리적 거리, 감정적 간격 안으로 퍼붓는 비와 그들이 마주한 물 웅덩이, 틈새로 흐르는 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차이밍량 자신은 이 질문을 싫어하지만) 도대체 왜 비와 물인가. 영화는 항상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히 주지 않고, 우리 각자가 준비한 답안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가진다. 그 깨달음에 이를 즈음에 차이밍량의 영화는 끝난다. 확실한 건, 해명하기 벅찬 엔딩에 매혹되고 나면 차이밍량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차이밍량은 쓸쓸함을 머금은 피사체의 물성을 곧잘 활용한다. 예를 들면 정돈된 도시 내부에 도저히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폐건물과 낡은 아파트, 인물들의 사적 욕망과 괴로운 생계가 동시에 읽히는 공공화장실, 유랑하는 인생들이 잠시 부대끼는 주인 없는 침대와 허름한 매트리스, 부서져 있거나 벽지가 흘러내리거나 불탄 흔적을 가진 방, 어둠 속으로 음습하게 이어지는 텅 빈 복도, 해갈할 수 없는 욕망을 감각시키는 사물들, 예컨대 수박이거나 생수통이거나 양배추와 같은 것들, 내면을 장악한 강박의 한 양태를 보여준 담배와 담배연기, 기하학적으로 이어지는 계단 등은 차이밍량의 이미지텔링 안에 거의 항상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가 만든 인물들은 이들 사이를 부유하는 기표다. 자기 사연만큼의 적막을 머금은 채 쏟아지는 비와 여기저기서 새어나오는 물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의 한 양태다.

지금부터 차이밍량이 만들어 온 영화 속 쓸쓸함의 물성을 천천히 주목하고자 한다. 그로부터 인물들의 관계 안에 스며있는 적막이 어떻게 시각화 되어 왔는지를 따져보기로 한다. 그의 어려운 영화를 쉽게 말하는 한 방식이 있다. 말레이시아 이민자 출신 게이로 대만에서 활동해 온 인생역정을 영화 속 고독의 깊이를 재는 데 이용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상업영화 제작·배급 메커니즘을 거부하면서, 한편으론 투자처를 구하기 위해 방황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글은 영화 밖의 틀림없는 정보로 영화 안에 흩뿌려진 모호한 단서들을 수렴하지 않으려 한다. 차이밍량이 침묵의 이미지로 빚은 세계를 그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들로 말하려 한다.

 

기체적 환멸- <애정만세>, <흔들리는 구름>

‘고독(solitude)’은 현존재의 근본적인 소외와 연관된 단어다. 세계에 던져진, 세계에 대해 가능성을 가진 현존재는 고독에 휩싸여 실존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다. 그와 비교하면 ‘외로움(loneliness)’이란 상대방을 의식함으로써 얻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그에게 내가, 혹은 나에게 그가 부재함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타자 지향성이 내포된 감정이다. 전자는 우리가 자주 자각하기 힘든 근본적인 소외와 관련된다. 후자는 빈번하게 우리를 다녀가는 자기연민의 감정으로 유사 상황 하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처지에 가깝다. 흥미로운 건 양자가 서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루된다는 사실이다.

차이밍량이 창조한 인물들은 바로 그 연루 가능성, 곧 고독과 외로움이 인물의 표정과 행동 안에서 예민하게 교차하는 것을 보여주곤 한다. 그들은 고독에 뿌리내린 외로움, 외로움으로 표출되는 고독의 면면을 다양하게 드러낸다. 그들을 거기로 이끈 환멸의 세계를 반사하곤 한다. 최근 차이밍량이 연출한 ‘행자 시리즈’를 예외로 둔다면, 그의 영화엔 항상 타인에 대해 꿈꿨던 더 나은 관계가 깨지면서 들이닥치는 괴로움과 속절없는 마음이 있다. 차이밍량이 그려낸 환멸의 세계란, 흩어져버릴 열망, 이미 훼손되고 있는 기대와 관련된다.

차이밍량이 다루는 환멸에 대해 이 글에서는 ‘기체적 환멸’이라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 이 표현을 책임지기로 한다면, <애정만세>부터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차이밍량이란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킨 이 작품을 두고 평소 과대평가 된 면이 있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이 바뀐 건 아니다. 그러나 <애정만세>에는 언어를 주고받지 않고도 인물들의 감정선이 서로에게 가닿는 장면들이 여럿 있다. 영화 속엔 해결 불가능한 고독과 불안으로 인해 서로 결속되지 못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만남이 반복되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해져간다. 그럼에도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고독과 소외감은 끝내 떨쳐지지 않고 각자의 인생 크기의 절망이 된다.

<애정만세>에 등장하는 빈 아파트는 그 절망적 공허감을 확인시키는 결정적 배경이다. 세 인물의 근원적 고독과 불안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공간이면서 서로 간의 간극을 더 좁힐 수 없다는 불안이 떠다니는 장소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당대 타이베이를 살아가는 젊은 청춘들이 처해 있는 처지를 대변한다. 샤오강(이강생 분)과 메이(양귀매 분)는 각각 납골당 분양인, 부동산 중개인으로 살아간다. 땅이 곧 돈이 된 타이베이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자기 공간을 갖기 어려운 대도시다. 그곳에서 그들은 타인의 공간에 기생하며 희미한 미래를 더듬는 존재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샤오강은 죽은 자의 보금자리를 홍보하고, 양귀매는 살아있는 자의 머물 거처를 판매한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매매에 부쳐진 빈 아파트를 공유하는 사이로 나아간다.

이 아파트에 사사로이 틈입하는 마지막 인물은 아정(진소영 분)이다. 그는 당시 타이베이 청춘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일종의 간이 무역업을 하는 중이다. 해외를 오가며 구입한 소량의 옷을 좌판 위에 펼쳐놓고는 손님을 모은다. 경찰이 뜨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빨리 좌판을 치우는 데에도 능숙하다. 법망의 틈새를 드나들며 자본주의적 교환 과정에서 발명되는 잉여가치에 미래를 걸고 있는 남자, 그가 아정이다. 그는 우연히 양귀매를 만나 빈 아파트에서 하룻밤 잠자리를 가진 후 그 공간을 몰래 드나들게 된다. 그렇게 보면 샤오강, 메이, 아정은 기댈 사람 없는 삶을 살며 각자의 고독을 끌고 다니다가 빈 아파트의 허허로운 공기에 숨어든 존재들이다.


(1) 1994년에 만들어진 그의 두 번째 장편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그들은 평소 각자의 생계를 위해 길 위를 떠돈다. 그 길은 사실상 고독과 외로움 사이에 난 길이다. 한 장면을 예로 들면, 소득 없는 하루를 보낸 샤오강이 빈 아파트에서 수박과 노는 신을 들 수 있다. 그는 구입해 온 수박에 키스를 하고 핥으면서 혼자만의 상상적 애정행각을 벌인다. 그리고는 수박을 굴리는가 싶더니 결국 깨져버린 수박을 씹어 먹는다. 이 장면에는 해소되지 않는 충동과 타인과의 결속에 대한 근원적인 욕망이 넘실댄다. 메이와 아정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그들이 가진 두 번의 섹스는 아무런 전망도 낳지 못한다. ‘소유-귀속’에의 약속이나 합의는 전혀 없다. 넓은 아파트의 공기에 가득 찬 외로움과 고독의 지분을 잠시 나눠 갖는 관계일 뿐이다.

영화 말미, 메이와 아정이 두 번째 섹스를 할 때, 샤오강은 그들이 뒹구는 침대 아래에 있었다. 침대 아래에서 혼자 자위를 하며 메이와 아정의 섹스에 초월적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샤오강의 자위’가 암시하듯, 그들의 관계는 어느 누구도 완전한 합일에 도착할 수 없다. 동성인 아정에게 미묘하게 끌리고 있었던 샤오강은 다음 날 아침 메이가 떠나자 아직 잠든 아정에게 몰래 키스해보지만, 그 뿐이다. 허무한 섹스 이후 메이는 공원으로 개발 중인 공터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담배를 태운다. 이 신이 <애정만세>의 엔딩이다. 희미하게 존재를 들킨 후 사라지는 메이의 담배연기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불가능한 관계다. 타인의 빈 아파트를 채운 공기에 자기 고독을 끌고 와 쉬다갈 뿐, 고독과 외로움 사이에서 그들은 모두 흩어져갈 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체적 환멸’은 차이밍량의 이미지텔링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인지도 모른다. <애정만세>에 대한 평단의 지지를 동일한 온도로 수긍할 순 없지만, 길고긴 마지막 롱테이크 신의 미묘한 힘은 인정하고 싶다. 메이가 응시한 자기 내면의 ‘빈 곳’은 이후 차이밍량 영화의 분위기를 집약한다. 차이밍량의 영화세계는 이 신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들리는 구름>은 자가 해결할 수 없는 고독과 타인을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이 인물들의 ‘갈증’으로 표출되는 영화다. 여자가 타이베이의 공중화장실을 전전하는 것과 샤오강이 생계를 위해 포르노 배우 일을 계속하는 것을 동일한 내적 증상에 대한 유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중화장실을 전전하며 물을 얻으러 다니는 여자(천샹치)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실체적으로 내보이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기 안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바깥으로 에너지를 쏟는다. 포르고 배우 샤오강(이강생 분)은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 벽 안에 갇힌 인물이다. 가장 내밀한 사랑을 공적 소비의 대상으로 제공하는 노동에 복무하고 있지 않는가. 바꿔 말해 그는 타인의 성적 갈증을 전제로 연명하는 인물이다. 바깥의 갈증을 이용하기 위해 자기 안으로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TV 장면을 보면, 정부는 심각한 가뭄으로 일정 시간 물 공급 중단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린다. 그에 대한 응대로서 여자는 생수통을 들고 바깥 세계를 떠돌며 냉장고에 비축할 물을 모은다. 그때 샤오강은 타인의 시선을 피해 물탱크에서 몰래 샤워를 하면서도 포르노 배우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냇물에 떠가는 수박을 주워 옮기다가 샤오강을 만난다. 그때 샤오강은 공원 놀이터에서 생수통을 옆에 두고 잠든 상태였다. 그들은 아마도 구면이다. 샤오강을 통해 잠긴 캐리어를 열고자 했던 여자는 그 만남을 계기로 점점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녀의 집안으로 초대된 샤오강은 그녀가 건넨 빨간 수박주스를 창문 밖에 몰래 버린다. 잠깐 지나가는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초반, 샤오강은 가랑이에 수박을 끼고 있는 여배우와 포르노를 촬영한 바 있다. 수박즙이 튀는 섹스이지만, 거기엔 황홀한 감정도 충만한 합일의 체험도 없다. 포르노배우라는 직업을 하나의 상징으로 읽는다면, 그는 신뢰에 바탕을 둔 안정적인 애착 관계의 가능성을 닫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그에게 수박주스를 재차 건넬 때,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에로스적 충동, 곧 휘발될 열망의 기표가 된다.

차이밍량은 가뭄에 시달리는 도시와 여자의 행위, 비밀 공간의 서가대를 채운 포르노 테이프들을 통해 ‘수분이 간절히 필요한 상태’를 현대인의 증상으로 치환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도시의 대기는 기체적 환멸이 범람하는 세계를 환기시키는 장치다. 이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붉은 수박은 소통에의 충동이면서 유의미한 관계 형성에 대한 간절한 멸망이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충동은 충동에서 그치고, 열망은 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도피적 환상을 낳는 뮤지컬 장르의 외피를 걸쳤음에도 <흔들리는 구름>의 마지막은 비극적 역설로 나아간다. 의식을 잃은 여배우를 데려와 억지스러운 포르노 촬영이 시작된다. 샤오강은 아무런 반응없는 여배우의 살덩이를 안고 힘겨운 노동을 계속한다. 이 장면을 벽 너머에 있던 여자가 목격하게 된다. 그녀는 사랑으로 소통하는 관계를 꿈꿨으나, 그는 열락을 흉내 내는 거짓 사랑, 허위로운 타인의 환상을 볼모로 삼는 포르노 배우였다. 그때 의식을 잃은 여배우 대신 벽 너머에 있던, 창문 저쪽에 있던 여자가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급기야 샤오강의 성기가 사정하려 할 때 여자가 입으로 받아 문다.

표면적으로 보면 <흔들리는 구름>의 엔딩은 라캉의 유명한 명제 ‘성관계는 없다’를 적확하게 시각화한다. 우리는 다른 환상, 다른 주이상스를 향해 있는 그들 사이에 끼어 든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두 인물의 사랑이 심리적 ‘위상-차이’에 의해 분리되는 것을 적확하게 보게 된다. 차이밍량은 원래의 주이상스를 대타자에게 빼앗긴 후, 불안한 편집증적 환상에 의존해온 개별자의 고독, 염세적 관계망의 확장으로 그려지는 현대인의 생활을 짚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신은 남녀의 성차 문제나 샤오강과 여자의 실패한 ‘관계맺음’의 방식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현대 도시인의 삶을 잠식해 들어온 근원적인 고독, 불안, 소외가 각자의 삶에 가하는 곤경을 보게 한다. 여자의 안방 천정에 그려진 구름 이미지가 일러준 기체적 환멸이란 그런 것이다.


2) 그녀는 잠에서 깬 샤오강에게 “아직도 시계 팔아요?”라고 묻는다. 샤오강은 포르노 배우를 하면서 시계를 판매했거나, 포르노 배우를 하기 이전에 시계를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3) 브루스 핑크, 「선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 김영찬 외 역, 『성관계는 없다』, 도서출판b, 2010, p.41.


 

액체적 긴장- <구멍>, <안녕, 용문객잔>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차이밍량 영화의 시각적 클리셰 중 하나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와 물웅덩이, 어디선가 새어나오는 물 이미지이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인물들을 단절시키거나 격리시키는 기능을 한다. 때로는 그들 사이에 발생한 관계의 균열을 의미하거나 부지불식간에 잠식해 들어오는 소외의 불안을 시각화한다. 그 때문에 차이밍량의 인물들과 물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탐색은 영화 속 적막의 성격을 분별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사적인 고백을 하면, 차이밍량에 매혹된 첫 번째 순간은 <구멍>의 엔딩으로부터 왔다. 전작 <하류>에 편만했던 염세적 우울과 불안은 <구멍>에 이르러 세기말의 전염병이 된다. 그런데 인물들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느낀 그 순간, 구원의 불가능성을 찢는 마술적 장면이 들이닥친다. <구멍>도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비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일주일 앞둔 도시는 환경오염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 상태다. 게다가 ‘대만 바이러스’로 불리는 전염병까지 돌면서 정부는 주인공들이 사는 지역의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려 한다. 그러니까 정부는 완전한 격리를 의도하고, 그곳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은 대책 없는 소외를 앞두고 있다. 주인공들은 그곳 아파트를 떠나지 않음으로써 고립을 자처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래층 여자(양귀매 분)와 위층 남자(이강생 분)를 단절시키는 콘크리트 벽에 수도공사로 인한 구멍이 생기게 된다. 가까이에 살았지만 폐쇄적인 생활을 하던 그들 사이에 사소한 대화 창구, 혹은 성가신 소통의 빌미가 만들어진 것이다. 남자는 바닥에 생긴 구멍을 통해 빗물을 버텨내지 못하는 아래층의 사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생필품을 비축한 채 단조롭고 외로운 생활을 견디는 여자의 일상을 들춰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권태를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자에게 점차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한다. 초월적 봉합의 순간을 이끌고 오는 뮤지컬 신에서 그녀는 50년대 대만 여가수 그레이스 창의 노래를 부르고 화려한 춤을 춘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의 내적 욕망이 불러온 그 뮤지컬 장면들이 끝나면 그들의 실제 현실은 더욱 비참해진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쉼 없이 퍼붓는 비는 그들에게 다른 세계로의 이탈을 원천봉쇄하는 조건이 된다. 여자의 집은 비 때문에 벽지가 뜯어지는가 싶더니, 이제 바닥에서도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그녀에게 비는 틀림없는 절망의 순간을 예감케 하는 신호다. <흔들리는 구름>에서 물 이미지가 주는 불안은 여러 정보에 걸쳐 있다. 영화 초반부터 상수도 물은 10분 이상 끓여서 3일 내에 먹어야 할 정도로 이미 오염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 물마저 단수되기에 이른다.

이 모든 상황적 조건이 인물들의 내면에 점착하면서 만들어지는 긴장을 ‘액체적 긴장’이라고 칭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 절정은 여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한 행동을 보이면서 시작된다. ‘대만 바이러스’로 명명된 그 병에 걸리면, 처음엔 엎드려 기어 다니고, 밝은 불빛을 피해 축축한 구멍 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바퀴벌레가 바이러스의 원인이라는 설이 제기되는 바, 실제로 그녀는 바퀴벌레와 같은 행동을 보이며 생필품 더미 속으로 숨는다.

그때 남자와 여자 사이를 희미하게 이어주던 구멍을 통해 남자의 손이 내려온다. 햇빛을 피해 음습한 세계에 숨어 있던 그녀는 그의 손을 마주잡고는 위로 끌어 올려진다. 비좁은 틈새를 타고 남자의 세계로 넘어간다. 빈 구멍을 통한 이 마술적 소통 장면은 가장 신비로운 섹스신과 다르지 않다. 소외에 시달리던 자들에게 기적적인 합일의 계기로 오는 섹스가 상징화된 장면인 것이다. 곧이어 영화가 끝나면서 우리는 그들의 다음 순간을 알 수 없게 된다. 다만 엔딩신이 서로를 향한 구원의 표지라면, 격리지역에 남아있던 그들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획득했으리란 추측은 가능하다. 이로써 차이밍량의 은밀한 전언이 확인된다.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 조건으로서 환경이 오염된 게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이라는 것! 이 엔딩은 차이밍량 영화세계의 또 다른 입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정서적 파장을 안기는 엔딩은 <안녕, 용문 객잔>에 등장한다. 이 영화는 차이밍량의 내면에 새겨진 기억 속 피안의 세계와 그 구성물에 대한 헌사일 수 있다. <안녕, 용문객잔>도 기존 차이밍량의 영화처럼 낡아빠진 건물(극장) 내에서 주로 진행된다. 극장 안의 음습한 분위기를 완성하는 건, 건물을 때리며 쏟아지는 비와 그로 인해 실내의 쓸쓸한 정서를 고조시키는 빗소리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이 축축한 기운을 머금고 귀신처럼, 혹은 기억 속 환영처럼 흘러 다닌다.

<안녕, 용문객잔>의 액체적 긴장은 귀신처럼 배회하는 인물들을 끌어안은 그 공간이 이제 사라질 것이라는 정보가 주어지면서 고조된다. 영화가 끝난 뒤 서사 정보를 정리해보면, <안녕, 용문객잔>은 폐관 두 시간 전의 복화극장 안 풍경을 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영화들과 내밀한 추억을 쌓았을 이곳은 이제 다른 ‘장소성(placeness)’을 입게 될 것이다. 복화극장의 마지막 표정으로 선택된 영화는 1967년에 제작된 <용문객잔>이다. <구멍>에 그레이스 창의 노래가 있었다면 <안녕, 용문객잔>엔 <용문객잔>이 있는 셈이다. 폐관 직전의 최종 상영을 지켜본 이들 중에는 <용문객잔>에 출연했던 노배우 묘천과 시천도 있다. 묘천은 40여년 전, 자신의 모습을 어린 손주와 감상한 후, 같은 시간 영화관을 빠져나오는 시천과 마주친다. 이 순간 인생과 영화가 서로를 부축하는 명장면, 가령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천국>에 흥건한 장면들을 의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이밍량은 차이밍량이어서 그는 우리의 감정을 누르며 건조하게 이 신의 여흥을 닫는다. 묘천의 손주와 비슷한 나이에 <용문객잔>을 보았을 차이밍량의 자기 추억에 대한 연민도 그 선에서 절제된다.

<용문객잔>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는 절제의 태도가 가장 빛나는 장면은 따로 있다. 다리를 저는 매표원(천샹치 분)과 내성적인 영사기사(이강생 분) 사이의 쓸쓸한 사연이 침묵 속에 적층되는 장면들. 아마도 긴 시간 매표원으로 살아온 것 같은 여자는 분홍색 찐빵을 덥힌 후, 절반을 잘라서 영화관의 길고긴 복도, 험난해 보이는 계단을 지나는 긴 여정을 떠난다. 텅 빈 복도의 공기를 울리며 청각적 긴장을 자아내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는 <안녕, 용문객잔>만의 진기한 순간이 된다. 절뚝이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는 마치 싱코페이션처럼 우리에게 미묘한 기다림의 간격을 베풀며 외로움의 깊이와 고적감의 부피를 체감시킨다.

또 다른 인상적인 청각적 기표들도 있다. 낡은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 1000석 규모의 객석을 공허하게 울리는 대사 소리 등은 영화관 바깥에서 틈입한 빗소리와 어우러져 매혹적인 공허감을 안긴다. 이즈음에서 계산적으로 구획된 멀티플렉스에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는 커다랗고 낡은 옛 영화관에 대한 차이밍량의 마음을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와 대만에서 제작되는 할리우드식 상업영화 사이에서 설자리를 잃어가는 차이밍량의 서글픔을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요컨대 <안녕, 용문객잔>의 청각적 기표들은 옛 영화와 그 무렵의 영화관에 작별을 고하는 차이밍량의 시선을 유추하게 하는 힘이다. 영화관 실내를 채운 기체적 환멸과 바깥에서 틈입한 빗소리로 완성되는 액체적 긴장이 만나는 장면들은 <안녕, 용문객잔>의 엔딩에서 더욱 고양된 감정을 이끌어낸다.

다시 다리를 절름거리는 매표원의 긴 여정으로 돌아가 보자. 그 여정의 끝엔 영사실이 있다. 그녀는 복화극장이 문을 닫기 직전, 영사실 남자에게 마음을 고백하려 한다. 이번이 처음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그런데 영사실에 다녀온ㅍ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자기 마음(진빵)을 다시 거두어 온다. 열띤 감정을 다독이면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을 안으로 여미는 그녀의 실천은 옛 영화관과 사랑했던 영화에 대한 차이밍량의 태도와 미묘하게 중첩된다.

<안녕, 용문객잔>을 배회하는 마지막 인물은 외로움에 시달리는 일본인 게이다. 그는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룻밤을 보낼 파트너를 찾고 싶은 마음뿐이다. 우리가 상기해볼 수 있는 건, 영화관이란 영화에 대한 추억뿐만 아니라, 영화를 배경으로 타인과의 추억이 만들어지는 곳이란 점이다. 그는 상영관에 붙어 있는 건물 내 비좁은 복도에서 파트너를 찾고 은밀한 사인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말은 이곳에 귀신이 떠돈다는 것이었다.

이제 <안녕, 용문객잔>의 엔딩을 이야기할 차례다. 영사실 남자에게 선택받지 못할 것이란 예감과 다투던 매표원은 매표실 찜통 안에 내 것이 아닌 마음(찐빵 반쪽)을 남겨두고 다시없을 퇴근을 한다. 매표실을 지나치던 영사실 남자는 익숙한 솜씨로 잠긴 매표실 문을 따고 들어가 기어이 찐빵 반쪽을 목격한다. 남자는 비옷을 입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급히 영화관 바끙로 뛰쳐나간다. 이때 매표실 여자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음이 밝혀진다. 매표실을 훔쳐보며 자기 미련 앞에서 혼자 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어쩌면 자신을 찾아 떠난 그를 붙잡지 않는다.

그녀는 복화극장의 마지막 관객의 모습으로, 낡은 건물을 천천히 나선다. 고정 카메라는 복화극장을 멀리서 내다볼 수 있는 길가에서 그녀를 기다린 채 부동한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한쪽이 구겨진 꽃무늬 우산을 쓴 그녀가 점점 카메라 앞으로 다가오더니 프레임 왼편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카메라와 복화극장 사이에는 기우뚱 쏟아지는 비와 땅에 부딪쳐 무정형으로 흩어지는 물방울들, 그리고 빗소리만 가득하다. 언어 없이 구축된 이 멜로드라마적 정서는 한 명의 영화감독으로 차이밍량이 뻗어나간 경지를 웅변한다. 여기가 차이밍량 영화가 만들어온 액체적 긴장의 절정이라고 믿는다.

 

상태변화, 그 후-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 <떠돌이 개>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는 다른 결의 고독과 소외에 시달리는 인물들을 통해 ‘관계맺음’의 철학을 내보이는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차이밍량의 고향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이다. 그러나 우리는 화려한 대도시의 풍경 대신 어두컴컴한 뒷골목의 습도를 접하게 된다. 대만 출신 노숙자 샤오강(이강생 분)은 그곳에서 불량배들에게 두들겨 맞고는 길바닥에 버려진다. 그를 발견한 건, 누군가 내다버린 침대 매트리스를 짊어지고 가던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일행 중 라왕(노먼 아툰)은 샤오강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후 라왕은 샤오강이 건강을 회복하기까지 헌신적인 돌봄을 실천한다. 덕분에 우리는 소외의 흔적이 역력한 타자들 간의 따뜻한 유대를 보게 된다.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의 여주인공은 커피숍 종업원 치이(천샹치 분)다. 영화는 그녀가 커피숍에서 일하는 장면보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장면을 더 자세히 보여준다. 이강생이 1인 2역을 한 커피숍 여주인의 아들은 뇌사 상태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치이가 그를 왜 돌봐야 하는가는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그녀는 그 남자의 모든 것을 돕는다. 심지어 그녀의 거처는 남자가 머무는 곳 바로 위 다락방이다. 치이는 남자에게 일방적인 헌신을 베풀 수 있는 거리에 안주하며 살아온 것이다.

영화는 건강을 회복한 샤오강이 치이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서 ‘관계맺음’의 철학으로 넘어간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선 이강생이 연기한 두 인물의 처지를 대차대조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샤오강은 거처없이 떠도는 삶을 살아왔고 라왕의 징정성있는 돌봄이 없었다면 생명을 연장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뇌사 상태의 남자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침대 위에 누워 살아왔다. 흥미로운 건, 그 역시 치이의 따뜻한 도움을 받으며 생명을 연장해 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이주’와 ‘정주’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대변하면서 타인의 도움으로 고독과 불안을 건너온 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주목할 순간은, 영화 중반부터 샤오강의 삶에 치이가 유의미한 변곡점으로 개입한 시점이다. 어디에도 안주할 곳 없었던 그에게 그녀는 마음의 정처가 되어줄 수 있는 뜻밖의 변수로 등장한다. 그 무렵부터 뇌사 상태의 남자에게는 정반대의 변화가 예견되기 시작한다. 몸을 누인 곳을 벗어날 수 없는 그에게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상수였다. 그러나 그녀가 샤오강을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서 그에게는 위기가 닥친다.

이 위기는 쓸쓸함의 물성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매트리스를 통해 더 깊은 해석에 도달한다. 영화 초반, 라왕과 그의 친구들은 누군가 버린 매트리스와 샤오강을 함께 떠메 온다. 이후 라왕은 깔끔하게 세탁한 매트리스를 샤오강에게 양보한다. 샤오강은 그 매트리스 위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는 새로운 인생을 선물 받는다. 그렇다면 매트리스는 타인을 향한 배려와 헌신을 상징하는 도구이면서 ‘관계맺음’의 효과를 성찰하게 하는 오브제로 출발한다. 그런데 매트리스는 다시 이동한다. 라왕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는 공간에서 물웅덩이가 있는 비밀스러운 폐건물 안, 곧 샤오강과 라왕만 아는 비밀스러운 거처로 이동한다. 이제 매트리스는 윤리적 배려의 ‘관계맺음’에서 내밀한 사랑의 ‘관계맺음’을 실험하는 장이 된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매트리스는 또 한 번 이동하게 된다. 이때의 이동은 영화 속 인물들의 관념적 상상 속에서 성사된 것으로 초월적 성격을 띤다. 이 상상의 주인은 한 명이 아니다. 샤오강과 치이, 라왕, 그리고 뇌사 상태의 남자 모두가 불러낸 합목적적 상상인지도 모른다. 그 상상 속에서 매트리스는 애정으로 연결된 인물들 모두를 충족시키는 ‘관계맺음’이 가능한가를 성찰하게 한다.

더 자세히 논증하자면, 영화가 진행되는 중 점증했던 관계의 파열음에 주목해야 한다. 샤오강을 사랑했던 라왕은 치이를 사랑하는 그를 놓아줘야 한다. 라왕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은 샤오강이지만 라왕의 사랑까지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커피숍 여주인과 그의 뇌사 상태 아들은 치이가 샤오강에게 마음을 열게 되면서 평온했던 일상에 위기를 맞는다. 치이 역시 샤오강을 사랑하게 되면서 가장 가까웠던 관계마을로부터 파생한 위기를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의 엔딩은 그 모든 위기에 대한 상상적 응답이다. 신비한 물 위로 둥둥 떠오른 매트리스에는 애착적인 관계망 안에서 갈등을 경험 중인 영화 속 인물 모두가 등장한다. 매트리스 한 가운데에는 샤오강이 누워 있고, 그 양옆으로 치이와 라왕이 샤오강을 향해 평화롭게 누워 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이강생이 1인 2역을 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운데에 누운 이가 샤오강이면서 뇌사 상태에 빠진 남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엔딩신 직전 치이의 다락방 신에서 샤오강은 치이를 안고 잠들었고 그 아래에 누워 있던 뇌사 상태의 남자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엔딩신 속 초월적 합일의 풍경에서 뇌사 상태의 남자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두가 자기 진심에서 소외되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상태가 엔딩신의 목적인 것이다.

재차 강조하면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의 엔딩은 사랑으로 소통하고 싶은 모두의 욕망이 관철되는 신비를 보여준다. 우선 이 초월적 공간은 라왕의 사랑(물웅덩이)과 치이의 생활(그녀의 다락방)이 합일된 장소다. 여기가 돌봄과 헌신의 관계망을 타고 이동하던 매트리스의 최종 도착지다. 차이밍량은 매트리스 위 풍경에서 ‘배타적 소유와 폭력적 귀속으로 나아가는 관계맺음 밖에서 사랑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를 묻고 있다. 그러면서 차이밍량은 <구멍>의 엔딩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여기는 기체적 환멸도, 액체적 긴장도 잠든 어떤 잠재적 세계다.

차이밍량의 영화를 잘 읽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믿긴 어렵다. 그저 롱테이크 신 하나하나의 느낌과 마주하며, 개별화된 메시지들의 불균질한 총합을 궁리해야 한다. 서사 정보의 인과적 집적이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결국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독해에 이르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떠돌이 개>는 가장 차이밍량다운 영화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현실과 꿈, 상상과 체험은 경계 없이 접합된다. 종잡을 수 없는 영상들을 놓고 ‘불균질한 총합’을 시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가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도심 한복판 횡단보도 앞에서 사람이 광고판을 들고 서 있는 풍경을 목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차이밍량이 밝힌 그 이미지에 뒤따르는 감정은 <떠돌이 개>를 독해하는 희미한 계기가 된다. 미리 밝히면 <떠돌이 개>에서는 배역의 이름, 곧 고유명사를 부르는 것조차 무의미해 보인다. 사건의 선후, 인물의 생존 여부부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배우의 이름으로 영화 속 인물들을 칭하며 가능한 이해에 도전하고자 한다.

<떠돌이 개>를 관통하는 정서적 분위기는 아버지와 남매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주어진다. 아버지는 광고판을 든 채 거친 비바람과 싸우며 도로 옆을 지킨다. 그는 인간 광고판으로 일하며 남매를 부양하고 있다. 남매는 아버지가 없는 동안 대형마트를 돌면서 생활한다. 평범한 도시민에게 대형마트는 생활을 위한 필요가 생길 때 들르는 곳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 시식 코너를 돌며 식사를 하고 함께 산책을 한다. 그곳에서의 시간이 삶이고 생활이다. 아버지와 남매가 한데 모여 생활하는 공간은 정상적인 건물이 아니다. 화려한 도시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겨지지 않는 폐가에 가깝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공중화장실에서 몸을 씻고는 폐가 한쪽 방에 모여 익숙하게 잠을 청한다. ‘떠돌이 개’처럼 도시의 음험한 틈새를 헤집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 안엔 대만의 도시화, 산업화, 자본화의 속도에 대한 차이밍량의 판단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상적인 건, 그들 가족 사이를 틈입하는 세 명의 여인이 귀신인지, 누군가의 환상인지, 아니면 세 명의 가족 이야기가 세 여자 중 누군가의 환상인지 불분명하다는 사실이다. 대형마트 매니저로 일하면서 남매를 보살펴온 루이칭은 <떠돌이 개>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녀는 대형마트 매니저로 그곳을 드나드는 남매를 극진하게 챙긴다. 영화 중반, 인간 광고판으로 일하는 아버지로부터 아이들을 구하는 것도 그녀다. 그가 도시 외곽 저수지에 묶어두었던 배에 남매를 태워 어디론가 떠나려던 찰나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루이칭과 이강생의 가족에 대한 전혀 다른 각도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강생의 가족이 폐가에 잠입해 몰래 생활하는 것을 보여준 직후의 신에서 루이칭은 의미심장한 행동을 한다. 비가 내리는 깊은 밤, 우비를 입은 루이칭이 비닐봉지 가득 음식을 챙긴 채 폐건물을 찾는다. 대만 총통의 이름을 가진 개(리덩훼이)를 비롯해 여러 마리의 개들이 그녀에게 모여든다. 그녀는 오랜 세월 떠돌이 개들을 가족처럼 보살펴 온 것처럼 보인다. 이때 우리는 앞서 설명한 세 명의 가족이 폐가를 떠돌며 살아왔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루이칭이 폐가에 사는 남매를 보살피는 장면과 폐건물의 개들을 돌보는 장면이 유비적으로 연상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중반 신에서 폐건물에서 둘이 놀던 남매는 양배추 인형에게 자신들과 같은 ‘리’씨 성을 붙이고 논다. 개들과 떠돌이 가족이 같은 성씨를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강생과 루이칭이 부부였고 남매와 한 가족이었을지 모른다는 추론이 성립한다. 부부는 각자의 자리에서 남매를 돌보며 함께 살던 사이였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이미 남매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추측에 신빙성을 더하는 신이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아버지는 불탄 건물 옆 거리에서 남매와 대화한다. 오빠더러 여동생을 잘 돌보라고 말한 후 떠난다. 그리고는 남매만 남겨진다. 바로 그 다음 신에서 이강생은 빗물이 새는 폐건물에서 혼자 술에 취한다. 그리고는 남매와 머물던 거처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 한다. 밖에서 빗물 소리가 흥건하게 틈입한다. 남매와 함께 쓰던 매트리스 위에는 그 언젠가 남매가 만든 사람 모양의 양배추 인형만 누워 있다. 이강생은 인형을 쓰다듬는가 싶더니 이불로 질식시키는 동작을 취하고는 다시 키스를 하려다가 뜯어먹는다. 그러다가 형체를 잃어버린 인형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오열한다. 이 신은 수박을 씹어 먹는 주인공들을 지켜보게 하던 <애정만세>, <흔들리는 구름>의 의도와 완전히 갈라선다. 이강생은 지금 자신이 보호하지 못해 죽은 남매를 합리적으로 애도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떠돌이 개>는 미술로 승부를 건 영화다. 차이밍량은 직접 미술작업까지 하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그의 미술작업이 빛나는 장면을 하나만 들면, 단연 불타버린 건물 안 모습을 보여주는 신이다. 그곳에서 이강생은 천샹치와 부부처럼 등장하고 남매도 평범한 하루를 보낸다. 그을린 흔적이 역력한 벽지 아래에서 그들은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신이 이어지던 중, 가족은 이상한 대화를 나눈다. 집이 사람과 같아 병이 들었고, 벽의 금은 주름살 같은 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다가 귀신을 언급한다. 또 다른 신에서는 천샹치가 막내딸에게 어느 비 오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가 계속 왔는데, 너무 많이 와서 집에 물이 샜다는 것이다. 집이 울기 시작했고, 그 흔적이 지금 집 천정과 벽면에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민한 관객이라면 이미 눈치 챘겠지만, 지금 그들을 둘러싼 벽면엔 화재를 진화하다가 물이 흘러내려 생긴 무늬들로 가득 차 있다.

생각이 여기가지 미쳤을 때, 우린 오프닝 신을 떠올려야 한다. 그을린 벽지 아래에서 잠든 남매가 후경에 있다. 전경엔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가 앉아 있다. 남매가 뒤척이자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녀가 얼굴을 드러내고는 잠든 아이들을 지긋이 내려 본다. 이제 조금 더 확신을 갖고 말하면, 남매는 불탄 집과 함께 숨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의 신빙성을 갖는 해석은 아니지만, 이상한 저수지 쪽으로 배를 타고 나간 것으로 그려진 이강생도 어느 시점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영화 속 여자들은 누구인가. 오프닝 신에서 남매를 내려다 본 여자는 양귀매였고, 대형마트와 폐건물을 오가며 남매와 들개를 돌본 여자는 루이칭이었다. 불타버린 집 안에서 이생강과 부부가 되어 남매를 챙기며 평온한 하루를 보낸 여자는 천샹치였다. (그녀들은 모두 차이밍량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이다.) 정교한 독해를 위한 한 방법을 제시하면, 그녀들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이다. 그녀는 이강생과 만나 아이를 낳고 살다가 ‘지금 여기’의 비극을 혼자 감당하게 된 사람이다.

요컨대 <떠돌이 개>는 이강생의 상상과 홀로 고통의 기억을 짊어지게 된 여자의 상상이 뒤섞인 영화다. 그래서 <떠돌이 개>의 엔딩은 ‘그로테스크’라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선다. 영화 초반 루이칭은 들개에게 음식을 준 후, 폐건물 안으로 들어가 벽면에 가득한 그림을 보며 소변을 봤었다. 여자의 연대기적 시간을 따졌을 때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일 수 있다.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 그 벽화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엔딩 장면에서는 천샹치가 그림 앞으로 나아간다. 뒤따라온 이강생이 그녀 뒤에 선다. 이 장면은 잔혹하다싶을 정도로 긴 14분여의 롱테이크 신이다. 아마도 이 신은 루이칭이 벽화를 보던 신보다 훨씬 이전일 가능성이 크다. 물리적 나이에 있어서 루이칭보다 천샹치가 훨씬 젊기도 하다. 그녀는 불에 타 죽은 남매를 가슴에 묻지 못해서 그 건물에 왔고, 벽화를 마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고 곧이어 마음을 추스른다. 그때 그녀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이강생이 울음을 그친 그녀를 조용히 안아준다.

이제 벽화 그림의 내용을 묘사해보고자 한다. 후경엔 평화로운 산의 능선이 있고, 전경에는 평범하게 흘러가는 시냇물이 있다. 산과 냇물 사이에 황량한 돌과 바위가 가득하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그림 속 산의 능선, 곧 침착한 후경은 여자가 꿈꿨던 미래, 혹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전경의 시냇물은 ‘지금 여기’를 흐르는 시간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꿈(후경)과 현실(전경) 사이를 채우고 있는 황량한 돌과 바위들이다. 남매를 잃은 (어쩌면 남편까지 잃은) 여자에게 작금의 사태는 돌과 바위의 시간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떠돌이 개>는 쓸쓸함의 물성에 관한 차이밍량의 처음 보는 표현 방식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여자의 내면을 더듬어 말하건대, <떠돌이 개>는 기체적 환멸도, 액체적 긴장도 아닌 ‘절망의 언캐니’로 흐르는 영화다.

 

여기서 당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떠돌이 개>를 찍은 후 차이밍량은 상업영화의 제작, 배급 메커니즘과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다. 지금은 <떠돌이 개> 직전에 찍었던 단편 영화 <행자>의 세계를 확장하는 예술 작업을 지속하는 중이다. 이른 바 ‘행자 시리즈’. 그가 ‘행자 시리즈’를 들고 우리를 만나온 방식을 떠올리면, 앞으로도 차이밍량은 행위예술, 시각예술, 설치미술의 경계를 횡단하며 침묵과 느림의 영상 미학을 실천할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살아가는 방식을 제한하지 않음으로써 영상예술의 다음 무대를 개척해갈 것이다.

우리는 서사성을 소거한 ‘행자 시리즈’의 이미지텔링만으로도 현대 도시문명이 잃어버린 인간성과 영성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시리즈의 초석이 된 <행자>엔 홍콩이라는 거대 도시의 리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승려(이강생 분)의 하루가 담겨 있다. 달팽이의 움직임처럼 느리디느린 승려의 걸음걸이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거의 전부다. 그의 비현실적인 이동 속도는 배경에 선 사람과 사물, 건물과 공간을 거대한 세트로 만들고 자기 모습을 행위예술로 승화시켜 버린다.

영화 속 승려의 하루는 ‘도시에서의 삶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해 ‘인생이란 무엇인가’로 넘어간다. 그는 단지 침묵 속에서 고개를 직각으로 숙인 채 도심을 가로질렀을 뿐인데 말이다. 그가 걸어가는 길가의 풍경은 너무 평범해 이상해보일 정도다. 빽빽한 전단지가 붙은 벽면, 익명의 사람들이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육교 다리, 상점들이 즐비한 번화가, 어스름 저녁의 푸드 트럭 옆… 결국 그는 인적이 끊겨가는 시간에 창고 입구 같은 곳에 다다라 사들고 온 하루치 양식을 조용히 깨문다. 승려는 평범한 하루를 보냈을 테지만, 그의 이미지는 적응에의 강요와 잉여의 욕망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범상치 않은 광경이 된다. 그의 시선과 속도는 ‘산다는 것’ 앞에 ‘어떻게’를 붙이는 신비가 된다.

<서유>의 무대는 이제 마르세유다. <행자>에서처럼 승려는 조용히 거리를 지난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과 익명의 사람들은 자기 안과 곁을 지나치는 그의 움직임을 놓친다. 영화 말미 그는 관광지를 지나 이주자들로 보이는 이들로 북적이는 카페 골목을 지난다. 그때 드니 라방이 나타나 승려의 걸음을 동일한 속도로 뒤따른다. 그 직후 영상의 상하가 반전된다. 광장에 북적이는 사람들이 거꾸로 비친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신자유주의’의 예외 없는 범람 속에 도시를 장악한 ‘지구적인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그 장면에 있다. 요약하자면, 차이밍량의 ‘행자 시리즈’는 ‘여기서 당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을 머금은 침묵의 외침이다. 그가 우리에게 하고팠던 메시지를 또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서유>의 엔딩에 차이밍량이 직접 새긴 금강경의 글귀로 이 글을 닫으려 한다. 우리 각자의 리듬이 된 생활의 속도가 그 글귀 앞에서 의심받을 수 있길 희망한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일체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마땅히 이와 같이 바라볼 지니라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의 인문학적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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