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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헤아릴 수 없는 세계, 이해할 수 없는 타자” ― <통행증>론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헤아릴 수 없는 세계, 이해할 수 없는 타자” ― <통행증>론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9.07.18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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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elude

구태여 상황의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령 들고나는 호흡은 피부를 저밀 듯한 한기를 동반하는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면, 좀처럼 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개별자들 사이에 개재하는 ‘차이의 감각’ 또한 매한가지라고 할 테다. 말하자면, 그건 이런 뜻이다. 낱낱의 인간들이 머금은 존재의 색감이나 온도란 게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만치 저마다의 고유함을 띠고 있다는 것. 어쩌면, 쉽게 건너갈 수 없는 골짜기가 서로 간에 매설돼 있다고 할 만큼 대단히 이질적이라 말해두는 편이 차라리 옳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횡단불가의 심연은 여간해선 겉으로 선연하게 드러나는 일이 없다. 일상 또는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촘촘한 관계지층들의 몸피와 의식적인 자기방어벽의 제약장치를 허물고 그 차이가 스스로를 밝히 현상해내는 지점은, 대개 딱히 도피처나 돌파구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만만찮은 상황적 조건에 맞닥뜨릴 때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당연하게도, 이런 차이의 양상들 곧 본연의 자기다움‘들’이 드러나게 된다면,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촉발하는 부대낌의 국면 역시 현저해질 것임은 물론이다. 그 국면들이란 타자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오는 실각, 감정의 격렬한 충돌, 반응과 태도 면에서의 엇갈림 등속의 양태들로 다양하게 변주될 수가 있다.

*

사태의 끔찍함 내지는 파행적인 현실이 인간을 어디까지 내몰 수 있느냐는 물음은 매우 중요하다. 허나 그것이 영화 <통행증>이 말하는 바의 전부라 생각해서는 좀 곤란하다. 텍스트는 ‘만일 그런 상황에 돌입하지 않았더라면’ 좀처럼 눈여겨보지 않고 스쳐지나갔을 ‘무언가’에 대해서도 조곤조곤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언가는 표면 층위 그 아래에 놓인 한 차원 더 깊은 진실을 전달한다. 아마도 그 진실을 명제로 빚어본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될 터이다. “정말 타인을 이해/사랑할 수 있는가?”

영화가 초입에 들어선지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점에, 자신을 좇는 한 무리의 경찰들로부터 가까스로 몸을 숨긴 게오르그는 부서진 잔해들이 즐비한 뒷골목 어딘가에서 진한 스킨십을 나누는 한 쌍의 젊은이들을 목도한다. 그런데 그게 조금 이상하다. 아무래도 아름다워 보이지가 않는다. 아무리 양보하더라도 이들에게 포화 속에서 피어난 애정이라는 둥의 낭만적인 수식어를 덮어씌우기란 어려워 보인다. 외려 구전된 먼 나라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그것도 묵어버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아주 박제돼버린― 한 장면을 바라보듯, 꽤나 이질적인 감각을 유발하게 되는 건 괜한 일이 아니지 싶다. 대체 카메라는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폐허와도 같은 도시에서, 폐허 속으로 숨어들다>

 

<br>
<아름답기보다는 지극히 몽상적인>

2. 망가진 세계와 불가항력적 폭력 앞에서

소속집단은 신분을 증명하는 유력한 장치다. 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 속에서 그이가 점한 위상과 존재지위를 담보해주는 생존의 무기이기도 하다. 사실이 그렇다면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인해 그것을 벗어버린 채 몸을 피한 떠돌이들은, 자기를 외부로부터 변호할 최소한의 준거수단을 망실해버린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이방인들은 대개 정상에서 벗어난 혹은 온전함이 결여된 주체형식, 환언하자면 일종의 하위주체로 취급되어 공공연히 얕잡아 보이기 마련이다. 특별히 시국의 불안정성은 그들이 직면한 실존의 불안정성을 가속화시킨다. 상황으로 말미암아 팽배해진 부정감정을 무람없이 투사해버려도 될 만한 (혐오의) 먹잇감을 찾는 이들 앞에서라면, 단지 그들은 ‘확실히’ 손쉬운 사냥감으로 전락하게 될 따름이니 말이다.

포식자와 피식 대상이란 대립구도가 확립된 공간에선 통상의 윤리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보통수준의 윤리란 곧 공동체 차원의 윤리이고, 따라서 같은 등위의 집단에 속하지 않은 자들에게까지 굳이 동일한 잣대를 들이댈 이유란 게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상화된 자들이 최선의 ‘존중과 대우’를 바란단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이처럼 정감 넘치는 단어들을 갈음하는 건 ‘경멸과 경계’ 따위의 무시무시한 표현들이다. 이들 표현들은 틈새프레이밍, 부감촬영 등속의 확장된 문법을 통해 보다 명료하게 그리고 호소력을 갖춘 영화언어로 번역된다.

 

<도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발이면 충분하다>

 

<단지 그이는 경계의 대상일 뿐이다>

마르세유의 풍경이 기묘함을 호소해오는 까닭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도처에서 시시각각 터져 나오는 호각소리와 공포탄의 총성 그리고 이에 뒤질 새라 곧이어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 따위의 소음들은, 지중해를 낀 프랑스 남부도시 특유한 따사로운 햇살과 공기 사이사이에 은근슬쩍 스며들어 그 정경을 무척이나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텍스트의 면면에 틈입하는 외화면 사운드들이 이방인들이 맞닥뜨린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실존적 위기를 적절하게 무대화(전경화)하는 장치로 복무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겠다.

떠돌이 신분의 이방인이 당면한 위기로부터 벗어나는 최선의 길이란 정식적인 방외인-되기의 절차를 밟는 것이다. 달리 번역하자면, 어엿한 국외자의 신분으로 잠시잠간 이곳에 머무는 중임을 공증 받고 더불어 체류를 승인받는 수순을 따르는 일 말이다. 차선책 이래봐야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일정 시간마다 도피처를 옮기는 것 정도에 불과하기에, 사실인즉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해본대도 크게 무린 없을 터이다.

허가된 ‘통행증’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맞이할 결과는 꽤나 다르면서도 일견 흡사한 모습을 보인다. 확실히 전자의 경우라면, 군경의 군홧발에 짓밟힐 일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다. 허나 그/그녀를 향해 번득이는 다수의 안광마저 굴절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한쪽 모퉁이에서 나타나 다른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기까지, 그러니까 마치 도수장을 향하는 짐승마냥 질질 끌려가는 자를 잠시도 놓치지 않고 붙들어낸 카메라의 끈덕진 시선만큼이나, 위조한 신분증으로 목전의 위태로운 상황을 모면한 자를 사위에서 둘러싸고 노려보는 무리의 시선 역시도 전연 잦아들 줄을 모른다. 표면적으론 동류로부터의 눈길이라 해도, 그건 사실 ―억압자들에게서 유래한― 지독한 경계심의 굴절이자 반향일 따름이다.

 

<나타났다 사라지다, 남은 건 차가운 침묵뿐>

 

<반사된 경계의 시선들>

3. 간과할 수 없는, 또 한 번의 문제설정

하지만 그보다 흥미로운 건 광기의 현상학에 가려져 ‘잊히기 쉬운’ 지점들이다. 다름이 아니라, 거대한 문제에만 매몰되다보면 자칫 놓치기 쉬운 일견 사소해 보이는 부분들 말인데, 되레 이런 것들로부터 가볍지 않은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실은 퍽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부풀려진 광기의 현전은 정말이지 부자연스러운 것이며 또 왜곡된 것이지만, 그 음영 뒤로 숨은 작고 구체적인 사실들은 거의 연출되지 않은 ―그래서 날것 그대로에 해당하는― 일상적 삶의 자세와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내어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텍스트 속에서 그건 ‘떠돌이들 사이의 관계국면’을 통해 은근하게 현출된다.

*

절망적 상황 속에선 자기를 간수하는 것조차 힘겨운 일이니, 풍전등화에 내몰린 떠돌이들이 제 스스로를 우선적으로 돌본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과 유사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 역시도 어쩌면 그에 못잖게 자연스러운 일일 수가 있다. 물론 한 꺼풀을 들추고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의외의 복잡성을 띠고 있겠지만 말이다.

여하간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 관계는 더욱 친밀해지고 돈독해질 테다. 그러나 그 관계의, 다시 말해 타자를 향한 애정의 핵심이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닮음’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애초부터 제가 기댈만한 자, 그럼으로써 공감과 위안을 얻을만한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했더라면, 그 시작부터 쉽지 않았으리란 뜻이다. 우여곡절 끝에 운을 떼는 데에 성공한 관계라고 하더라도, 타자가 자신의 필요를 더는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판단에 이르거나, 외려 스스로에게 해가 된다고 간주할 경우, 이내 그이를 멀리하게 될 테고 말이다.

 

<녹은 아이스크림, 무너져 내린 심경>

 

<루주를 칠한 채 사그라진 담배, 꺼진 건 그뿐일까>

   헝겊으로 된 넝마공이 어엿한 축구공으로 바뀌고 다시금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 조각으로 주저앉는 여정을 통하여 형상화된 게오르그와 드리스 가족과의 관계가 이 점을 여실하게 현상해낸다. 그가 자기를 떠날 것을 직감하는 순간, 드리스는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다. 정확히 바로 그 시각, 드리스의 얼굴과 나란히 놓인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한낮의 태양과 뜨거운 바닷바람을 머금은 대기로 인해 무너지고 뭉그러져버린 모습으로 제시된다. 솟구치는 분노와 치미는 서글픔에 일그러져버린 아이의 심정처럼 말이다. 허나 애당초 문제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애석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드리스가 제 필요에 따라 ―추측하기론 부재하는 아비의 빈 자리를 메워주길 바라며― 게오르그를 욕망했듯, 그 역시 자신의 일신을 위해 외국행을 택했을 따름이다. 멜리사의 가족에게서 느끼는 위안보다 ‘한층’ 만족감을 안겨다 줄 선택지를 말이다. 구태여 따져 묻는다면 드리스와는 달리 그에겐 비교우위를 따져 고를 선택지가 있었다. 그 밖에 다른 점이 또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움직인다. 허니,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구태여 강조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이를테면 게오르그에게 ‘식사를 대접했던’ 여인의 저의는 그를 향한 호의나 호감에 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저 곁에 함께 있어줄 누군가를 바랐을 따름이었노라고 말해두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방금까지 제 곁에 있던 여인의 자리에 루주(rouge)를 묻힌 채 싸늘하게 식은 담배조각만이 남아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게오르그의 잔뜩 상처 입은 마음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던 셈이랄까.

노력으로 간단히 해소할 수 있을 만한 문제는 아니다. 존재자들 간의 근본적 차이에서부터 빚어지는 문제라고 정리해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 점은 마리와의 관계 속에서 한결 더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제 고집으로 드리스의 가족을 잃어버린 게오르그는, 마리를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편을 택하기로 맘을 먹는다. 죽어버린 문호 바이델(그녀의 남편)을 사칭해 삶을 구걸해온 데에 따른 부채의식이 작용했을 테고, 여전히 남편의 생존을 믿으며 그이의 행방을 수소문해온 그녀를 속인 일을 속죄하기 위함이기도 할 터이다. 나아가선 자신보단 의사 리처드와 함께 멕시코로 향하는 편이 그녀의 행복을 기하는 일이라 믿은 결과이기도 할 테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단지 그의 ‘기만적인 믿음’일 뿐이다.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스스로의 부담과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선택, 그러니까 그녀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도료로 잘 포장된 자기안위의 몸부림에 불과할 뿐이란 뜻이다. 그녀에게 정녕 리처드가 필요한지 혹 자신이 필요한지 게오르그는 알지 못한다. 통행증을 리처드에게 건네준 건 ‘그러함직’ 하리라는 자의적 판단을 따른 독단적 행위일 따름이다. 즈음해서, 논의의 결을 선명히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생명책과도 같은 통행증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었다는 건 분명 숙연함을 자아내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감상주의적 시선에서 빠져나와 한 가지 확실히 해야만 할 것은, 그 숙연함이 진정으로 마리를 위한 것이라고/그녀가 바랄만한 일이라곤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리처드에게 ‘강권하듯’ 표를 건네다>

 

<떠난 배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무슨 감정을 느낄까>

   결과적으로 그녀가 탑승한/승선하기로 했던 배는 기뢰의 포화 속에 대양 아래로 가라앉는다. 혹 그녀가 죽음을 맞이했다 하더라도 게오르그의 ‘위함’은 좌절로 돌아간 셈이라고 할 것이며, 설령 영화의 말미에서 화면 너머로 또렷이 들려오는 구둣발소리의 주인이 정말로 그녀가 맞다 한들, 그이의 ‘위함’은 역시나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지고야 말 터이다. 어쩌면 단지 의미가 없다는 말로써 간추리고 지나가서는 안 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곧장 군경에 의한 강제적인 (인간) 청소가 시작될 것임이 예견된 가운데, 두 사람의 명운은, 지독할 정도의 불투명함 속으로 내던져지게 된 형국이니 말이다. 

 

<그녀가 살아 있건 죽었건 간에1>

 

<그녀가 살아 있건 죽었건 간에2>

4. 두 가지 음색의 목소리

물론 두 사람이 나란히 배에 올라탔다 하더라도 크게 바뀔 건 없다. 적어도 이들의 말로가 비참할 것이란 사실만은 동일할 터이니 말이다. 외려 주목해야할 점은 따로 있다. 그들의 목을 죄어오는 혐오와 폭력의 광기는 압도적이지만, 비단 그것이 아니더라도 저들 존재자들을 불행으로 내몰기에 충분한 힘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윗점은 바로 여기에 찍힌다. 이 힘 곧 파괴의 동력은 좀처럼 이해 불가능한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정확하게는 그이를 자신과 섣부르게 동일시해버린다거나 제 나름의 방식을 동원해 타자에게 존재하는 차이들을 간단히 소화해버리려는 움직임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문제는 ‘그리되기’가 너무나도 쉽다는 것이다. 애당초 기계장치를 동원하여 다른 이의 속아지를 들여다볼 수 없는 마당에야 말이다. 부지는 불감을 낳고, 이 불감은 자기중심적인 동일시 작업을 개별의식이 가진 자동적 성격의 발현으로 체화해버린다. 영화의 면면에서 불필요한 내레이션을 끈덕지게 동원하는 건 바로 이 점을 겨냥한 경고의 메시지일는지도 모른다. 짧게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을 삽입하는 것만으로 전후 개연성을 확보하는 데 충분하고, 더 나아가 프레임의 분할이나 미장센의 연출만으로도 주어진 상황의 대략적인 분위기나 인물관계를 부족함 없이 적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변곡점들에서 내레이션은 여지없이 제 얼굴을 배꼼이 드러낸다. 과잉친절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더러는 번거롭다고 말할 정도로까지 자세한 내레이션의 개입은, 관람객의 주체적인 상상력과 사고 작용을 중단시킨다. 좀 더 자세히 풀어 쓰자면 스스로가 능동적인 해석의 주체가 되어 텍스트의 전개방향을 그리고 그 속에서 운신하는 작중인물들의 관계모형을 결정(판단)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할 테다. 모든 것을 제 주관적 손아귀에 일목요연하게 움킬 수 없도록 장해(障害)를 매설해두는 것이다.

비단 내레이션만은 아니다. 그 정체가 너무나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인물(마리)의 이름을 밝히기까지 최대한 상황을 지연시키고 또 ―신비로운 요소를 동원하면서까지― 지연시키려는 모습 또한 근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게다. 관객의 자동적 의식에 준거한 손쉬운 판단을 차단하려는 수고로움, 요컨대 윤리적 거리감을 확보하란 곡진한 요청의 메시지인 셈이다.

*

즈음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영화 텍스트의 음성을 섬세히 갈무리하고, 그 주파수들을 예민히 벼려진 감식안을 동원하여 정돈해보고자 한다. 아무렴 두어 갈래로 분변해봄이 적절할 성싶다. 먼저는 눈앞을 가린 무대상황에 떠밀려 저도 모르는 채 가담하고 있을는지 모를 폭력의 현상학을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경계해야 한다는 점일 테다. 폭력이라 해서 무슨 거창한 걸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작금의 우리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가령 젠더 특정적인 것 그리고 또 국내거주 외국인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부정감정 따윌 위시하여― 혐오정서 역시도 동일하게 문제적이라는 점을 인지할 수 있어야만 할 터이다.

정녕 자신을 추동하고 있는 근원이 무엇인지, 그 행위의 근거가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 스스로 돌이켜 헤아리지 못한다면, 명석판명의 안목 대신 풍선마냥 잔뜩 부푼 시류와 풍조에 이끌려 타인에게 지우기 어려운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실체를 머금지 않은 풍선은 일정한 고도에 다다르면 찢겨져 사라질 따름이다. 별다른 의미를 남기지도 못한 채 말이다. 덩그러니 남은 건 오직 타인을 향한 지독한 타매가 남긴 그슬린 흔적뿐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달된 자국의 인터넷 인프라가 매개하는 무선의 공론장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라면, 구태여 지루한 설명을 부기할 이유조차 없을 것이다. 풍선공장이라는 술어를 덧대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터이니 말이다.

아울러 개별자들의 차이를 고스란히 끌어안으려는 자세가 요청된다는 텍스트의 발화에도 성실히 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한 근대사를 거치며 우리의 문화적 DNA에 새겨진 집단주의적 ‘미의식’이 종용하는 ―나아가 정치/반성적 의식마저 사실상 갈음해버리기에 이르는― 바와는 달리, 윤리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건 결코 선험적인 것이 아니며, 외려 지극히 경험적인 것이다. 달리 번역해볼진대, 아와 비아의 간격을 명확히 헤아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태어나는 윤리는 점진적으로 ‘구축되어가는’ 역동적인 성격을 취한다. 그렇다면 주체와 타자의 차이를 감지하고자 부단히 애쓰는 수고로움의 자리야말로 윤리의 씨앗을 잉태하는 자리가 된다 하겠다. 다름과 다름이 부딪는 가운데 드러난 일종의 사이-공간이야말로 수준 높은 타협점을 모색하고 장차 완성될 새로운 가능성의 집을 함께 세워갈 잠정의 지대가 된단 뜻이다.

*

도대체 이 땅 어디에서 명료한 윤리의 현장을 찾아볼 수 있을까? 글쎄다. 옳고/그름 내지는 수월함/열등함을 분간하는 데 혈안이 된 만연한 공격성, 이 이원론적 ―그 기원을 따라 소급해 오르면 실은 일원론적이라고까지 말해봄직한― 가치 규준에 안온히 정박하며 그 밖의 다름이란 선택지 따윈 찾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태만함, 그리고 문제적 소인을 다음 세대에게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고스란히 전가하고 전이하는 데 전력투구하는 맹목성. 요컨대 일그러진 우리사회의 자화상. ―깊게 뿌리내려 그 본질이 어떻게든 변하리라 상상해보는 것조차 힘겨운 입시제도와 학벌문화, 단지 이 한 가지만 따져본대도 더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을 터이다― 아무렴, 이 기괴한 사회에서라면 영화 텍스트의 말 걸기 작업이 선사하는 울림이 모쪼록 유효한/뼈아픈 울림을 안겨다주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목소리를 능히 감지할만한 예민한 청각이 사전에 ‘준비돼’ 있다는 사실이 먼저 전제돼야만 할 테지만 말이다-.

 

 

 

글·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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