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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기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간이 베푼 공간의 미학, 다큐멘터리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
[조한기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간이 베푼 공간의 미학, 다큐멘터리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
  • 조한기(영화평론가)
  • 승인 2019.08.2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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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영화의 묘미 중 하나는 무감했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여는 데 있을 것이다.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는 재일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의 작품을 통해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건축 공간을 매개로 관객에게 정서적인 참여를 요청한다. 이를 이끄는 스타일에서는 사건 중심의 문법을 넘어서는 영상 미학적 실천이 돋보인다. 영상에 포착된 공간과 그곳에 기입되는 시간에 대한 사유는 관객의 감정을 매만진다. 그렇게 영화의 결을 따르다 보면 이타미준의 건축은 그의 철학과 디아스포라의 경험이 녹아든 ‘장소’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영화는 첫 시퀀스에서 제주의 풍광을 보여주고 곧이어 수풍석 미술관을 차례로 비춘다. 여기서 카메라는 단순히 수풍석 미술관의 외관만을 포착하지 않는다. 수풍석 미술관과 그곳을 둘러싼 자연환경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담아낸다. 이 작업을 통해 건축물과 자연은 서로 배타적인 방해물이 아닌 유기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음이 드러난다. 지역의 토속성과 건축물의 조화를 중요시했던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을 영상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이러한 전언은 수풍석 미술관의 내부 공간을 담아낼 때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수풍석 미술관은 공간의 여백을 통해 제주의 풍광을 오롯이 담아낸다. 이 과정에서 건축 공간에 고이는 시간의 흐름은 각별한 이미지를 만든다. 수 미술관에 떨어지는 빗방울, 풍 미술관 틈으로 엿보이는 갈대의 휘날림, 석 미술관을 관통하는 빛의 움직임. 정적인 공간에 담긴 자연의 생동감은 일상적인 체험을 특별하게 포착한다. 자연과 인간의 생활을 온전히 담는 공간에 대한 사유는 이타미 준이 평생 고민한 건축의 정수이기도 하다.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은 그렇게 영상 미학을 경유해 관객에게 도착한다.

 

 영화의 시간성은 카메라에 담긴 물리적인 순간뿐만 아니라, 이타미 준의 삶을 통해서도 의미를 축적한다. 영화는 이타미 준의 마스터피스에서부터 시작해 그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을 톺아본다. 여기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바다’의 이미지는 평생을 ‘경계인’으로 산 이타미 준의 삶을 상징하는 표지가 된다. 영화는 한국과 일본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는 바다를 담으며 이타미 준의 생전 인터뷰를 들려준다. 유년시절 몸이 약했던 그에게 시미즈의 바다는 위로의 장소로 기억된다. 이어지는 주변인들의 인터뷰는 그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수했기에 불합리한 처사를 당했다고 말한다. 이타미 준은 그처럼 디아스포라를 겪는 ‘경계인’이었기에 오히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했다. 실제로 이타미 준의 초기 건축 세계에서 화두는 한국성에 대한 탐구였다. 한국 문화유산과 전통 문화예술에 대한 탐색은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그는 서양 중심이었던 당대 건축사조의 흐름을 벗어나 건축물이 서는 지역의 맥락에 무게를 둔다. 이타미 준의 그러한 깨달음은 안동의 병산서원을 배경으로 내레이션 된다. 주지하디시피 병산서원은 형태의 미로 대표되는 서양의 건축과 다르게 공간의 미를 중시한 한국 건축의 맥이 집대성된 장소이다. 즉 건축 공간과 건축물 간의 틈새, 무엇보다 건축과 주변 환경의 어우러짐이 백미이다. 이타미 준의 깨달음은 그가 스케치한 병산서원의 그림에서도 잘 나타난다. 병산서원은 홀로 우뚝 선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과 건축이 서로 기댄 조화로운 장소로서 그려진다.

한편으로 그가 설계한 온양미술관은 한국에서 일색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거북선의 형태를 본떠 만든 외양이 일본군의 모자와 닮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당시 논란의 핵심적인 근거는 이타미 준이 일본에서 성장한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러한 논란은 이타미 준에게 깊은 좌절감을 줬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그는 건축의 공간감과 질료의 물성을 탐구하며 건축의 본원으로 관심사를 확장한다. 이와 관련해 현대 건축의 거장 쿠마 켄고는 이타미 준의 건축 공간에 드리운 깊은 비애감에 대해 말한다. 쿠마 겐고가 느낀 비애감은 이타미 준이 마주했던 고뇌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의 질곡이 작품으로 승화되었을 때, 영화는 국경을 잇는 바다의 이미지를 환기하며 이타미 준의 건축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넌지시 묻는다. 그의 후기 건축 세계에는 디아스포라의 트라우마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지 않느냐고.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Tuan)은 장소와 공간의 의미를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분변한다. 그에 따르면 무의미한 ‘공간’은 인간의 체현 과정을 통과하며 ‘장소’로서 의미를 얻는다.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는 그의 일생을 추적하며 건축 밖에 있는 소실점들, 그러니까 이타미 준의 삶과 철학을 건축으로 끌어온다. 여기서 영화의 영상 미학과 스토리텔링 방식은 이타미 준의 건축에 시간성을 기입하며 그의 세계를 심도 있게 드러낸다. <이타미 준의 바다>는 그러한 과정을 추수하며 이타미 준의 건축을 의미가 깃든 ‘장소’로 구현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난 후 건축물이 새삼스레 느껴졌다면, 그것은 영화가 건넨 건축의 깊이를 엿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조한기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수료. 2018 영평상 신인평론상과 한국콘텐츠진흥원 주관 2018 만화비평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문화와 스토리텔링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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