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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토리의 스타일, 스타일의 스토리- <세븐>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토리의 스타일, 스타일의 스토리- <세븐>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08.26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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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핀처(David Fincher)가 만든 <에이리언 3(Alien 3)>는 의미심장한 데뷔작이었다. 그는 앞서 시리즈를 이끌어온 리들리 스콧(Ridley Scott)과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이 해낸 것들을 면밀히 파악했고,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만든 <에이리언 3>는 ‘사유하(게 하)는’ SF 호러의 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스타일로 발화되는 성찰적 장면들이 낯선 긴장을 뿜어내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핀처는 무대 제작 및 특수효과 전문가 출신이다. 조지 루카스(George Lucas)가 세운 루카스 필름 산하 특수효과 업체에서 일하면서 그의 화려한 이력은 시작된다. 이후 약관의 나이에 CF 감독,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약하며 화려한 명성을 누린다. 나이키, 코카콜라, 버드와이저 등이 앞 다퉈 CF 연출을 의뢰했고,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와 마돈나(Madonna),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등이 핀처의 손으로 자기 뮤직비디오를 만들길 원했다. 그의 결과물에는 ‘완벽주의 스타일리스트’의 집요함이 빛났다.

그러나 그가 만든 영화들은 ‘완벽주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수식어를 초과하는 어떤 충동이 넘실거린다. 핀처가 만든 나이키 CF를 떠올려보면, 이미 그 ‘충동’의 맥박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언제든 스타일을 가진 스토리를 구상했고, 영상 작업에 있어서 원하는 메시지에 다가가는 유일한 길을 고민했다. 그의 영상에는 중추신경을 거쳐 주고받는 일상적인 감정보다도 본능적인 욕동과 그것의 방출 과정이 극적으로 스며있었다.

<세븐(Se7en)>을 예로 들면, 그가 스릴러 장르 관습에 속하는 서사 문법과 도상 이미지의 활용을 확실히 섭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텍스트 밖에 위치한 우리의 ‘추리’ 본능과 세심히 대화하기 위해 스타일과 스토리가 서로를 이상적으로 부축하도록 의도한다. 파편적 정보들이 인과적·귀납적으로 엮여가는 과정을 통제하면서 서스펜스의 점증을 꾀하는 타이밍도 전략적이다. 그래서 그를 ‘완벽주의 스타일리스트’라는 틀에 가두는 관점은 사실상 제한된 시각이거나 궁색한 편견일지도 모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 영화감독으로서 핀처는 치밀한 서사 전략을 가진 스토리텔러로서 일가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세븐>엔 부도덕과 비윤리가 일상화 된 세계를 폭력으로 일깨우는 인물이 있다. 핀처의 스타일리쉬한 전복적 상상력은 그의 잔혹한 실천을 경유해 예리한 메시지가 된다. <세븐>은 혁명의 장르화로 나아간 <파이트클럽>에서 한 정점을 이룬 서스펜스 묵시록의 출발이다. 이 글은 자기 형식을 가진 스토리텔러로서 핀처의 서사 전략에 국한해 그 의미를 추수하고자 한다. <세븐>과 같은 영화가 늙지 않는 이유를, 일각이나마 밝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충실하게 참신한

<세븐>은 7일의 동안 7번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을 다루는 영화다. 이 계측 가능한 시간과 사건은 두 주인공의 개인사 안에서 전혀 다른 의미화 가능성을 가진다. 먼저 데이빗 밀스(브래드 피트 분)는 솔직한 대신 충동적이고, 외부의 자극에 즉각적인 성향을 띤 열혈 형사다. 강력범죄 현장에서 제대로 일하기 위해 이 도시를 지원해서 온 인물이기도 하다. 자진 전출 과정은 밀스의 독단적인 결정에 따른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아내의 우울감, 두려움, 외로움 등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그는 지금 직업적 자기 비전에 매몰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그는 새로 부임한 도시에서 형사로 첫 7일을 맞이하게 된다.

그 도시에서 평생을 형사로 살아온 서머셋(모건 프리먼 분)은 은퇴하기까지 마지막 7일을 보내는 중이다. 수많은 강력범죄를 다뤄 온 인물답게 잔혹한 폭력의 흔적 앞에서도 냉정하고,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앞과 뒤를 내다볼 줄 안다. 범죄와 더불어 살아온 세월은 그에게 깊은 생채기를 안긴 것처럼 보인다. 환청으로 그를 따라다니는 ‘범죄-수사 상황’ 현장음은 직업병을 넘어 평생의 트라우마를 짐작케 한다. 그는 끔찍한 범죄의 세계에서 최대한 멀리 떠나는 걸 여생의 마지막 소원으로 여기고 있다.

지금까지의 정보는 <세븐>의 서사무대가 닫힌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화 초반에 밝혀지는 것은, 연쇄살인범이 성경에 기반한 7대 죄악에 근거해 이 문제적 도시를 단죄하려는, 일종의 종교적 열정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내면에 질서화 된 아포칼립스의 풍경에 정교하게 말려드는 체험. 이 체험이야말로 <세븐>이 베푸는 장르적 쾌감의 본질이다. 우린 살인범이 뿌려놓은 단서들을 뒤적이며, 그로부터 유추되는 기괴한 세계관을 형사들과 함께 재구하게 된다. 이는 범죄 스릴러의 익숙한 장르 관습을 의식하며 인과적 플롯을 헤쳐나가는 과정으로 통한다.

그런데 장르에 ‘충실하다’는 영화가 ‘참신하다’는 말과 양립할 수 있는가. 규준화된 서사적 문법과 약호화된 도상 이미지를 치밀하게 전유하는 것으로, 새로운 충격에 도달할 수 있는가. <세븐> 이전엔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다’다. 그 내막을 해명하자면, 스릴러 장르의 습속에 <세븐>이 어떻게 접속하는가를 논변해야 할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세븐>은 신참 밀스와 백전노장 서머셋, 곧 의욕에 찬 ‘처음’과 회한에 찬 ‘마지막’이 극단적인 폭력의 현장 안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과정에 대한 실험극이다. 일종의 ‘해결사’인 그들은 극악한 폭력이 반복되는 위기 국면에 무방비로 내던져진다. 이는 스릴러 서사의 보편적 기초다. 여기서의 ‘위기 국면’은 폭력의 결과이면서 다시 폭력의 동인이 되며, 대게 사회 질서에 잠재되어 있는 근원적 부조리로부터 촉발된 것이다. 토마스 샤츠(Thomas Schatz)는 이러한 서사 전략을 쓰는 장르로 웨스턴, 갱스터, 탐정물 등을 언급하며 ‘질서의 의식(rites of order)’1)을 다루는 유형으로 묶는다. 범죄 스릴러를 양식이나 스타일을 넘어 하나의 장르로 규정한다면, 그 역시 앞의 세 장르가 품은 규약을 부분적으로 공유한다고 할 것이다. <세븐>은 매우 적확하게 ‘질서의 의식’을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범죄 스릴러 장르의 선험적 요소에 기대어 ‘대차대조’로서 영화감상을 해나가게 된다. 특히 핀처는 잘 알려진 서구의 고전과 기독교 문화권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지식을 일종의 ‘준거 영역(field of reference)’으로 활용한다.2)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벼리는 맥락적 서사체험을 제공하기 위한 포석이다. 실제로 <세븐>은 ‘준거 영역’을 이루는 종교적 논리를 비의적인 수수께끼로 활용한다. 세 주인공의 다른 심리 궤적은 그 수수께끼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 우리는 그들 각자가 봉착한 정신적 한계상황을 함께 체험하면서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과정에 보조를 맞추게 된다. 이 대목에서 히치콕(Alfred Hitchcock)이 범죄스릴러의 요소를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풀어가는 기법, 정신적 깊이, 한계 상황 묘사로 설명했다는 점을 떠올려도 좋겠다.

 

1) 토마스 샤츠, 한창호·허문영 역,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한나래, 1996, 65쪽.

2) 토마스 샤츠, 한창호·허문영 역,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 한나래, 1996, 48쪽. 

 

<세븐>을 보는 우리는 피해자(희생자)와 해결사(형사)와 도망자(범인) 사이에서 피해와 죽음의 스펙터클을 먼저 경험한다. 하지만 긴장과 격정을 냉정하게 가라앉히며 해결사(형사)와 함께 추리와 추적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 예기치 않게 틈입하는 유무형의 장애를 극복하면서 폭력의 계기를 밝혀내 제거하는 일은 범죄 스릴러가 부여하는 임무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습은 반복, 모사, 복제를 통해 ‘스릴러’의 세부 규준을 만들어 왔다. 이를 이해‧숙지하고 있는 정도에 따라 우리의 영화 관람은 예측과 서사적 실현 사이의 긴장 체험이 된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핀처는 범죄 스릴러의 습속과 그 효과를 계산한 뒤, 긴장의 물꼬를 지속적으로 바꿔가는 데 능하다고 할 수 있다.

플롯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세븐>은 범죄 스릴러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가지 플롯이 적확하게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다. 대다수의 범죄 스릴러 영화는 ‘누가 범인인가(범인 밝히기)’와 ‘어떻게 잡을 것인가(범인 잡기)’의 문제 중 하나에 치중하거나 그 둘을 동시에 풀어간다. <세븐>은 인과적으로 두 플롯을 연결시킨 후, 예측과 서사적 실현 사이의 ‘차이’를 서스펜스 요소로 반복 활용한다. 유념할 것은, 서사무대의 안정을 깨뜨리며 불거진 폭력적 사태의 원인이 전적으로 범인의 몫이 아니란 점이다. 그 때문에 폭력적 사태의 원인을 축출해서 이상적인 평형상태(balanced conditions)로 되돌아가는 싸움은 범인의 배후에 놓인 어둠을 헤쳐 가는 과정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세븐>은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완벽한 안정 상태는 없었다. 범인이 이끌고 다니는 어둠은 음험한 도시의 생리, 곧 해결불가의 사회적 공기에 가깝다. 핀처는 범죄가 창궐할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도시민을 포박한 무관심과 익명성의 덫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기획 역시 범죄 스릴러의 내용적 습성에 해당하는 바, 핀처는 강한 콘트라스트, 어두운 조명, 축축한 뒷골목, 미심쩍고 수상한 주변 인물들, 치열한 추격전 등으로 스타일의 스토리를 전형적으로 완성한다. 폭력에 대한 과잉의 묘사와 재현, 파편화 된 신체 등에서 묻어나는 페티시즘적 피학성, 고통과 혐오를 수반하는 상황논리를 추리·추적의 근거로 제공하는 과정도 도상적‧서사적 공식의 치밀한 변용에 가깝다. 그 와중에 핀처는 우리가 결정적 정보를 쥐지 못하도록 정보량을 통제해간다.

이처럼 핀처는 음모와 살기가 떠다니는 밤, 한 개인이 상대하기엔 너무 벅찬 범인, 그리고 범인을 잡고서도 해결할 수 없는 불온한 세계의 질서 등을 장르 관습에 기대어 전한다. 극악한 사건들이 발생한 그 시점의 상황적 긴장보다도 그 이후 파생되는 심리적 긴장의 지연‧유지·확대에 공을 들이면서 특기할 만한 몰입감을 견인한다. 이러한 논평은 후속작인 <파이트클럽>, <조디악> <나를 찾아줘> 등에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는 범죄 스릴러로서 ‘파격’의 길을 택하기보다는 ‘적격’의 길을 밟으면서 개성적 성취를 이룬 것이다.

 

복선, 맥거핀

영화를 본다는 건, 스크린 속 인물들의 서사화 된 사연을 우리 각자의 삶인 양 즉각적으로 시뮬레이션해보는 경험이다. 주인공과 자신을 끊임없이 동일시하면서 그의 현실적 조건에 들어가 복잡다단한 심리를 대리체험하는 일이다. 범죄 스릴러를 즐기는 과정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피해자(희생자)와 해결사(형사)와 도망자(범인)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해결사의 관점에서 판독해가며 그의 여정에 지적·정서적으로 조응한다. 위협이 제거된 서사적 평형상태를 모색하며 예측, 기대, 바람을 투영해가는 긴장을 유지해가는 것이다.

열린 결말의 영화라도, 작가가 의도한 스토리 라인의 끝은 명시적‧묵시적으로 주어지기 마련이다. 제랄드 프랭스(Gerald Prince)에 따르면 그 ‘끝’에 대한 기다림의 질이 곧 서사물의 질이다. 작가가 영화를 기획할 때뿐만 아니라, 관객이 영화를 향유할 때에도 서로의 의중과 심리를 살피는 상상적 대화를 하게 된다. 이 대화는 ‘끝’에 다다르는 과정과 ‘끝’의 형태에 대한 모색일 수 있다.

범죄 스릴러에서 작가가 관객과의 상상적 대화를 주도하기 위해 내놓는 익숙한 패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복선 제시’다. 이는 관객의 지적 추리 과정에 미리 개입하면서 ‘끝’에 대한 힌트, ‘끝’으로 가는 힌트를 남기는 방식이다. 주지하듯, 핀처는 긴장의 밀도를 높이는 급전이나 반전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감독이다. 그런데 해당 장면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곧 초월적‧인위적 봉합으로 틈입하지 않는다. 이미 제시되었던 파편화 된 정보들의 유기적 맥락 안에서 도래한다. 단지 우리가 유념해야 했던 장면(복선)들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축소했을 뿐이다.

<세븐>의 복선은 여러 유형으로 등장한다. 언어적 복선의 경우 추리에서 추적의 플롯으로 넘어간 이후의 한 장면을 떠올려도 좋겠다. 밀스와 서머셋은 범인을 특정한 이후에도 그의 살인을 막지 못한다. 밀스는 비정상적인 악마가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서머셋은 무관심이 미덕으로 내려앉은 사회 자체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일찍이 서머셋은 은퇴 이후 속세를 떠나 무관심 속에 묻혀 살겠노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말은 혼자 힘으론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공기에 대한 무력감의 발로였을 뿐이다.

 

3) 제랄드 프랭스, 최상규 역, 『서사학이란 무엇인가』, 예림기획, 1999, 242쪽.

 

서머셋이 쏟아낸 ‘무관심한 개인들’에 대한 대사는 충격적인 결말에 대한 복선이었다. 밀스의 아내 트레이시(기네스 팰트로 분)를 죽인 건 명백하게 연쇄살인범 존 도우(케빈 스페이시 분)다. 그러나 존 도우의 지근거리에 아내를 방치한 건, 밀스의 무관심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직업적 영웅심에 취한 그는 이곳으로의 이주를 원치 않았던 아내를 낯선 집에 방치했다. 아내가 우울감에 시달리는 것도, 심지어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단 것도 알지 못했다.

두 번째 복선은 밀스 내외가 이사한 집이 흔들리는 장면이다. 낯선 환경에서 두려움을 앓던 트레이시는 새로 장만한 집에 서머셋을 초대한다. 그 날 밀스와 트레이시, 서머셋은 저녁식사를 함께 한다. 그때 집 옆으로 기차가 지나자 지진이 난 것처럼 집이 흔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그들은 이 상황을 농담처럼 넘기고 하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집은 폭력적 상황이 반복되는 그 도시에 대한 비유일 수 있다.

다시 상기하면, <세븐>은 극악한 게임을 설계한 연쇄 살인범이 자기가 만든 게임 안으로 시민들과 형사들을 초청하면서 시작된다. 그 때문에 그는 여러 수를 앞서 내다보면서 게임의 판도를 주도한다. 그의 계속되는 승리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다만 도시의 익명성 아래에 숨은 시민들이 서로를 향해 침묵함으로써 그의 승률은 훨씬 더 높아진다. 잔혹한 범죄가 뉴스나 신문지상을 달구기도 하지만, 이 도시의 시민들은 이내 냉정을 되찾는다. 이때의 ‘냉정’은 개별화 된 익명성의 덫이 편한 현대인들의 평범한 생활 태도다. 타인의 고통에 영향 받지 않는 거리에서 자기 안녕을 추구하려는 습관이다. 그러니까 이 도시의 사람들은 끔찍한 범죄가 기차처럼 접근해올 때만 잠시 흔들릴 뿐이다.

세 번째 복선은 외화면에서 틈입한 소리에 트레이시가 반응하는 찰나의 장면에서 주어진다. 그날도 트레이시는 집에 혼자 남겨져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집 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본다. 이때 카메라는 능동적으로 상황을 주도하는 주체가 되어 우리와 트레이시를 집 안 어딘가로 이끌고 간다. 그때 마룻바닥이 삐걱대는 듯한 소리가 나고 트레이시는 그 소리의 출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신은 존 도우의 비밀스러운 틈입을 환기시키는 장치다. 결말의 비극적인 사태를 어렴풋이 공지하는 신인 것이다. 그러나 짤막한 길이로 편집된 것은 물론, 앞뒤로 배치된 신들의 비중 탓에 정확한 내막을 그 순간 간파하긴 쉽지 않다.

요컨대 ‘복선 제시’는 다음 장면에 대한 우리의 예측과 기대에 부응하는 한 방식이 된다. 향후 전개될 스토리를 넌지시 암시하면서 ‘추리’와 ‘추적’의 방향을 제안하는 기술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핀처는 우리의 해석에의 의지를 활용하면서 긴장의 밀도를 높여야 하는 순간에 복선을 삽입한다. 그럼에도 적절한 수준에서 완전히 의미화되지 않는 정보들을 남겨둠으로써 문제해결에 대한 최종적인 확신을 지연시킨다. 이처럼 <세븐>은 영화 말미 극적 쾌감이 폭발하는 한 점을 향해 서스펜스를 점증시키는 인과적 매듭을 효과적으로 배치한 역작이다.

맥거핀(macguffin)의 활용은 복선 제시의 방식과 정반대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범죄 스릴러에서는 추리, 혹은 추적의 방향을 급격히 전환하는 장치로, 가능성을 높여 온 해석의 경로를 단박에 차단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세븐>에서는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더 큰 미궁으로 몰고 가기 위한 타이밍에 맥거핀이 삽입된다. 그 순간 형사들은 더욱 왜소해지고, 유력했던 스토리의 인과적 맥락에 흠집이 생긴다.

영화 초중반, 우리에게 던져진 결정적 맥거핀은 ‘빅터(마이클 레이드 맥케이 분)’라는 인물이다. 그때 우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범죄가 성경에 모티브를 둔 7가지 죄악과 연관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범인이 비정상적인 자기 확신 속에서 끔찍한 폭력을 즐기는 냉혈한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그 즈음 의심하기 힘든 미끼가 던져진다. 도시의 치안을 총괄하는 경감에 의해 빅터라는 인물이 범인으로 특정된 것이다. 경감의 설명에 따르면, 빅터는 남부지역에서 침례교 신자로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그러다가 삐뚤어지기 시작한 그는 마약, 강도, 폭력, 미성년자 강간 미수 전력까지 쌓아가게 된다. 경감의 판단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 심증이 제시되는 셈이다. 심지어 빅터는 가장 최근에 희생된 변호사와 모종의 연관관계를 이어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카메라가 기동대를 이끌고 빅터의 집으로 침투할 때, 우리는 ‘추리’에서 ‘추적’으로 미리 넘어간다.

그러나 빅터는 또 한 명의 피해자였을 뿐 범인이 아니었다. 지적‧정서적 충격을 동반하는 이 혼란한 공백상태는 잠재되어 온 서스펜스를 단박에 비약시킨다. 역설적이지만, 이 순간 스토리는 다시 역동적으로 중층화된다. 핀처는 우리의 평범했던 추리 과정을 날카롭게 벼리며 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 재설정의 기회를 부여한다. 고전 스릴러물에서 맥거핀은 리비도의 전환을 강제하는 서사의 권능이었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에서 히치콕이 던져놓은 ‘조지 캐플란’은 이 진술에 적확하게 부합한다. 그런데 일부 영화에서 맥거핀은 의심과 혼돈의 서사 미학을 완성하는 포석으로 더욱 비중있게 활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데이빗 린치(David Lynch)의 역작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의 경우 맥거핀에서 맥거핀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현기증만으로도 신비한 영화체험을 선사한다.

사후적으로 보면, 복선과 맥거핀의 효과로 ‘존 도우/밀스, 서머셋’ 사이의 대결 구도는 더 비의적인 긴장 속에 연장된다. 텍스트 바깥의 핀처와 관객으로서 우리의 해석 게임 역시 더욱 복잡해진다. 계산된 타이밍에 정교한 논리를 밟아 도착하는 복선과 맥거핀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확인시킨다. 핀처가 이미 <세븐>을 만들 때, 범죄 스릴러의 서사 문법과 활용 가능한 장치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그는 자신이 베푼 그간의 서사 정보 앞에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무지, 간과, 오해, 오판의 내용을 정확히 진단할 줄 알았다.

 

핵심 결절점

흥미로운 서사물에는 로버트 맥키(Robert McKee)가 ‘이야기적 사건’이라고 명명한 결정적인 국면들이 존재한다. 가치의 변화를 수반하고 인물의 상황에 의미있는 전환을 만들어 내는 계기가 효과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도 제기된 의문이나 선명하게 해석되지 않고 남겨진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여 서사적 일단락을 끝내는 매듭이 존재한다. 이후 스토리텔링 과정에 일정한 기대와 바람, 예측을 가능케 하면서 결정적인 방향성을 부여하는 매듭도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매듭을 ‘결절점(node)’이라고 칭해 왔다. 덧붙이면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핵심 결절점(core node)’도 존재한다. 굳이 재정의하면, 핵심 결절점은 과거부터 잠재되어 온 의미화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매듭이면서 향후 스토리텔링의 진로, 곧 미래에 벌어질 사건들에 대한 의미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매듭이다.

범죄 스릴러에서 결절점, 핵심 결절점은 긴장의 유지‧확장에 매우 중요한 국면이 된다. 그 순간에 이르러 확실한 혐의점을 갖는 용의자로 추리의 방향이 전환되거나, 추적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제시되기도 한다. <세븐> 역시 관객의 지적‧정서적 몰입감을 진작시키는 다양한 서사적 계기들이 있고, 그들 사이의 의미화 가능성이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되는 순간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가장 명백한 핵심 결절점 하나를 설명하기로 한다. 밀스와 서머셋이 존 도우의 집 안에 들어가 그가 범인이란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신에 이르러 <세븐>은 ‘누가 범인인가’를 놓고 진행되던 ‘추리’의 플롯이 종결되고,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화두로 삼는 ‘추적’의 플롯이 전면화 된다.

생뚱맞지만, 이 핵심 결절점의 성격과 효과를 파악하기 위해 타이틀 시퀀스를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세븐>의 타이틀 시퀀스는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로 압도적인 명성을 떨친 카일 쿠퍼(Kyle cooper)의 역작이다. 그가 만든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나 <미믹(Mimic)>의 타이틀 시퀀스도 화려하지만, <세븐>의 타이틀 시퀀스는 테크닉의 과시에 그치지 않는다. 기괴하고 끔찍한 파편화 된 이미지들이 음향과 음악, 타이포그라피와 교합하면서 스릴러 특유의 불안 심리를 극대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 몽타주는 존 도우의 집 신(핵심 결절점)에 도착해서야 사후적으로 비약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편집증적 강박에 시달리는 존 도우의 불연속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내면 풍경이 타이틀 시퀀스로 미리 다녀갔던 것이다.

 

4) 로버트 맥키, 고영범·이승민 역,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민음인, 2015, 59쪽.

 

여기서 영화 초중반에 등장한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신 하나를 언급하고자 한다. 서머셋은 최근 발생한 살인 사건들의 연관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이때 도서관 실내에 놓인 라디오에서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가지런한 책들과 ‘G 선상의 아리아’는 우리에게 일정한 무드를 선물한다. 단순히 무드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존 도우는 여러 기독교 고전과 범죄 관련 책들을 섭렵하면서 자기만의 종교적·율법적 신념체계와 ‘심판’의 방식을 구상해온 것으로 보인다. 말끔한 얼굴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왜곡된 실천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래서 층고 높은 도서관을 가득 채우는 우아한 음악과 서머셋이 펼쳐든 『켄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신곡(La Divina Commedia)』 속 끔찍한 삽화들은 존 도우의 양면성을 상기시키는 역설적 장치다. 유념할 것은, 이러한 해석 역시 존 도우의 집 신을 거친 이후에야 명백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타이틀 시퀀스와 도서관 신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통합하는 존 도우이 집 신을 더 살펴보기로 한다. 존 도우는 사회를 향해 설교와 심판을 행해온 ‘과대형 편집증’ 환자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는 사제의 수준으로 종교적 자기 소명에 충실한 사이코패스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집 안에 가득 찬 기독교/반기독교적 문양들, 성경책과 각종 약물들, 온갖 자물쇠와 의심스러운 사진들, 범죄와 연관된 도구와 소품, 소장품은 기괴하면서도 광적이다. 게다가 그는 일상의 거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여 250쪽 분량의 노트를 2천권이나 만들어 온 것으로 밝혀진다.

요컨대 존 도우의 집 신은 특별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았던 장면들(예컨대 타이틀 시퀀스, 도서관 신)을 단박에 재의미화하면서 ‘범인 찾기’를 일단락시키는 매듭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범인 잡기’를 향한 스토리의 방향 전환을 분명히 주지시키는 매듭이 된다. 이처럼 핀처는 스토리의 맥락을 틀어쥔 채, 정교하게 우리의 지적‧정서적 반응을 설계한다. 결절점, 핵심 결절점의 활용을 통해 존 도우의 반사회적 실천이 비사회성에 함몰된 현대인을 향한 역습이란 사실을 주지시킨다.

쇼트 바이 쇼트로 <세븐>을 읽으면 핀처의 ‘완벽주의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면모가 보인다. 그러나 범죄 스릴러의 전형으로 <세븐>을 놓고 서사구조를 뜯어보면, ‘완벽주의 스토리텔러’의 자질을 확신할 수 있다. 존 도우의 집 신의 배치와 활용, 그리고 미장센은 이를 뒷받침하는 간단한 사례 중 하나다.

 

서스펜스 묵시록

범죄 스릴러로서 <세븐>의 서사적 쾌감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엔딩 시퀀스의 극적 전개를 묘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젠가 <세븐>을 봐야 할 새로운 관객들을 위해 이 글은 이즈음에서 결정적 정보를 아끼고자 한다. 다만 <세븐>의 엔딩 시퀀스를 꼼꼼히 살피기 전에는, 핀처가 기획한 스토리의 스타일, 스타일의 스토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픈 건, 핀처의 범죄 스릴러가 반동인물, 곧 ‘도망자(범인)’를 다루는 방식이다. 범죄 스릴러물에서 사회의 폐부를 드러내는 반동인물의 매력은 콘텐츠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 면에서 존 도우 캐릭터는 <세븐>의 매우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이 준 소명 아래에서 자기 임무와 욕망을 합치한 자, 신성한 목적을 향해 자신의 모든 의식과 시간을 정렬시킨 자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그는 자기만의 윤리적 준거를 가진 망상에 기초해 현실 세계의 미래를 경영하려 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형사와 대결하는 인물이 아니다. 대사회적 메시지를 위해 그들을 이용하는 위치에 있다.

핀처가 만들어온 범죄 스릴러물들은 <세븐>을 기준 삼아 설명할 수 있다. 존 도우는 이후에 창조된 캐릭터들의 아버지다. 이를테면 <파이트클럽(Fight Club)>에는 존 도우보다 훨씬 복잡한 사회적 함의를 담지한 ‘잭/테일러’가 등장한다. 그는 이데올로기화된 소비 메커니즘의 지배에 시달리는 중 무의식이 구성한 초월적인 환상을 앓게 된다. 선악의 구분조차 무의미한 곳에서 자기 정체감마저 잃어버린 채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망상 체계 속 진실과 폭력이라는 생활 수단을 놓고 기묘한 망설임을 경험한다. 전혀 비상식적인 폭력 게임 안에 매혹당해 끌려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가 자기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허구적 환상과 싸우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혼몽의 전장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세븐>에서 <파이트클럽> 사이의 시간, 그러니까 1995년에서 1999년에 이르는 기간을 ‘세기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핀처의 스릴러물 속 주인공은 항상 그만의 세기말 속에서 불가해한 열정과 죽음에 닿아있는 충동을 즐긴다. 이는 핀처의 범죄 스릴러에 항상 반복되는 염세적 세계관과 전복적인 혁명에의 의지와 연관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앞의 두 영화에 <조디악(Zodiac)>까지 묶으면 ‘서스펜스 묵시록’이라는 언명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핀처가 연출한 대다수의 작품이 스토리텔러로서 그의 재능을 웅변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핀처의 가장 탁발한 재능은 ‘서스펜스 묵시록’에 속하는 영화들에서 빛난다. 핀처는 알고 있다. 스타일은 내용을 취급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그치지 않고 스토리는 주제에 따라 내용을 엮은 인과적 덩어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장르적 규준을 활용‧변용하는 중 스타일과 스토리가 서로를 가장 이상적으로 부축하며 통합되는 방식을 선보여 왔다. 조만간 다른 얼굴을 한 존 도우가 새로 설계한 게임을 제안해 왔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의 인문학적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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