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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망각의 길 위에서, 토미 리 존스의 <더 홈즈맨>
[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망각의 길 위에서, 토미 리 존스의 <더 홈즈맨>
  • 손시내(영화평론가)
  • 승인 2019.09.16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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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홈즈맨>(The Homesman, 2014)은 배우 토미 리 존스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의 중심엔 서부에서 동부에 이르는 지난한 여정이 있다. 여기 얽힌 사연은 이렇다. 네브래스카의 어느 작은 마을, 고향인 동부를 떠나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온 여자들이 정신질환을 앓는다. 세 명의 여자는 남편들의 성적 학대와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고, 척박한 서부의 환경에도 적응하지 못한다. 이들은 전염병에 자식들을 잃거나 스스로 아이를 죽이기도 하고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 이따금 영문 모를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 여자들은 대체로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고 기이하게 침묵한다. 교회에선 이를 문제로 인식하고 여자들을 동부의 아이오와 교회에 데리고 갈 것을 결정하는데, 문제는 선뜻 나서는 남자가 없다는 것이다. 여자들의 남편들 모두 길 떠나길 주저하고 거부하는 때, 마을에 홀로 사는 여자 메리 비 커디(힐러리 스웽크)가 그 일에 자원한다.

 

영화는 서부의 풍광에 이어 땅을 가는 커디의 모습으로 문을 연다. 그는 성실하고 강인하다. 또한 커디는 종교적 신념과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옳은 일을 하고자 위험한 길에 스스로 오르는 자이기도 하다. 마차를 구해 세 명의 여자들을 태우고 동부로 향하는 길에, 커디는 밧줄에 묶인 총잡이 조지 브릭스(토미 리 존스)의 목숨을 구하고 그와 동행하기로 한다. 목숨을 빚지고 돈도 약속받은 브릭스는 퉁명스럽긴 해도 이 여정에 함께 올라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낸다. 이렇게만 보자면 <더 홈즈맨>은 영웅적인 한 여성의 이야기, 혹은 길 위의 우정이나 동료의식을 보여주는 식의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몇몇 장면들은 여자들의 비명에 가슴 아파하고 눈물짓는 커디의 진심 어린 표정에 할애되고, 멈춰있는 시간은 모두 커디와 브릭스가 여자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데 쓰인다. 그런데 이 여정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고 이끌어가고 있는 커디에게, 과연 이 길은 무엇일까. 그건 단지 선한 인간의 선한 목적으로만 설명되는 것일까.

동부에서 온 여자들을 다시 동부로 돌려보낸다는 점에서,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이 여정의 속성에 귀환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선 커디를 제외하곤 아무도 이 몸짓을 귀환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세 여자는 물론이거니와 마침내 다다른 아이오와에서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돌아가야 할 주체들은 미쳐버렸고, 일행이 아이오와에서 목사의 아내(메릴 스트립)를 만난 이후 영화는 여자들과 관련된 어떤 후일담도 보여주지 않는다. 아무도 반기지 않고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여정, 귀환 아닌 귀환을 간신히 이어주던 존재인 커디는 이미 사라진 후다. 그는 척박한 땅에서도 밭을 갈며 뿌리내리기에 대한 열망을 간직했던 인물이다. 그는 남자들에게 결혼을 먼저 제안하며 정착의 미래를 말했던 자이다. 그러니까, <더 홈즈맨>의 여정을 정착이나 귀환, 기억과 같은 말로 이해하려는 자는 커디 뿐이었다고도 말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실은 이 길은 망각의 길이기에, 커디는 끝내 그 길의 끝에 다다르지 못한다.

 

영화의 중반쯤 등장하는 한 장면이 있다. 사막지대 한복판에서 커디는 파헤쳐진 무덤을 본다. 나무로 된 묘비는 땅에 나뒹굴고 아이의 뼈가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다. 사람과 짐승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헤집어놓은 이 무덤을, 커디는 홀로 남아 정돈하기로 한다. 신에게 눈물로 호소한 뒤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뒤늦게 출발한 커디는 방황하는 말 위에서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떠돈다. 심지어 다시 그 무덤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가운데 모래바람은 세차게 불고 날도 어두워진다. 물론 커디는 곧 모닥불을 피운 일행을 찾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스스로 목을 맨 채 영화에서 퇴장한다. 개척과 정착에 따른 수많은 희생을 제자리에 돌려놓거나 죽음을 기억하려는 몸부림 같은 건 모래바람에 무참히 쓸려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가 선 땅이 온통 망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까. 영화는 그 쓰라림을 안은 채 망각의 여정을 지속하고,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결국 그 죽음 또한 잊힐 것이라 말하게 된다.

 

 

 

글·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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