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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회주의공동체의 이상과 모순 : <사랑의 시대>(2017)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회주의공동체의 이상과 모순 : <사랑의 시대>(2017)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9.09.16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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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꿈꾸는 인간의 이상

인간의 욕망 중에 나누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다.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 본성이 있는 반면, 남과 나눔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심리도 있다. 사회발전과 정치의식의 변화도 그중 하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나타난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1970년대 북유럽을 대표하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 사회주의적 열풍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젊은 세대들은 사회주의로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섰고 세상은 온통 사회주의적 이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토마스 빈터베르크(Thomas Vinterberg) 감독의 영화 <사랑의 시대>는 1970년대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다. 원제가 ‘사회주의적 공동체(commune)’다. 이상적인 공동체 가정을 꿈꾸는 부부가 있었고 이들의 꿈이 나중에 어떻게 끝나는 가를 보여준 영화의 암시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 에릭은 건축과 교수고 아내 안나는 잘 나가는 텔레비젼 앵커다. 그들에게는 청소년인 딸 프레야가 있다.

이들은 에릭 부모의 유산인 대저택을 보러 가면서 시작한다. 136평이라는 넓은 집을 소유하는 것이 못마땅한 남편 에릭과 권태기에 접어든 아내는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지 말고 공동체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시작부터 둘은 견해차이를 돌출시킨다. 둘의 가벼운 언쟁을 딸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딸은 이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게도 텔레비전의 꺼진 화면속에 비친 모습으로 바라본다. 이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미있는 것은 부부 시선이 각기 다른 데로 향해 있다는 것. 딸이 바라본 텔레비전속 마주 보는 부부 모습은 마치 허상처럼 보인다. 실체에선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고 TV속에서 마주 보는 모습은 허상이다. 이 비유는 영화 전체에 작용하여 영화를 다 보고 난 듯한 느낌을 이미 암시한 영상으로 제시된다.

 

영화의 스토리는 학생 엠마와 관계를 맺게 된 에릭이 그녀를 집에 끌어들이면서 복잡해진다. 프레야는 엄마에게 차라리 나가는게 낫다는 조언을 받고 가족 구성원에서 밀려나는 수모를 겪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그 사이 이들 부부는 넓은 집을 소유한 대신 공동체주의를 실천하고자 흥미로운 실험을 하게 되는데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동거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에릭은 불륜의 관계인 엠마마저 공동체라는 명분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그것을 동의해 준 것도 남편을 생각한 아내 안나다.

영화의 초점은 공동체주의라는 것이 과연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거스르면서 발전할 수 있을까에 있다. 전통적으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공동소유하고 있다는 관념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남편이든 아내든 다른 남녀를 마음대로 만나고 그들과 더불어 한 지붕 아래서 동거 할수 있다면 전통적인 일부일처제 가정은 존속될 수 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존속 할 수 없다. 당분간 존속하는 것처럼 유지된 것은 공동체주의라는 알량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 허위며 포장이고 핑계거리가 된다. 명분이 된다. 에릭이 엠마를 합법적으로 가정에 들여 섹스하고 같이 밥 먹고 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공동체주의를 믿는 아내의 용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 안나는 그렇게 자유주의자며 동시에 사회주의자였던가? 물론 아니다. 갑자기 믿음이 도래했다고 사람의 본성이 바뀔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나야 말로 가장 전통적인 순애보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모든 것을 승인한 것은 오로지 자유주의자/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남편 에릭을 가까이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 관용을 최대한 부도덕하게 발전시킨건 다름 아닌 위선적 남편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이기적 공동체

공동체라는 것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한다. 다섯 쌍 열 명 동거인들이 갖춰지자 즐거운 시작을 알리는 장면 중 하나. 그들은 심지어 나체 수영까지 하며 한때 즐거워 한다. 이들은 같이 자고 먹고 생활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덴마크 사회주의의 한 극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마치 에덴 동산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정도는 우리 나라에서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이상향의 그림이다. 남녀가 벌거벗고 허물 없이 수영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사람 사는 낙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면 할 수 없는게 공동체의 모순이다. 말이 공동체지 오히려 공동체사회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묘한 감시사회가 되어 결국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현실사회주의, 즉 공산주의국가는 그렇게 실패했다. 겉으로는 가능한 선까지 아무 문제가 없고 평등하다. 인간 내면 깊숙이에 들어있는 권력까지 평등해지지는 않는다. 그 부분을 건드릴 때 공동체는 자신을 구속하는 사회가 된다.

사랑의 문제가 특히 그렇다. 남녀가 서로 혼탕이 되어 뒹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일부일처제만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일처제도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제도일 뿐 영원히 이상적인 결혼제도는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이 여러 명과 같이 가족을 꾸리는 과거의 제도 혹은 지구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런 제도들이 필요하다면 다 가능한 제도들임엔 틀림 없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그걸 운용하는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사랑이란 정말 평등해야 하고 헌신적이어야 하는데 남을 배제하고 원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마음속에선 공동체 삶이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을 다룬다. 공동체를 제도로서만 주장할 게 아니라 먼저 개인의 마음이 사적 소유와 욕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글·정재형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영화이해의 길잡이』, 『영화영상스토리텔링100』 등의 역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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