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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 해법은 ‘평화’뿐이다
코트디부아르 해법은 ‘평화’뿐이다
  • 에크라 미에잔
  • 승인 2011.01.0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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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   11월호 ‘평화적 대선까지 걸린 10년’을 읽고

 2010년 11월 28일 치른 코트디부아르 대선은 이 나라의 정치적 막장을 보여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월호는 ‘평화적 대선까지 10년’이란 제법 말끔한 제목으로 코트디부아르의 새 출발을 넌지시 기대했다. 코트디부아르 북부 지역 반군과 선거인명부 작성 과정에 불안감을 슬쩍 내비치긴 했지만, 희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사라지고 점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염려만 고스란히 현실로 남을 것임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필자는 코트디부아르 태생(현재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으로, 한국에서 ‘미디어와 평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언론을 통해 바라본 코트디부아르 사태는 실로 서구적 관점에 바탕을 둔, 이슈 중심 보도의 전형이었다. 필자는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는 코트디부아르 북부 지역의 부정선거에 대한 사실관계를 함께 고민하고 싶다. 더불어, 무대 뒤 주인공인 유엔과 주권 분쟁에 대해서도 살펴보려 한다.

수면 위로 떠오른 유엔의 존재감

2006년 8월 3일 발행된 <월드 디펜스 리뷰>에서 전미외교정책협의회(NCAFP) 선임연구원이자 아프리카 정책 담당 의장인 피터 팜 박사는 “현 코트디부아르 사태를 통해, 우리는 유엔 설립 이후 국가주권에 관한 가장 공격적이고 국제적인 ‘법적’ 침략이 무엇인지 목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소르본대학 연구자이자 ‘아프리카 관점 연구소’ 대표인 필리프 에바노 역시 2010년 12월 8일 프랑스 라디오(<Kernews>)에서 비슷한 점을 강조했다. 그는 사태의 본질이 유엔과 코트디부아르 사이의 주권 다툼이라고 분석했다. 더 이상 코트디부아르의 선거 뒤 위기는 그바그보-와타라 후보 사이의 권력 다툼에 머물지 않는다. 헌법적 선거 절차가 잘 지켜졌는지, 투표를 통한 코트디부아르 국민의 주권 선택이 얼마나 반영됐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위기 해결의 `고갱이'다.

2002년 군사정권과 반군 저항운동이 일어난 뒤, 코트디부아르 사태 해결은 일련의 국제적 동의 절차 아래 진행돼왔다. 선거 조직 과정에서도 기존 (국가)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를 대체해, 정당 임원으로만 구성된 새로운 (독립) 선관위가 설립됐다.

2010년 코트디부아르 결선 투표 당시 선관위 위원은 461명이었다. 이 중 9%에 해당하는 42명은 친그바그보 세력이었고, 91%에 해당하는 419명은 친와타라 세력이었다. 극명한 세력 불균형이다. 그럼에도 양쪽은 이번 선거를 비밀투표 방식으로, 전자식 개표와 수동식 개표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데 ‘합의’했다.

국제사회는 코트디부아르의 평화와 안정의 모색을 명분으로 국제적 협정문을 만들어왔다. 2003년 1월 24일 ‘리나스-마쿠시스’ 협약, 그 뒤 ‘아크라3’와 ‘프리토리아’ 협약 등인데, 이 협정문들은 2002년 통합 실패 이후 새로운 세력을 결집 중인 ‘신세력’(New Forces)이라는 반군의 즉각적 무장해제를 공통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무장해제는 국가 통제 아래 남부 지역에서 실행됐다. 그러나 ‘신세력’이 60%를 지배하는 북부 지역은 무장해제가 실행되지 않았다.

실제로 이번 코트디부아르 대선의 후폭풍은, ‘신세력’ 반군들이 장악한 북부 지역에서 불법적 투표가 이뤄졌다는 주장, 그리고 2005년 프리토리아 협의문의 해석에 따른 양쪽 충돌로 집약된다.

코트디부아르 헌법이 인정한 그바그보

19개 선거구 중 문제가 되는 4곳은 ‘신세력’ 반군이 장악한 북부 지역이다. 이곳의 투표 기록들을 살펴보면, 등록된 선거인명부 수보다 많은 유권자가 투표했다. 물론 부풀린 유권자 수는 와타라 후보의 득표 수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또한 지역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그바그보 후보를 지지하는 주민들은 반군에게 공격당하거나 암살됐으며, 투표소 감독과 투표용지 수집·운송 등 모든 투표 절차가 불법적으로 진행됐다.

선거 뒤, 선관위는 선거 결과를 발표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체됐고, 헌법재판소가 선관위의 임무를 맡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선관위 해체 뒤, 위원장은 와타라 후보의 본부가 있는 골프호텔로 초대받았다. 그곳에서- 그럴 권한이 없음에도- 프랑스 정부와 해외 언론, 유엔 대표를 앞에 두고 와타라가 이겼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이미 해체된 선관위가 와타라의 승리를 선언한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또한 선관위 위원장의 선언을 승인한 유엔의 절차도 유엔의 승인 이전에 헌법재판소가 일단 승인해야 하기 때문에 불법적 승인이라고 주장했다. 그 뒤, 헌법재판소는 국영TV를 통해 북부 지역의 불법적 투표 절차와 통계 처리 과정에 대해 발표했다. 몇몇 부분에서는 와타라의 승리를 인정했지만, 모든 조사 절차가 끝난 뒤 헌법재판소는 그바그보가 승리했다고 최종 발표했다.

유엔이 인정한 와타라

그러나 2010년 10월 31일에 있었던 1차 투표 경선 후보였던 프란시스 우디 교수의 주장은 다르다. 이번 선거 절차가 코트디부아르 헌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 이해한 것이며, 2005년에 만든 프리토리아 협의문 조항에도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프리토리아 협의문에 따르면, 유엔이 선거의 모든 부분을 관할하며 유엔 대표가 선거 결과를 최종 승인한다고 명기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협의문에 근거해, 유엔과 국제사회는 2010년 코트디부아르 선거를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그러므로 1차 투표에서 유엔의 승인 절차를 따른 것처럼, 최종 결과 선언 권한도 유엔 대표에게 있다고 우디 교수는 주장한다.

또한 그는 선관위 대변인이 임시 투표 결과 발표를 못하도록 친그바그보 세력이 일을 꾸몄기 때문에 선관위 해체 직전까지도 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헌법재판소가 어떻게 7일 만에 2만2천 장의 투표용지를 확인하고 결과를 발표할 수 있었는지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프리토리아 조항이 인정한 유엔

이번 코트디부아르 사태는 단순히 그바그보-와타라의 대결 구도를 넘어, 국가주권을 두고 벌이는 분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유엔이 코트디부아르 선거를 조직하는 명분 아래, 거대한 힘을 확장하려 애쓰는 모습에 주목해야 한다.

“자유롭고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를 위해, 서명국들은 유엔이 선관위의 임무를 맡기 위해 참여하는 데 동의한다.” “서명국들은 유엔이 충분한 역할을 다하도록 보장한다.”

이렇듯 조항 곳곳이 모호한 문장으로 유엔의 선거 개입 정도와 역할을 서술하고 있다(영어 원문을 보면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결국 코트디부아르 선거 뒤 위기는 유엔 개입에 관한 협의문 해석 논쟁으로 이어졌고, 코트디부아르는 지금 두 권력의 두 정부가 공존한다.

프리토리아 협의문은 “어떤 부분에서든 해석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서명국들은, 중재자가 조언할 것을 동의한다”고 명기한다. 이에 따라 이번 코트디부아르 사태의 중재자 타보 음베키는 2010년 12월 5일 코트디부아르를 방문했고, 우리는 현재 음베키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양 세력의 팽팽한 긴장감 아래, 우리는 인본주의에 입각한 평화로운 해결 방안을 원한다. 무엇보다 코트디부아르 시민이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전쟁에서 승자란 없으며, 파괴와 고통과 번뇌만이 존재한다.

덧붙여, 필자는 한국 사회가 언론에 비친 코트디부아르 후폭풍의 모습을 그저 먼 나라 분쟁 이야기로 넘기지 않기 바란다. 세계 열강, 그리고 유엔의 개입에 따른 주권 분쟁이라는 관점에서 코트디부아르와 한반도 남북 문제는 흡사한 국제정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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