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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숙의 문화톡톡] 소리를 잡아라 ② 미디어 전쟁 – 틴 팬 앨리에서 로큰롤까지
[송화숙의 문화톡톡] 소리를 잡아라 ② 미디어 전쟁 – 틴 팬 앨리에서 로큰롤까지
  • 송화숙(문화평론가)
  • 승인 2019.10.0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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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틴 팬 앨리 Tin Pan Alley

단 한 번 존재하고 사라질 음악을 보존, 전달, 재생한다는 것이 음악 미디어화의 이상(理想)이라면, 기술력은 이 이상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제시해왔다. 20세기 전반기는 두 가지 상이한 미디어화 방식, 즉 기록 음악과 녹음 음악간의 대립·갈등이 첨예화된 시기로, 서막은 뉴욕의 28번가, 이후 틴팬앨리 (Tin Pan Alley)” 불리게 된 곳으로부터 시작한다.

 

수공업적 생산방식을 벗어나 기계화된 대량 생산방식으로 전환된 근대적/자본주의적 산업시스템으로서의 음악산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무렵부터다. 음악을 보존, 전달, 재생하기 위해 음악을 미디어화한다는 것은 곧 음악의 제품화(Product)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음악산업이라는 개념에 부응하는 최초의 모델은 낱장악보 (Sheet Music)라는 미디어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다. 미국 전역에 걸쳐 군소의 음악출판사들이 난립하며 낱장악보를 찍어냈지만, 그 중 브로드웨이와 매우 근접해있는 뉴욕 28번가에는 음악출판사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거리 전체를 음악출판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양상을 보였는데, 이 거리가 바로 틴 팬 앨리다.

 

1905년 틴 팬 앨리 전경
1905년 틴 팬 앨리 전경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틴 팬 앨리가 형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10까지 이 곳에서 출판된 악보 부수가 20억에 달할 만큼 틴 팬 앨리는 음악산업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계 전체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작곡자나 작사자들은 자신의 음악을 선보이기 위해서 이 거리로 몰려들었고 그중 재능 있는 몇몇은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 고용되었다. 새로운 음악을 찾는 보드빌이나 브로드웨이 같은 무대관계자들 역시 이 거리에서 신곡을 구했고,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 거실용 피아노(Parlour Piano)가 보급되며 중산층 가정에서도 피아노를 갖출 수 있게 되자 이들이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만들어 인쇄하거나 기존의 곡들을 아마추어용으로 편곡하여 인쇄 - 역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구매하기 위해 이 거리로 몰려들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음악출판사들은 자신들이 출판하는 음악을 선전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했는데, 즉 악보를 전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음악을 직접 들려주어 구매욕을 자극하는 것이다. 악보를 소리로 전환 시키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 송플러거(Song-Plugger)인데, 대개 가수나 피아노 연주자인 이들은 1층 창문 앞에서 신보나 고객이 들어보길 원하는 악보를 즉석에서 연주했다. 틴 팬 앨리는 출판사마다 고용한 송플러거들의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1900년 뚱땅거리는 피아노 소리가 마치 얇은 (thin) (pan)을 두들겨대는 소음과 같다고 이 거리를 묘사한 작곡가 로젠펠드(Monroe H. Rosenfeld)의 글에서 이 거리의 새로운 이름 틴 팬 앨리가 유래했다. 다분히 비하적인 이 명칭에는 산업화 된 음악 생산방식을 통해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음악들이 대거 양산되는 현상을 비판하는 시각이 담겨있지만, 틴 팬 앨리는 음악 생산자, 연주자, 소비자들을 매개하는 장이자 시스템이었다.

 

"화이트크리스마스" "이스터퍼레이드"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얼빙 벌린 (Irving Berlin, 1888-1989)은 틴 팬 앨리 최고의 작곡강자 송플러거였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화이트크리스마스" "이스터퍼레이드"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얼빙 벌린 (Irving Berlin, 1888-1989)은 틴 팬 앨리 최고의 작곡자이자 송플러거였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랩소디 인 블루" "파리의 미국인" "포기와 베스"의 작곡자 조지 거슈윈 (George Gershwin, 1898-1937) 역시 틴 팬 앨리의 송플러거로 일했다. 그의 민요풍 노래 "스와니강 Swanne" 악보는 100만부 이상 팔렸다 (사진출처: 브리태니커)
"랩소디 인 블루" "파리의 미국인" "포기와 베스"의 작곡자 조지 거슈윈 (George Gershwin, 1898-1937) 역시 틴 팬 앨리의 송플러거로 일했다. 그의 민요풍 노래 "스와니강 Swanne" 악보는 100만부 이상 팔렸다 (사진출처: 브리태니커)

이토록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틴 팬 앨리를 위협한 것은 다름 아닌 녹음음악의 등장이었다. 1894년 에밀 벨리너 (Emile Berliner, 1851-1929)토킹머신으로 고안되었던 에디슨의 포노그래프 아이디어를 음악으로 전환해 미국 그래모폰 회사 (United States Gramophone Company)를 설립한 이후 콜럼비아, 데카, 빅터, 폴리그램 등의 음반회사들이 대략 19세기 말~20세기 초기에 창립되어 기반을 다졌으며, 1920년대에 접어들게 되면 미국에서만 1억 장 이상의 음반이 제작되었다. 이는 틴 팬 앨리로 대표되어 오던 음악산업 구도의 재편을 의미하는 한편 기록 미디어인 악보로 미디어화되기에 부적합하거나 모자라다고 치부되어 오던 음악들에게 새로운 미디어화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블루스나 재즈 같은 아프리칸-아메리칸의 음악이 있었다.

 

2. 미디어 전쟁 : ASCAP vs. BMI

1914년 미국의 저작권 단체인 ASCAP(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s, and Publishers)의 설립은, 물론 표면상 음악가들의 권익 보호라는 선량한의도가 목적이겠지만, 과연 누가 보호되어야 하는가를 명시한 단체명 자체 -작곡가, 작사가, 출판사 연합-에서 드러나듯, 기존 악보산업의 주체들이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에 대해 자신들의 권익보장을 요구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녹음 음악의 등장 이후 발생하던 문제는 라디오의 등장 이후 더욱 복잡하고 첨예해진다. 라이브음악이나 녹음음악 모두를 광범위하게 송출 broadcasting’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라디오와 기존 미디어(틴 팬 앨리 뿐만 아니라 음반산업)와의 갈등은 이미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며 중심적인 미디어로 자리 잡게 되는 라디오는 일단 음반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는데, 첫째는 라디오 수신기만 있으면 무료로 들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저열했던 음반제작 및 재생기술과 비교하면 전파를 통해 전송되는 라디오가 마찰에 의한 잡음 없이 월등히 나은 음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디오가 음반산업을 위협한다는 위기의식 -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들을 청취자들이 더는 음반을 사지 않을 것이라는- 은 곧 라디오와 음반산업의 공생으로 전환되었는데, 새로 발매된 음반을 선전하기 위해 신문에 광고하거나 공연을 하는 것보다 라디오에 한 번 송출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금방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공황시기를 거치며 음반산업과 라디오 방송은 대체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라디오기기 생산업체이자 NBC 방송네트워크를 소유하고 있던 RCA (Radio Corporation of America)는 빅터 축음기회사를 인수하여 1932RCA-빅터로 합병 전환되었고, CBS (Columbia Broadcasting System)의 경우 1927년 콜롬비아 축음기회사와 합병 확대하여 콜롬비아 축음기 방송시스템 (Columbia Phonographic Broadcasting System)으로 전환되었다.

 

라디오가 음반산업과는 일종의 공생 관계를 형성해갔던 반면, 악보산업의 중심이었던 틴 팬 앨리와의 반목은 더욱 첨예해져 갔다. 틴 팬 앨리에서 가장 활동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음악가들이 대거 영입되어있던 ASCAP, 이 단체에 등록된 음악이 라이브공연에서 사용되는 것뿐만 아니라 방송에서 사용되는 데 대한 사용료를 지급하도록 요구했다. 원래 연주자들에게 연주료만을 지급해왔던 라디오방송국에서는 결국 1930ASCAP과의 협의를 통해 5%의 료열티를 지급하게 된다. 그러나 녹음음악 및 방송 미디어의 영향력이 더욱 강력해져 갔던데 반해 악보산업은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1937ASCAP은 라디오 방송에 대해 2배에 달하는 요율 인상을 요구했다. 수차례의 협상 논의는 결국 결렬되고, 1939년 라디오방송측은 ASCAP에 대항하는 저작권 단체인 BMI (Broadcast Music Incorporated)를 설립, 대대적인 ASCAP 보이콧에 돌입한다. 10개월간에 걸친 보이콧 기간 동안 CBSNBC 라디오에서는 ASCAP에 등록된 음악들 (125만 곡)을 제외한 나머지들만 방송했다. 이 나머지란 ASCAP에서 거부되거나 배제된 음악 일체를 지칭하는데, 인종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이른바 블랙계열 음악인 가스펠, 블루스, 재즈, 부기우기, 리듬앤블루스들과, 백인음악이지만 지엽적 음악이라 할 수 있는 라틴음악, 아메리카 민속음악, 컨츄리 등이 속한다. 로큰롤은 바로 이 나머지들에서 태어났다.

 

3. 로큰롤의 탄생

잘 알려진 바대로 로큰롤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음악으로 리듬앤블루스(Rhythm&Blues)와 컨츄리앤웨스턴(Country&Western)이라는 두 계열이 꼽히는데, 리듬앤블루스는 최신 흑인음악에 속하고, 컨츄리앤웨스턴은 백인음악이지만 컨츄리한’, ‘촌스런 서부음악으로, 이들은 한마디로 음악적으로 문화적으로 주도권을 장악한 세대들에게 밀려난 주변부 음악이다. 쉬크하지 못한 촌스런 음악과 흑인들이 주로 듣는 음탕하고 퇴폐적인 음악. 이 두 상이한 음악이 한데 얽혀들어 새로운 장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만 거대 미디어 산업 간의 갈등에서 어부지리로 얻어진 결과로 치부하는 것은, 로큰롤이라는 하나의 문화구성물을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일 것이다. 이 음악을 자신들만의 새로운 문화적 상징으로 전유하고 이를 통해 이전 세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자 했던 전후 청소년 세대가 없었다면 대중음악의 역사는 오늘날과 다르게 쓰였을 테니까. 부모세대가 금기시하거나 저어했던 것들만을 모아놓은 듯한 이 음악은 청소년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그 폭발의 도화선이 된 것은 1955년 개봉된 영화 <Blackboard Jungle> ( 한국 상영 시 <폭력교실>로 번역됨)이었다.

 

다양한 인종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있는 한 고등학교에 신임 영어교사가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내고 있는 이 영화에는 충격적인 폭력 사건들 (여선생님을 강간하려는 장면이나, 학교 안이나 밖에서 선생님에게 린치를 가하는 장면 등)이 이어진다. 선생과 학생 사이의 긴장과 갈등, 타협과 비타협을 축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이들의 첫 대면에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첫날부터 이 난잡한학교에서 사건 사고를 겪게 되는 주인공 대디어(Dadier)는 집중하는 학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교실에 들어가 영어 교사답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후, 발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스펠링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칠판에 적으며 발음한다. “-에이--아이--, -....” 마지막 음절을 발음하기 전 학생 중 누군가가 던진 야구공은 정확히 대-디를 겨냥했다. 부모, 선생, 학교 등 기성세대의 권위 vs. 이를 산산조각내(려하)는 청소년 사이의 팽팽한 대립에서, 칠판이 깨지고 대디도 대디어도 깨진다.

 

영화 "블랙보드정글" 중
영화 "블랙보드정글" 중
빌 헤일리의 노래명을 그래도 따서 만든 뮤지컬 영화 "Rock around the Clock" (1956)의 암스테르담 상영시 극장 앞 전경. 영화에는 알란 프리드, 빌 헤일리와 그의 밴드 등이 출연한다 (사진출처: pophistorydig)
빌 헤일리의 노래명을 그래도 따서 만든 뮤지컬 영화 "Rock around the Clock" (1956)의 암스테르담 상영시 극장 앞 전경. 영화에는 알란 프리드, 빌 헤일리와 그의 밴드 등이 출연한다 (사진출처: pophistorydig)

이 영화가 상영되는 곳마다 청소년들이 춤추고 뛰는소동 소요가 일어나, 아예 영화 상영을 금지하거나 경찰들이 미리 포진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리고 이 영화 시작과 마지막에 흐르는 빌 헤일리 (Bill Haley & His Comets)의 노래 <Rock around the Clock>는 청소년의 구호이자 새로운 세대의 시작 그리고 로큰롤 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흑인의 목소리를 가진 백인 청년인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1935-1977)로 정점을 찍게 되는 로큰롤에는 기성세대가 세웠던 인종차별의 벽이 이미 무너져 있었고, 이 새로운 시대의 목소리 로큰롤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무대 위에서 로큰롤” “록 스피릿을 외치는 음악가들에 의해 이어져 오고 있다. 그 흔적의 한 켠에서 시대를 노래하고 저항을 노래했던 밥 딜런은 틴 팬 앨리의 시대는 갔다. 내가 그것을 끝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노래를 녹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부수었던 구세대의 옹성에서 미디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글: 송화숙

대중음악평론가 및 대중음악학자. 서울대 작곡과 이론전공 졸업 후 베를린에서 음악학 석·박사과정 마침. 현재 한예종과 전북대학교에서 강의 및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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