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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문화톡톡] 설리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
[안치용의 문화톡톡] 설리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
  • 안치용(문화평론가)
  • 승인 2019.10.16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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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많은 사람이 그 뉴스 봤냐고 물은 이상한 하루였습니다.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늦은 점심을 먹는 중에 조국 사퇴뉴스가 흘러나왔고, 식사자리는 곧 그 뉴스가 차지했습니다. 오후에는 설리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누구?” 사실 나는 설리를 잘 모릅니다. ‘연예인인가?’ 정도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상대는 설리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다가 결국 속옷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그제서야 !” 하고 대꾸했습니다. ‘댓글과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이어졌고 잠시 사인(死因)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 뒤로 오늘까지 여기저기서 설리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그를 생각하게 되었고, 무엇이 아름다운 청춘을 죽음으로 몰았을까 하는 상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의 죽음에 많이 미안했습니다. 꼰대세대여서 설리를 몰라도 그만이지만, ‘브래지어를 통해 죽음 후의 그를 기억한 상황이 당혹스러웠습니다. 인간 최진리(설리의 본명)는 당연히 몰랐겠지만 연예인 설리 또한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브래지어라는 사물을 통해서 설리를 기억한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특정인의 사회적 페르소나를 물화하거나, 또 그 물()의 성격상 불가피하게 따라붙은 성적 대상화와 나아가 여성혐오가 만연한 기억법을 만들어낸 이 사회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생겨나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지만 이런 사회를 도출한 내 몫의 책임이 있을 것이기에 다시 한번 미안했습니다.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은 설리의 이른 바 꽃다운 나이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모르지만 훌훌 털고 마음대로 살지, 왜 그랬느냐. 꽃다운 나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아름답지만 위태롭습니다. 흔히 꽃은 아름답지만 열매를 위한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긴 합니다. 아름답고 위태로운 시기를 거쳐 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더구나 이제는 위태롭지 않은 열매로 향합니다. 다만 이 위태로운 아름다움은 세상의 지속적인 혐오를 끝까지 견뎌낼 만큼 강고하진 않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모라도 견뎌내야 한다고 믿고 실제로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계산에 밝지 못합니다. 설리도 그랬지 싶습니다.

설리 또래의 어느 여학생은 자신 대학의 수업에 청강한 설리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설리가 같이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게 그 자유를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한 대학생은, TV프로에서 설리가 나와 악플에 대해 언급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 게 오히려 안쓰러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저것 찾아보니 설리는 당당한 인간이었습니다. 각성된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삶의 주인이고자 했던 진취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의견과 취향을 담대하게 주장하고 자유를 소중한 가치로 생각한 투사였지 싶습니다.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혐오를 발산하지 않는 한, 또는 고전적인 정의대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마음껏 표현할 자유를 지닙니다. 설리는 대중의 관심 속에 생활하는 (여성)연예인으로서, 성상품화의 맥락을 벗어나서 또한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의 굴레에서 탈피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표출하였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그러한 인간적인 권리행사는 주지하듯 설리에 대한 비인간적이고 집단적인 대응으로 이어졌습니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더 본질적으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설리는 마녀사냥의 대상이 됐습니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은 것이 왜 공격의 대상이 되는지, 여성의 인간적 존엄과 시민적 권리를 소박한 방식으로 주장한 것이 왜 악성 댓글의 표적이 되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인 설리는 더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설리의 죽음의 이유는 망자만이 알겠지요. 전사처럼 싸운 그였지만 공공연하고 지속적으로 반복된 악의와 적대가 그의 영혼을 서서히 잠식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합니다. 그러한 모진 폭력 앞에 무너지지 않을 영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리가 그런 적대와 악의, 그리고 잔혹한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이유는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설리의 안타까운 죽음은 21세기에도 여전한 이 야만에 대한 항거입니다. 그의 죽음은 이 야만의 철옹성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선물 받은 이러한 커다란 각성이 매우 소중하지만, 살아있는 그와 함께 만들어가는 느린 각성보다 소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사실 여러 차례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이 말을 쓰기가 너무 민망합니다. 그러나 그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외람되이 내뱉습니다. 그대가 떠난 뒤의 세상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에 우리는 어떤 기여를 하게 될까요. 그대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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