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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채색 도화지에 그린 사랑의 아픔 - <윤희에게>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채색 도화지에 그린 사랑의 아픔 - <윤희에게>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9.11.1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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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임대형감독 영화 <윤희에게>는 막막하고 허전한 인간의 조건을 영화적으로, 철학적으로 차분하게 풀어나간 보기 드문 수작이다. 영화의 제목은 일본에 사는 동갑내기 여자 준(나카무라 유코)이 보낸 편지의 서두이고 이 시작은 한국에 사는 윤희(김희애)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다. 어둡고 긴 길이 반드시 어둡지 만은 않으리라는 추측은 이 영화를 통해 갖게 되는 마지막 수확이다. 그래서 세상은 또한 살아볼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준이 윤희에게, 그리고 다시 윤희가 준에게 다가가는 그런 영화지만 알고 보면 그 모든 계획과 이면은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의 노력이다. 새봄이란 이름도 항상 새로운 봄이 온다는 뜻의 희망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뫼비우스 띠의 구조를 하고 있다. 영화는 겨울에서 시작하지만 봄에서 끝나고 아이러니한 뒤틀린 곡선의 시간을 지향한다. 인생의 척도를 철학적으로 그려나가는 그림의 구도는 영낙없는 철학교과서다. 준의 고모(키노 하나)는 항상 눈길속에서 외친다. “ 이 눈이 언제 그치려나?” 눈은 그칠수 없다. 준이 말한다. “항상 그렇게 오는 눈을 왜 새삼스럽게 외치느냐?”. 고모는 말한다. “이렇게 외치기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나 적막하고 쓸쓸하단다.” 그리고 이어 덧붙인다, 그녀의 철학강화다. “인간은 자연앞에 무력하다”. 그렇다. 인간은 고로 겸허하게 자신앞에 놓인 일을 성실히 수행하며 부단히 살아가야 한다.

제목은 엄마 ‘윤희’를 표방하지만 알고보면 딸 새봄의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두 계보를 갖는다. 하나는 노래하는 여자였던 엄마를 찾는 가슴 아픈 자식들의 이야기 <그을린 사랑>과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주민들의 화해를 위해 만찬을 차려준 헌신적인 여자의 이야기 <바벳트의 만찬>이다. 새봄은 그 두명의 여자를 닮아있다. 그녀는 엄마에게 온 편지를 가로채어 엄마를 위해 일본여행을 기획하고 마침내 준과 재회하게끔 연출한 기특한 딸이다. 새봄은 외로운 엄마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려는 착한 마음의 소유자다. 엄마의 이야기 혹은 운명은 사실 알고 보면 새봄에 의해 조종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은 윤희의 숨겨진 과거 이야기를 알아가는 기쁨이 작용하면서도 동시에 딸의 숭고한 삶의 이념을 동시에 읽어나가며 감동을 받는다. 새봄은 어떤 여자인가? 그건 인생의 화두다. 자기앞의 장애를 헤쳐나가는 것만 해도 벅찬데 남의 아픔까지 돌보는 사람의 인생은 어떤 것인가?

 

그런데 준, 윤희, 새봄의 인생은 어쩐지 닮아있다. 자신에 집착한 어머니를 오히려 피해 살아온 준이나 준을 사랑했지만 떠나고 피할 수 밖에 없었던 윤희나, 엄마의 허전함을 알기에 엄마와 살기로 작정하고 엄마를 위해 뭔가를 하고 만 새봄의 판단 등이 모두 같은 행위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 혼자만의 생각을 했고 그것이 상대를 가슴 아프게 했지만 결국 상대는 자신의 행동으로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 새봄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윤희의 편지 때문이고 윤희가 움직인 것은 새봄의 일본여행 때문이고, 준이 편지를 쓴 것은 오래전 윤희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용기있게 말한 그 말과 따스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윤희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미친 여자 취급 당하고, 고졸로 무시 당하며 살아가고, 평생 사랑을 잃어버린 고독한 여자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아버지가 사준 사진기는 딸 새봄에게 유전되어 새로운 봄을 꿈꾸는 욕망의 기계로 변신하게 된다. 생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이다. 자기 세대의 절망이 다음 세대의 희망으로 이어질 줄이야. 고모가 항상 외치는 ‘눈은 언제 그치려나’의 말은 다시 살아있는 화살이 되어 날아와 꽂힌다. 눈은 언젠가 그치고 축복의 비가 되어 희망의 눈을 다시 열망하리라.

윤희가 준의 편지를 아파트의 우편함에서 받는 순간 이십년간 단절되었던 사랑의 전율이 다시 흐른다. 이때 전등이 꺼진 어둠은 그녀의 상태를 대변한다. 이어 밝은 날 윤희는 길을 가고 그녀의 뒤로 열차가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의 앞에서 등위로 달리는 열차의 모습과 굉음은 그대로 준에 대한 그녀의 열정적인 사랑과 답답한 고통의 소리를 전해준다.

준과 고모의 삶은 적막함 그 자체다. 둘의 대화는 어깨너머 숏이 아닌 단독의 숏과 리버스숏으로 단아하게 연결된다. 그들의 대화는 어딘가 차갑고 외로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단독의 숏과 리버스 숏의 반복은 그런 점에서 외로움의 반복이다. 혼자 노년의 삶을 쓸쓸하게 보내는 고모나 어머니를 일부러 멀리 했고 더구나 정이 없던 아버지를 최근에 잃고난 상황에서 준은 인생이 그저 그러할 뿐이다. 물론 그녀의 속 마음은 이미 이십년동안 윤희에 대한 그리움으로 뭉그러질 때로 뭉그러진 그런 상태다.

준의 표현은 그렇다. 언젠가 막힌 것은 터질 때가 온다는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참을 필요도 없는 그런 순간에는 터질 것은 터진 다는 것이다. 그게 윤희에게 편지를 쓰게 된 동기에 해당한다. 윤희는 그것을 용기라 부르고 자신도 준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로 화답하며 그들은 그렇게 이십년의 세월을 봉합한다.

준과 고모의 관계와 모습은 또한 윤희와 새봄의 그것과 연관되고 유비된다. 반면 윤희와 새봄의 숏 구성은 표면적으로 따뜻하다. 둘의 모습은 원숏이 아닌 투 숏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공유하는 형상으로 구축된다. 이 둘의 차이는 표면적인 차이 일 뿐이다. 윤희와 새봄은 모녀관계인 만큼 유착되어 있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실상 내면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깊숙이 다가가지 못하는 외로움의 살얼음장이 깔려 있음이 느껴진다. 눈덩이를 뭉치는 장난을 하는 장면에서 그 것이 잘 드러난다. 이때 숏의 구성은 서로의 모습을 공유하지 않는 단독의 원숏들이다. 이 장면을 보면 둘의 분리된 외로움과 나누지 못하는 속사정을 읽게 한다. 새봄이 아무리 윤희의 속마음으로 다가가도 그녀 마음의 어둠을 읽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윤희 역시 사랑하지 않던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새봄에게 무한한 애정이 솟아나지 않는다. 항상 이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담담한 관계다.

 

 

영화의 재미는 전적으로 새봄의 몫이다. 새봄은 적막한 삶의 마른 나뭇가지에 물을 길어올린 장본인이다. 분리된 둘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딸의 기획은 코믹하면서도 눈물겹다. 여기서 둘이란 모두를 말한다. 엄마와 딸의 관계, 연인관계인 윤희와 준의 관계,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인 새봄과 남자친구의 관계. 이 모두가 하나로 녹아드는 연출인 것이다. 눈 장난을 하는 윤희와 새봄의 장면은 서로가 화합되는 롱숏의 장면으로 마무리되고 바로 이어서 집앞의 눈을 치우는 준과 고모의 장면으로 연결되는 편집기법에서 그러한 연출의도를 엿볼수 있다. 윤희와 새봄의 관계는 준과 고모의 관계와 등식화된다는 말을 하는 듯.

윤희와 준의 재회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다른 어떤 영화처럼 일부러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지 않고 도시의 건물을 뒷 배경으로 어둠속에 두 인물은 화면의 양 끝에 서서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이어 단독숏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여주고 그들의 눈에 촉촉이 이슬방울이 맺히는 것으로만 마무리 한다. 둘 사이 여백의 공간에는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이십여년의 세월이 녹아있다. 그 조심스런 세월의 흔적을 값싼 포옹이나 펑펑 흘러내리는 눈물따위로 소비하고 싶어하지 않은 연출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이 영화는 그 자체가 절제된 미학의 결정판이다. 누군가 한 관객이 극장을 나서며 한 말이 떠오른다. 이 영화엔 밝은 날이 거의 없고 어둡다. 그 느낌은 마치 소설을 읽어나가듯이 차분하다. 언제 클라이막스가 오는지 기대되었다. 결국 오긴 오더라. 그런데 그게 다른 영화와는 달라 놀랐다. 이렇게도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 있었구나. 등산복을 입은 평범한 그 관객이 내가 보기엔 평론가 이상이다. 한국 영화를 요즘 관통하는 격정과 오버된 감정의 폭포들. 그 식상함을 일부러 멀리한듯한 이 영화는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보듯이 절제된 감정의 표현으로 한국영화쓰기를 다시 하고 있다. 근래에 보기 힘든 걸작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영화는 대사가 아니라 인물의 표정과 침묵의 영화다. 과묵하게 스타일로 말하는 출중한 영화라는 점에서 가작임이 분명하다.

영화는 준에서 시작해 윤희로 끝난다. 윤희는 준의 편지를 용기있는 행동이라 말하며 자신에게 감염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녀는 자신도 용기를 갖고 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새봄이 엿보고 있다. 그 모든 것은 그녀의 연출이다. 새봄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사랑의 큐피드와 같은 장난꾸러기 요정인 셈이다. 이렇게 영화는 원래 무채색이었던 담담하고 고독한 인간의 조건을 다채로운 색채로 채색하며 훈훈하게 끝낸다. 인간의 색은 본시 그런 지도 모른다. 그저 도화지고 아무 색도 없는 무미건조한 존재지만 누군가 색을 입히면 화려하게 태어나는 그런 존재. 영화는 인간의 절대고독을 말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따스함을 말하며 인간을 입체화한다.

 

글: 정재형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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