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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학살
  • 세르주 알리미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 승인 2019.11.2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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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11월 8일 나탈리 동프니에 리옹 제 2대학 총장과 같은 상황에 놓이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동프니에 총장은 해당 대학 재학생이 분신을 시도했다고 발표했다. 22세의 대학생 아나스 X는 사회적 곤경에 처한 자신의 처지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항의하며 분신을 기도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해야 했던 아나스는 시험에 낙제했고, 급기야 장학금 취소 통보까지 받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앞서 2018년 12월에 분신자살을 택했던 어느 튀니지 언론인의 말을 빌려 “자력으로 혁명을 일으키겠다”라는 결심을 굳혔다.

최근 몇 년 동안 빈곤율이 최대 증가한 세대는, 18~24세의 청년층이다. 동프니에 총장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가 없다”라고 지적했다. 리옹에서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불과 5개월 전, 프랑스 경제사회환경위원회(CESE)는 “일정 시간을 초과해 유급노동에 종사하는 학생들은 학업 실패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라고 경고했었다.(1) 학생들이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주된 이유는 장학금이나 가족의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학생들의 상당수가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노숙을 하는 등 건강을 돌볼 겨를 없이 삶을 버텨나가고 있다. 동프니에 총장은 “대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토로하며,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들에게 심리상담이나 핫라인 전화상담, 사회복지 프로그램, 푸드뱅크 같은 제도를 활용하라고 권유했다(<르몽드>, 2019년 11월 16일). 프레데릭 비달 프랑스 고등교육 연구부 장관은 정부는 장학금 예산을 이미 증액했지만(증액분은 공식 물가인상률에 상응하는 1.3%대에 머물렀다), 관련 사항을 전면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물론,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프랑스 퀼튀르>, 2019년 11월 19일). 이에 앞서 비달 장관은 올해 겨울에는 형편이 어려워 대학 기숙사비를 제때 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강제 퇴거시키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마침내’ 공언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비단 대학뿐 아니라, 병원, 농업계, 소방서, 교육 시설, 토목 부처에 광범위하게 산재해있다. 지난 35년에 걸쳐 민영화가 진행됐고, 무상수당은 삭감됐으며, 각종 제재가 늘어났다. 이처럼 오늘날 프랑스의 모습은 여느 국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인터넷이라도 생겨나서 다행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사회는 결국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박에 철저하게 제압당했고, 급기야 마지막 화염을 토해내고 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포자기에 빠져있다. 이 사회는 수시로 권태감을 드러냈다가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2) 그리고 정권이 교체돼도 좀체 바뀌지 않는 강압적 권력에 결사적으로 항거한다. 최근 발표된, 혹은 향후 예정된 국가의 정책 개혁안은 주택보조금 삭감, 정년연장, 야간근무 자율화, 국가 의료지원 축소, 실업급여 기준 강화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스 민주노동총연맹(CFDT) 서기장이면서 정권의 총애를 받는 로랑 베르제의 말을 인용하자면 가히 ‘학살’이나 진배없는 상황이다.

권위주의 독재정권에서처럼 청년들은 목숨까지 내놓고,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 진압에 눈과 손을 잃고, 우익 진영은 내전이 났다며 비방을 쏟아내는 세상이다. 향후 몇 주간 파업이 몇 차례 더 예정돼있지만, 만약 이 파업마저 실패한다면? 다가오는 새해에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Marie-Hélène Boidin Dubrule; Stéphane Junique, ‘Éradiquer la grande pauvreté à l’horizon 2030 (2030년 극빈 해소 목표)’, 프랑스 경제사회환경위원회(CESE), Paris, 2019년 6월 26일, www.lecese.fr; Vanessa Pinto, ‘Deux jeunesses face à la loi travail(한국어판 제목: 악의적 노동법에 갇힌 두 청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4월호·한국어판 2016년 5월호.

(2) Bernard Cassen, ‘Quand la société dit non 사회가 거부할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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