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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한국 코미디 속 남성의 분노
[이주라의 문화톡톡] 한국 코미디 속 남성의 분노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0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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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는 남자와 현실의 좌절

코미디에서 남성들은 대개 아이처럼 즐겁게 노는 역할을 담당한다. 앤드류 스톳은 『코미디』에서 이렇게 분석하였다. 특히 결혼을 소재로 다룬 코미디에서 아내는 현실적인 상식에 근거해 쾌락을 금지하는 어머니의 역할을 맡고, 남편들은 쾌락 원칙을 추구하는 아동의 역할을 맡는 구도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즉, 남녀의 상호 작용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코미디에서는 아내인 여자는 어머니의 역할을, 남편인 남자는 아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한국에 근대적 오락으로서의 코미디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1930년대에도, 이렇게 아이처럼 노는 남성캐릭터들이 종종 발견된다. 일제시기 조선의 코미디 양식의 대표적인 형식인 유머소설은 대부분 중산층 신식 가정의 모습을 소재로 활용한다. 아직 신혼인 아내와 남편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내는 연애소설이나 탐정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캐릭터와 달리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현명하고 명랑하며 당당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와 달리 남편은 자신의 취미 생활에 몰두하는 인물형으로 그려진다. 동일한 시기 연애소설에 나오는 남성들처럼 유약하고 센티멘털하지도 않고, (사실 연애소설 속 남성주인공처럼 우수에 젖어 고뇌하는 쓸쓸한 남성 이미지가 식민지시대 대표적인 남성상으로 아직까지 여겨지고 있다.) 탐정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탐정처럼 지적이며 민첩하지도 않다. 유머소설 속 남성주인공은 성격적으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개성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들이 가진 독특한 취미이다.

 

류재봉의 신판 가정쟁의 삽화 (잡지 중앙에 1936년 4월 게재)
류재봉의 신판 가정쟁의 삽화 (잡지 중앙에 1936년 4월 게재)

누군가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현상 응모를 빼놓지 않는 ‘현상광(懸賞狂)’이며, (박준영의 「현상시대」, 『신시대』, 1941.2) 누군가는 학생시절 공부는 안 하고 춤과 음악을 쫓아다니는 ‘날라리’이며, (이서구, 「행복의 운하」, 『중앙』, 1937.8) 누군가는 자선함에 기부금을 내는 것을 삶의 유일한 낙으로 삼는 ‘자선사업가’이며, (류재봉, 「신판 가정쟁의」, 『중앙』, 1936.4) 또 다른 누군가는 퇴근 후 축음기를 듣는 취미를 가진 고상한 ‘문화인’이다. (최영수, 「전기축음기」, 『조광』, 1939.10)

그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언제나 즐거운 삶을 산다. 물론 한 번 씩 인생의 위기를 겪는다. 다른 회사에 현상 응모 당선이 되자 실직을 당한다거나, 학교 성적이 나빠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거나, 자신의 전 재산을 통째로 기부하는 실수를 하여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거나, 축음기 할부가 끝나기 전에 회사에서 잘려 할부금을 낼 수 없게 된다는 등의 위기가 도래한다.

그러나 그들은 눈앞에 닥친 위기를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즉, ‘웃으면 복이 와요’의 정신으로 이겨낸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아내의 잔소리가 극심해져도, 일단 웃으며, 상황을 낙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취미 생활을 즐기는 여유를 보여준다. 그러면, 결국, 그 취미 생활로 인해 행운을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현상광은 또 다른 회사에 현상 응모를 하여 다시 취직을 하고, 성적이 나쁜 날라리는 잘 놀았기 때문에 레코드 회사에 취업을 하며, 기부광은 전 재산을 기부한 일이 타인에게 알려지며 좋은 취직자리를 제안 받게 된다. 놀면, 웃으면, 그리고 상황을 낙관하는 여유를 보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2. 웃는 남자와 공격적 비판

하지만 우리 앞에 주어진 현실이, 코미디 속 세상처럼 그렇게 만만할까. 당연히 아니다. 아이처럼 행복한 유머소설 속 남성주인공의 웃음 속에는 종종 이런 현실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더군다나 유머소설은 일제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던 시기의 문화적 산물이 아닌가. 교육의 기회도, 사회 진출의 기회도, 성공의 가능성도, 식민지 출신에게는 그 무엇도 온전하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였다. 제국은 식민지인을 자본주의 소비 주체로 돈을 쓸 때만 그 주체성을 인정해 주었다. 돈을 쓰고 놀면 착한 국민이 된다. 그 외의 영역에서 주체로서 행동하면 불온분자가 된다. 그러니 즐거운 일상을 보여줘야 하는 코미디에서는 노는 수밖에 없다.

일제시기 코미디 속 남성 주체는, 문화적 상상 속에서만이라도, 놀며 삶을 즐기는 환상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유머소설 속에서도 그들은 완전한 해피엔딩을 누리지 못했다. 일제시기 유머소설의 특이한 지점은 행복한 웃음으로 봉합될 수 없는 현실의 지점들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에 빠진 가정은 남편의 취미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운만으로는 구제할 수 없다. 현실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는 어떠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유머소설 속 인물들이 웃는 웃음은 어이가 없거나 마지못해서 웃는 고소(苦笑)다.

「전기축음기」의 주인공, 축음기를 들으며 음악을 즐기던 문화인 남편은 성실한 가장이었다. 레코드를 사는 취미 외에는 다른 사치가 없으니, 월급날 수금원이라고는 레코드 회사 직원밖에 오지 않는다. 그것도 부담스럽지 않게 낼 수 있는 정도의 할부이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가 파산하고 남편은 실업자가 된다. 집안의 기물을 하나하나 팔 수밖에 없다. 레코드는 당연하고 축음기까지 집세를 대신해서 내 놓는다.

축음기를 판 그날, 오랜만에 친구가 한 명 놀러 온다. 친구는 주인공에게 아직도 축음기 취미가 여전하냐고 묻는다. 나는 집세 대신 축음기를 팔았다는 슬픈 소식을 전한다. 그러자 친구는 자신의 명함에 무언가를 적어서 주고는, 자신이 떠난 후에 읽어보라고 신신당부한다. 친구의 명함에는 레코드 회사 수금원이라는 직함이 박혀 있고, 레코드 값을 수금하러 왔다가 남자의 불쌍한 처지를 듣고 차마 수금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친구의 메모가 적혀 있다.

 

비극의 이튿날에는 반드시 희극이 온다는 천리. 터덜거리며 빈 손가방을 그대로 들고 갈 B군을 생각하는 내 얼굴에 도는 웃음은 필시 고소(苦笑)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는 영원히 못 이러날 것처럼 방바닥에 쓰러졌다.

 

「전기축음기」 속 남자주인공의 웃음은 쓴 웃음이다. 축음기를 판 비극 뒤에 레코드 값을 일시적으로 면제 받는 행운이 온다는 사실이 웃겼던 것이다. 현실의 근본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일시적 행운을 향한 웃음은 실제적으로는 냉소이다. 이 사회 속 행운이라는 것이 말도 안 되는 허상임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사실 일제시기 조선 사회에 만연했던 웃음은 이러한 고소나 냉소였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비관에서, 그럼에도 무언가를 시도해 본 자기 스스로를 조롱하는 웃음이거나, 그 비관 속에서 자신의 주체적 힘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조롱하는 웃음이었다. 특히 신문이나 잡지 속 만평이나 만화에는 신여성을 조롱하는 풍자적 웃음이 대부분이었다. 사회의 구조적 시스템 안에서 실현할 수 없는 주체성을, 문화적 장 안에서 타자를 공격하는 즐거움으로 실현했던 것이다.

 

3. 우는 남자와 현재적 분노

실상 일제시기 코미디 속 고소, 냉소, 그리고 조소는 거의 울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자신의 주체성을 마음껏 발현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던 것이다. 이 울분을 표출하고 싶으나, 식민 지배를 받는 조선의 국경 내에서는 울분과 분노는 금지되었다. 사회의 시스템, 즉 주류 지배 질서와 현실에 대한 분노는 일제에 대한 저항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시기 민중들의 분노를 현실적으로 표현해 주었던 것은, 국경 밖에서 잠입해 들어와 가끔 경찰서나 정부 주요 기관에 폭탄을 터뜨려주는 무장 독립 단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에서 표면적으로는 미치광이나 불온분자로 분류되어, 이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금지되었다.

이와 반대로 웃음은 강요되었다. 유머소설의 주요 세계관인 ‘소문만복래’는 일제가 명랑 이데올로기를 통해 조선 사회에 전파하려던 ‘사상’이었다. 억압적인 정권일수록, 정권을 향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국민들에게 웃을 것을 강요한다. 현재 사회는 늘 살기 괜찮아지고 있으며, 우리의 경제는 발전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개인이 불행을 느낀다면 그것은 개인의 비관적 가치관 때문이다. 그러니 한 번 웃어 봐라. 물리적으로 웃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사회의 긍정적인 면에 관심을 가져라.

고소(苦笑)는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웃으려고 하다 보니 나오는 웃음이다. 현실은 이미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렸는데, 자꾸 행복을 상상하며 웃으려고 하다 보니, 말도 안 되는 것에서 웃음을 찾는다. 축음기로 집세를 냈지만, 레코드 할부금은 다음 달로 미뤘으니, 이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야!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 포스터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 포스터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2019)에서, 조커의 웃음 또한 거의 울음이다. 엄마는 아프고, 광대 일을 나가면 언제나 놀림감이 되며, 나는 정신적 문제로 상담을 받고 있는데, 생활비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엄마는 자꾸 답장 없는 편지로 이 상황을 돌파하려 한다. 그리고 나에게 웃으라고, 행복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해피’이다. 나도 웃음으로 세상에 행복을 전달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웃음은 발작적 웃음이고, 웃다 보면 나는 울고 있다.

2008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세상을 향해 ‘왜 이렇게 심각해?’라고 물었다.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정의와 질서를 이룩하려는 배트맨의 의지에 맞서 모든 세상을 혼돈에 빠뜨리려는 카오스의 힘으로 작용한다. <다크나이트> 조커의 미친 웃음은 세상의 질서를 탈주하는 정신분열증의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그 탈주는 심각하지 않게, 즐겁게 이루어진다. 조커는 탈주를 즐긴다. <다크나이트>에서 정의로운 질서를 수호하려는 배트맨이 보여주는 끊임없는 불안과 달리, 조커는 언제나 즐겁게 상황을 주도해 간다. 그리고 배트맨의 희망이었던 검사 하비 덴트마저 두 가지 얼굴로 분열시키면서, 이 세계의 질서에서 탈주하게 한다.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승자는 아이처럼 노는 조커였을 것이다.

이에 반해, 2019년 토드 필립스의 <조커> 속 조커는, 세상을 향해 분노한다. 조커의 웃음은 울음이며, 그가 사회적 주체로서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은, 폭력의 수단인 총을 획득하는 순간이며, 누군가를 웃게 함으로써가 아니라, 누군가를 분노하게 함으로써이다. ‘해피’라는 애칭 아래에서 긍정과 웃음을 강요당했던 조커가 스스로의 주체성을 분노와 울음에서 찾았다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상징성일까. 신자유주의가 그 바닥을 보이며 허상을 드러냈던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월가의 해체를 부르짖었던 그때, 조커의 웃음은 모든 것을 해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이러한 해체 자체가 새로운 미래를 전망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을 수 있다. 하지만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불평등이 고착화되며 정치적으로 보수화되는 현재 2019년의 조커는 어떤 전망도 갖지 못한 채, 웃을 수 있는 여력도 갖지 못한 채, 울며 분노하고 있다.

 

글: 이주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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