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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 미완의 누빔점, 완성된 몽상 - 이창동의 <버닝>
[김희경의 문화톡톡] 미완의 누빔점, 완성된 몽상 - 이창동의 <버닝>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19.12.30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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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의 프리즘으로 만드는 우주의 구체(具體)

온전한 의식의 상태도, 무의식의 상태도 아닌 순간이 있다. 현실 속 이미지들이 중첩되고 미처 하지 않았던 생각들이 쏟아지듯 스쳐갈 때다. 의식의 빛을 한줌 움켜쥔 채 무의식의 어둠 속으로 서서히 빠지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이것은 현실인가 꿈인가? 경계를 가르는 것은 가능하지도, 의미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중요한 건 ‘개방’이다. 알던 세계, 그리고 잘 모르던 세계에 동시에 손을 뻗치고 자신을 확장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잠깐 청하는 낮잠 또는 충분치 않은 선잠을 자고 난 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눈을 감고 잠을 자는 상태가 아니어도 유사한 순간이 찾아온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했던 ‘깨어 있으면서 꾸는 꿈(reve eveillie)’, 즉 ‘몽상’이다. 그 순간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이뤄진다. 몽상은 이성적 의식에 편입된 ‘사색’과 감성적 무의식이 지배하는 ‘꿈’의 중간 지점에서 배양된다.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자신은 유지하고는 있지만, 평소의 자아와는 다르다. 몽상의 자아는 새로운 프리즘을 장착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찰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프리즘이다. 이를 통과한 이미지는 이미 이전의 이미지가 아니다. 한층 더 굴절되어 나타나고 새로운 배열과 조합을 시도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몽상의 프리즘을 통과한 이미지들로 체화된 공허함을 채우고 새로운 우주의 구체(具體)를 만든다. 특히 소설을 쓰려 하지만 어떤 내용도 담지 못하고 있는 종수가 그렇다. 깨어 있으면서도 꿈꾸는 그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를 태울 수 있는 불쏘시개로 삼는다. 몽상의 단계에 접어드는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이후엔 현실의 이미지들을 가득 담아낸다. 그리고 몽상의 프리즘으로 주저하지 않고 밀어넣는다. 주관적으로 배합된 이미지들을 통해 탄생한 우주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잉태하고 있다해도, 또 이를 인지하더라도 강렬하게 갈망한다. 무언가를 또렷하게 응시하게 되고, 확장된 감각과 개방된 자아를 구축했다는 자부심은 폭발적인 화력으로 나타난다. 영화는 한 청년이 만들어낸 광활한 우주를 끈질기게 톺아내며 몽상의 과정과 위력을 은유한다.

 

위태로운 누빔점, ‘없는 것이 있다’

종수의 몽상은 미완의 ‘누빔점’으로부터 시작된다. 누빔점은 두 개의 천을 접어 안팎으로 누비듯 이질적인 것을 덧대고 고정하는 순간이다. 특히 기표로부터 기의가 미끄러지지 않게 여며진 것을 이른다.

영화 초반엔 ‘있다’와 ‘없다’라는 상충된 기표와 기의가 혼재되어 누빔점을 찾을 수 없다. 종수는 우연히 만난 해미에게서 이런 혼재와 부딪히게 된다. 귤은 없는데 없음을 잊으라 하고, 고양이는 있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과거 파주 집 근처엔 우물도 있었다고 하는데 기억 속엔 없다. 영화는 이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와 ‘부존재’를 오갈 뿐 어떤 확신도 주지 않는다. 종수와 관객은 이 매혹적이면서도 답을 모르는 질문에 서서히 천착하게 된다.

그러다 유일하게 누빔점이 형성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해미의 소멸이 가져온 ‘없는 것이 있다’라는 누빔점이다. 고양이, 우물처럼 ‘있는 것이 없다’라는 테제는 성립될 수 없다. 있는 것은 실제 있어야만 하지 않은가.하지만 사라진 해미처럼 ‘없는 것이 있다’는 정확하게 성립 가능하다. 비극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테제는 그렇게 작품에서 유일하게 맞아 떨어지는 누빔점을 만들어낸다. 또 이때를 기점으로 종수는 자신만의 몽상의 프리즘을 갖고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누빔점은 어딘가 불완전해 보인다. 이 테제가 구성된 정확한 원인을 규정할 수 없어 왠지 곧 흘러내릴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종수가 몽상의 프리즘을 만드는 계기가 하필 이 위태로운 누빔점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도 관객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창동 감독의 전작인 ‘밀양’에서도 누빔점이란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밀양’에선 한 인물의 심리와 행위 간 누빔점이 자꾸만 해체된다. 남편에 아들까지 잃게 된 신애가 절대자의 있음과 없음 사이를 오가는 내용이다. 절대자가 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법한 잔인한 일들이 연속되지만 신애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게 된다. 하지만 절대자를 만나 용서를 받았다는 가해자의 말에 충격을 받고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후에 벌이는 절대자에 대한 복수는 그 존재가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감독은 <버닝>에서도 미완의 누빔점을 제시하고, 몽상의 프리즘을 만들어내는가. 미완의 누빔점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인물들을 통해 카메라는 존재와 부존재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명확해야 할 것조차 혼재되어 버린 세상을 비춘다. 이곳에서 개체들은 혼란만을 겪을 뿐 의식에 작은 빈틈을 낼 수 없다. 무의식을 끄집어내 이 빈틈에 맞춰내고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비극으로부터 기인한 미완의 상태지만, 분명한 누빔점 하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틈을 만든다. 관객들이 이 몽상의 과정이 진행될수록 더 호젓하고 고독해지는 청년과 마주하게 되는 이유다.

종수가 가진 몽상의 프리즘엔 어떤 이미지들로 채워지는가. 구체적·사실적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추상적·심리적 이미지로 변한 것들이다. 차이는 이미지에 주체의 독자적인 질서가 부여되고 그만의 언어로 기호화 됐냐는 점이다. 영화에서 종수가 소설을 한줄도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이런 심리적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살던 파주 집에 처음 갔을 때 종수의 눈이 향하는 곳은 아버지의 사진이다. 아버지는 사진 속엔 있지만 종수가 있는 공간엔 없다. 어머니는 사진에서도, 집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종수와 있는 사진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조차 종수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어른이 된 종수는 이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눈은 텅 비어 있다. 어머니의 소멸 이후 줄곧 누구도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종수가 자신만의 질서와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종수의 눈이 비어 있긴 하지만 심리적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욕구 자체는 얕게 깔려 있다. 카메라는 종수가 잠든 모습을 자주 비춘다. 그런데 깊이 잠을 자는 게 아니라 깨는 숏들이 반복된다. 원인은 일관되지 않다. 먼저 정체 모를 전화에 자주 깬다. 그런데 전화를 끊은 후 다시 잠들지 않는다. 문을 열고 나가 먼 산과 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숙면을 했던 게 아니었으며, 잠들었다 할지라도 언제든 작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강박적인 모습이다. 벤을 좇다가 호수에 멈춰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숏도 종수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는 뒤에 종수가 잠을 자다가 끙끙 앓으며 깨는 숏을 배치해 이를 암시한다.

허상의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는 반복적으로 반사체를 바라보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종수는 해미의 방에 갈 때마다 남산타워를 바라본다. 남산타워는 북향이고 좁은 해미의 방에 빛을 반사시켜준다. 그러나 이 가짜 빛조차 해미의 말대로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종수는해미와 있을 때만 가짜 빛을 보게 된다. 나머지 순간엔 오직 홀로 반사체인 남산타워만 바라보며 자위를 한다. 가짜 빛은 없음을 있음으로 둔갑한, 그러면서도 종수가 확실하게 그 둔갑을 알면서도 갈구하는 이미지다. 그렇게 남산타워라는 반사체는 이 허상의 이미지라도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종수는 남산타워를 바라볼 때마다 “없다는 것을 잊으면 있게 된다”는 해미의 말을 복기하고 있지 않았을까.


소멸-제거 대립항의 배치

해미는 종수에게 결코 작지 않은, 새로운 자극이다. 그러나 해미를 만난 것 자체만으로는 종수는 의식의 틈을 열지 못한다. 종수는 영화 초반까지 해미가 주도하는 이미지의 배열과 기호화를 따라가는 데 급급하다. 없는 것을 구체화하는 판토마임부터 삶의 의미를 구하는 ‘그레이트 헝거’ 이야기까지 해미가 그려내고 쏟아내는 이미지에 압도된다. 해미의 눈은 종수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또 그녀의 입도 몽상으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우주를 채우려는 듯 늘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해미가 노을 아래에서 추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은 이 기호화의 정점이며 그 우주를 완성하는 순간이다. 이때도 종수의 시선은 해미를 좇지만 그 우주를 온전히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종수의 몽상은 앞서 언급했듯 유일한 누빔점이 생성되는 해미의 소멸로 시작된다. ‘해미의 소멸’이 ‘벤의 파괴’라는 극적인 대립항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해미가 사라지기 전까진 벤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종수는 그를 경계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형성된 두 대립항은 종수의 머리에서 서로 갈퀴를 만들어 복잡하게 얽히고, 강렬한 충돌을 만들어 낸다. 또 그동안 보았던 사실적 이미지들을 새롭게 배열하고 조합한다. 마침내 이를 기호화 된 심리적 이미지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 사실적 이미지들도 사실은 종수가 이미 자체적으로 선별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미의 소멸 전 세 인물이 모두 모여 있을 때마다 카메라는 독특한 구도를 만들어낸다. 종수가 벤을 처음 본 것은 공항에 해미를 마중 나갔을 때다. 셋은 종수의 트럭을 타고 함께 이동하게 되는데 카메라는 종수와 벤만 한 프레임 안에 넣는다. 종수는 벤의 전화가 끝날 때까지 힐끔거리며 대화를 유심히 듣는다. 같이 있는 해미는 마치 그 공간 안에 없는 것처럼 카메라 밖에 있다. 두 번째 만남에선 종수가 배제된다. 카메라는 해미의 손금을 봐주는 벤과 이를 재밌는 듯 지켜보는 해미의 모습을 비춘다. 종수는 프레임에서 밀려나 이들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매우 한정된 환경 안에 갇혀 있던 종수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는 두 인물, 이를 극대화하는 구도를 배치해 몽상의 재료를 하나씩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별하고 있었으나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이미지는 ‘소멸’이란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기호화 된다. 해미의 소멸은 두 가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잠적’ 또는 ‘제거’다. 해미가 잠적을 한 것이라면 원인은 종수에게 있을 수 있다. 해미가 사라지기 직전 ‘창녀’에 빗대었던 것이 화근으로, 말로써 해미를 찌른 셈이 된다. 자신이 증오하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한 것과 똑같은 행위다. 이 숏은 영화의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 ’엔 없다. 감독은 왜 이 장면을 새로 만든 것일까. 종수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동시에 그의 내재된 트라우마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수 있다.

영화는 줄곧 두 가지 사건을 병치한다. 종수가 해미와 벤을 만나며 일어나는 사건, 종수가 싫어하는 아버지의 재판 사건이다. 두번째 사건은 첫번째 사건만큼의 비중으로 다뤄지진 않는다. 하지만 종수가 머무는 파주 집이란 공간의 싸늘한 공기에 담긴 의미, 종수의 내면을 오랜 시간 지배해 온 콤플렉스의 근원을 드러낸다. 종수는 벤에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말한다. 내용은 꽤 구체적이다.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아버지가 터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데, 이것 때문에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옷도 태우게 했으며 아직도 그 꿈을 꾼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해미가 종수의 언행으로 인해 잠적을 했다면, 오랜 시간 종수를 괴롭혀 온 트라우마가 극단적으로 발현돼 파행을 낳은 것이 된다.

자신이 낳고 자신을 찌르는 파행. 이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종수는 스스로를 해미의 대립항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고 오직 이를 맹목적이고 집요하게 파헤친다. 벤에 의한 ‘제거’다. 해미가 사라지기 직전 나오는 벤의 비닐하우스 이야기는 종수에게 그 가능성을 열어준다. 종수는 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이미 비닐하우스와 해미를 동일화 한다. 벤이 해미를 차를 태우고 파주를 떠날 때도 “이제 비닐 하우스 잘 살펴보겠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해미에게 날선 이야기를 한 직후에 연이어 한 이 말은 그럼에도 해미의 대립항을 자신이 아닌 벤을 대립항으로 설정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곧바로 일어난 해미의 소멸에 대해 종수는 ‘제거’에 더 큰 무게를 실으며 대립항을 구축한다.

 

‘영혼의 압력계’ 불을 움켜쥐다

영화에서 불을 주로 이야기하는 건 벤이다. 파괴 욕구, 즉 멸균화 의지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언급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불을 손에 쥐고 있는 건 늘 종수다. 벤은 말로만 불을 쥐고 있을 뿐, 카메라는 벤이 불로 어떤 행위를 하는지 담지 않는다. 왜 영화는 벤이 아닌 종수의 손에 불을 쥐어주는가.

 

오감은 순수 물질과 만나게 되면 더 활발히 작동하게 된다. 특히 선악의 얼굴을 한 불은 인간에게 강렬한 영감을 준다. 바슐라르는 불을 ‘영혼의 압력계’라고도 부른다. 이 압력에 따라 작게는 불꽃, 불줄기, 걷잡을 수 없는 불기둥으로까지 치솟는다. 영화는 이 압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불기둥을 만들고자 함, 그렇기에 종수를 주체로 삼는다. 폭발적인 위력을 뿜어낼 발화점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는 건 벤이 아닌 종수이기 때문이다.

‘페이스 조절’을 강조하는 벤은 종수를 등지고 바라보고 있던 차가운 호수와 같다. 종수도 표면적으로는 불기둥과 닮지 않았다. 작은 불꽃을 품고 있는 재에 가깝다. 하지만 이 재는 언제든 불기둥으로 치솟을 수 있는 광기의 독소를 품고 있다. 광기의 독소는 주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화력을 최대한으로 끓어올려 모든 것을 소진하게 한다. 이 창동 감독은 전작들에서도 주체들의 감춰진 독소를 끄집어내 영화 속에 각각의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어낸다. 이 독소는 때론 누군가를, 때론 스스로를 파괴하는 위력을 갖고 있다. ‘밀양’에서 가족을 모두 잃어버리고도 가해자에게 ‘용서’를 말하던 신애가 결국엔 절대자를 비웃는 행위들을 하고 스스로를 태우는 자해를 시도하는 장면도 이와 비슷하다. ‘시’에서 소녀같던 미자가 시적 언어를 통해 발화(發話)하는 법을 배운 후, 자신이 지키고 있던 세상을 발화(發火)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기차 선로 위를 미친 듯이 올라가 “나 돌아갈래 ”를 외치며 다가오는 거대한 기차에 몸을 던지는 ‘박하사탕’은 어떤 불기둥보다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버닝>에서 종수가 처음 불을 쥐는 건 벤에게서 비닐하우스 얘기를 들은 직후에 꾼 꿈 속에서다. 종수는 벤에게 어머니의 옷을 태웠던 기억이 아직도 꿈에서 반복된다고 했다. 이번 꿈에선 어린 시절의 모습은 똑같이 하고 있는데 타고 있는 대상이 비닐하우스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어린 종수는 불기둥을 응시하며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어머니의 옷을 태울 때 힘들어 했을 실제 어린 종수와는 분명 다른 모습일 것이다. 종수는 비닐하우스와 해미를 동일하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미소를 보인 것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해미의 소멸을 암시하는 꿈임에도 자신의 추론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 듯한 모습이다. 어쩌면 종수의 무의식엔 이 몽상이 해미의 소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꿈에서 깬 종수는 마을 곳곳의 비닐하우스를 돌아다니며 태워진 것이 없는지 확인한다. 꿈에서의 확신을 현실으로 끌고 와 배가시키는 것을 암시하는 숏의 배치다.

이 꿈을 꾸고 난 후 카메라는 종수의 눈을 유유히 따라간다. 꿈인지 현실인지, 의식인지 무의식인지 경계를 짓지 않은 채 그 몽상의 흐름을 담는다. 특별히 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더라도 종수가 불을 쥔 순간부터 영혼의 압력은 멈추지 않고 상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의 눈은 거대한 태양에 못지 않은 강력한 불쏘시개가 되지 않겠는가.

 

오류를 품은 몽상은 곧 우주가 된다

종수의 불이 보다 강한 화력을 가질 수 있는 건 ‘오류’의 가능성을 품고 있어서다. 관객들은 해미의 소멸 이후 마지막 순간까지 벤에 대한 의심의 뒷편에서 종수가 하는 몽상의 오류를 떠올리게 된다. 블레즈 파스칼은 “상상은 오류와 과오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종수의 몽상은 태초에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오류는 본디 ‘호전성’을 갖고 있다. 오류는 스스로 오류이지 않기 위한 근거를 찾는다. 그런데 그 근거의 산은 진실의 근거로 쌓는 산보다 더 빠르고 높게 쌓인다. 자신에게 유리한 이미지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강하게 배척하게 된다. 물론 종수의 몽상이 어떤 단계에서 어느 정도의 크기로 오류를 품고 있는지는 가늠할 수 없고, 영화는 이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벤을 뒤쫓아간 미술관에서 유독 커다란 불 그림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거나, 벤이 해미를 얘기할 때나 해미와 비슷한 여성이 얘기할 때 하품하는 걸 눈여겨보는 숏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종수가 호전성을 띤 근거의 산을 높이 쌓고 있음을 말이다.

오류의 가능성은 벤이 종수의 심연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인물이란 점에서도 높아질 수 있다. 우선 두 인물의 집과 차로 알 수 있는 빈부 격차가 분노의 저변에 깔린다. 이 분노가 영화가 그려내는 갈등의 중심축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종수가 가진 콤플레스의 표면만을 보여준다. 벤이 종수를 자극하고 있는 것은 더 큰 콤플렉스다. 소설가를 지망하지만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벤은 종수를 만날 때마다 소설에 대해 묻는다. 어떤 소설 좋아하냐, 소설 쓰고 있냐, 어떤 소설을 쓰냐 등이다. 이는 종수에겐 그의 우주는 채워지고 있는건지, 무엇으로 채워질 것인지를 묻는 질문과 동일하다. 종수가 해미에게 벤이 특별한 직업을 갖고 있지 않음을 꼬집는 장면은 이 콤플렉스를 반영한다. ‘위대한 개츠비’로 벤을 명명하기 때문에 단순히 물질적인 요소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벤이 완성한 것으로 보이는 우주 또한 허상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비꼬는 이야기다.

‘소설’이란 형태의 종수만의 우주의 구체는 벤의 우주가 허상임을 확신하면서 쓰여지기 시작한다. 벤이 해미를 제거했다고 자신하는 순간이다. 종수는 이 확신과 동시에 해미의 방에서 노트북을 열고 뭔가를 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노트북 모니터를 비추진 않는다. 그렇기에 소설을 쓰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순 없다. 하지만 몽상의 결과가 낳은 확신이 그만의 우주를 만들어 냈음을 추론할 수 있다. 항상 창밖을 바라보던 종수를 담던 카메라가 반대로 창밖에서 노트북에 시선을 보내고 있는 종수를 비추는 것도 이를 암시한다. 가짜 빛을 보내던 반사체 남산타워가 이젠 종수를 바라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감춰져 있던 광기의 독소, 오류의 가능성을 품은 몽상이 지핀 불기둥은 그렇게 벤을 향한다. 살인의 장면은 원작에 없다. 그런데 영화는 종수가 벤을 칼로 찌르고 불을 지른 후, 다시 자신의 트럭을 타고 떠나는 것까지 끈질기게 담아낸다. 카메라가 마지막으로 비추는 것은 트럭을 몰고 떠나면서도 치솟는 불기둥을 힐끔 보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불기둥이 태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해미를 제거한 것으로 추정하는 벤, 벤이 타고 있던 부유의 상징인 외제차, 그리고 종수가 입던 옷이다. 종수는 아예 옷을 다 차 안에 밀어넣고 알몸이 되어 트럭으로 돌아온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라고만 치부하기엔 몸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몽상이 만들어낸 광활한 우주는 그렇게 태초의 순간, 태초의 상태로까지 주체를 소진시키며 완성된다.

 

영화에서 종수만의 우주 구체가 형성되는 동안 관객들은 수많은 메타포와 마주하게 된다. 심지어 영화에서 ‘메타포’라는 용어를 직접 언급할 정도로 울창한 메타포의 숲이 형성된다. 누군가는 이를 메타포의 과잉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이 정말 원했던 것이 관객들이 각각의 메타포를 해석하고 천착하는 것이었을까.

벤이 메타포에 대해 얘기하자 해미는 그게 뭐냐고 묻는다. 그러자 벤은 메타포는 종수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종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그저 화장실을 찾는다. 메타포의 숲 한가운데 놓여있는 세 인물이지만, 정작 메타포가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창동 감독의 전작을 통해서도 관객들은 메타포와 자주 마주했다. 그러나 <버닝>에서럼 메타포 해석에 영화는 아무런 정답을 두지 않는다. 어쩌면 그 정답을 내리는 것을 경멸하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는 자신을 찌르는, 지극히 개인적인 푼크툼을 발견하게 할 뿐이다. 그 푼크툼에서 배양된 몽상이 비록 오류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관객들이 내릴 영화적 답변은 그저 각각의 몽상의 프리즘으로 공허를 채우고 자신만의 우주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

 

글: 김희경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정책 및 기획 전공 박사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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