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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대중서사와 판타지(2) - 왜 ‘부산행’은 맞고, ‘서울역’은 틀리는가?
[기획연재] 대중서사와 판타지(2) - 왜 ‘부산행’은 맞고, ‘서울역’은 틀리는가?
  • 김청강 l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조교수
  • 승인 2019.12.31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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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이제 영화관에서만 영화를 보지 않는다. 올해 초 오스카상의 3개 부분을 석권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넷플릭스로만 배급됐다. 이에 할리우드 영화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는 “넷플릭스 같은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배급되는 영화는 영화 발전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마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던 마틴 스콜세지도 자신의 영화 <아이리쉬맨>은 극장과 넷플릭스 동시 개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화는 핸드폰의 작은 화면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하여 빈축을 산 바 있다. 영화관과 뉴미디어 플랫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영화인들의 현주소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다. 봉준호의 <옥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제작됐고, 간편하게 IPTV나 태블릿, PC, 모바일로 영화를 보는 것은 이미 일상이 됐다. 모바일로 웹툰, 웹 소설, 게임을 하고, 같은 기기로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웹툰과 영화를 시차를 두고 공개하는 네이버의 슈퍼스트링 프로젝트, 다음카카오, 아마존 프라임, OSMU(One Source Multi-Use) 마케팅 전략 등등. 이제 영화를 영화만 떼어놓고 논의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됐다. 

 

이렇듯 급속하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가운데, 한국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단연 판타스틱 장르 영화 성장이다. 2006년 <괴물>의 천만 관객 돌파 이후 몇몇 판타지 영화의 흥행 실험 끝에 2013년을 기점으로 판타스틱 장르의 양은 급증하였다. 2016년 천만 관객을 돌파한 <부산행>, 2017, 2018년도에 ‘쌍 천만 관객’ 신화를 만들어낸 <신과 함께> 모두 판타스틱 장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들이다. 그리고 이 장르들 모두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의 성장과 맞물려 태어났다. 궁금하다. 미디어 플랫폼이 교차하는 이 시대에 왜 관객은 ‘판타지’를 보게 되는가?

 

핵심은 기술!

문자를 통해 독자 개개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학과는 달리 영화에서의 판타지는 특정한 ‘비주얼’을 요구한다. 서사가 아무리 탄탄한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어도, 영화에서는 이것이 시각적으로 구현돼야 한다. 그리고 ‘비주얼 구현’의 핵심은 디지털 기술에 있다. 한국에서 디지털 기술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인데, 흔히 DI(digital intermediation)로 불리는 기술을 통해 새로운 판타스틱 장르 영화의 세계를 열 수 있었다. 1990년대 <은행나무 침대>(1996), <여고괴담 1>(1998), <퇴마록>(1998)과 같은 판타스틱 장르의 영화가 크게 흥행할 수 있었던 것도 디지털과 CG의 사용을 통해 구현된 새로운 비주얼의 공로가 크다. 이후 2006년 <괴물>의 천만 돌파와 2007년의 <디워>는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대형 판타지 영화’가 가능하리라는 것을 예측했다. 약 10년 후, 2016년 CG를 대량으로 사용한 좀비물인 <부산행>, <신과 함께>의 ‘디지털 비주얼’은 영화의 승패를 가르는데 핵심적으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괴물> 이후 ‘디지털 크리처’가 등장하여 액팅을 한다는 점은 판타지 장르의 큰 특징이 됐다. 영화 <옥자>에는 슈퍼 돼지가, <부산행>에는 겹겹이 겹쳐지는 좀비들이, <신과 함께>에는 다양한 디지털 크리처가 대량으로 등장한다. <신과 함께>의 경우 CG와 시각 특수효과(VFX)가 들어간 숏은 2,200개에 전체 숏의 88%를 이루고 트랜지션에 쓰인 숏까지 포함한다면 전체 영화의 90%에 달했다고 한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기술’로 만들어진 디지털 크리처들은 이를 물리치는 저승사자들의 대결이 생동감을 더하며 판타지의 ‘비주얼’을 구현한다. 심하게 말하면 내용에 상관없이 비주얼만으로도 영화에서 판타지는 얼마든지 구현된다. 

마틴 스콜세지가 “마블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바와 같이, VFX로 무장한 <부산행>이나 <신과 함께>에 영화로서의 가치를 폄하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전 지구적으로 생존의 기로에 선 업자들은 비슷한 선택을 한다. 예술이건 아니건 영화인의 산업적 선택에 누가 돌팔매질을 할 수 있으랴. 판타지 영화의 핵심은 기술인 것을!

 

영화-엔터테인먼트-글로벌

물론 기술만이 문제는 아니다. 영화의 성공에는 기획과 자본이 뒷받침된 영화의 ‘보편-엔터테인먼트화 작업’이 자리한다. 예를 들어 <신과 함께>의 경우 영화는 게임의 비주얼과 서사 방식을 적극 차용한다. RPG 게임과 같은 방식으로 세 명의 저승차사를 플레이어로 설정된다. 이들이 데리고 가는 김자홍, 김수홍 두 형제는 이승의 스토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뿐, 플레이어는 차사 3명이 된다. 관객은 3명의 플레이어와 함께 총 7개의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각각의 관문을 지나기 위해서는 무죄를 입증하는 퀘스트를 수행해야 하며, 이러한 퀘스트가 성공할 때 다음 관문으로 나아가게 된다. 2017년에 개봉한 <신과 함께-인과 연>이 총 7개의 관문의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보여준다면, 2018년 개봉한 <신과 함께-죄와 벌>을 본 관객들은 이러한 퀘스트를 반복하는 게임적 효과를 얻게 된다. 이제 영화 <신과 함께>를 본 관객은 게임 <신과 함께>를 어렵지 않게 선택할 것이다. 

<부산행>도 한국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영화라기보다 한국 배우를 차용한 잘 만든 보편적 좀비 영화에 가깝다. 관객들은 왜 좀비가 나타났는지, 왜 좀비에게 쫓기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영화 초반 5분에 갑자기 등장한 좀비에게 쫓기기 시작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과 같이 쫓긴다. 이렇게 좀비물에 익숙해진 관객은 IPTV에서 <창궐>이나 <킹덤> 같은 한국 좀비 영화, 혹은 넷플릭스가 추천하는 각국의 다양한 좀비물을 볼 것이다. 한국에서의 성공 이후 <부산행>과 <신과 함께>가 아시아에서 대성공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예시하듯이, 판타지 영화의 성공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보편성 확보와 글로벌 마켓에서의 유통일 것이다. 여기에 ‘한국적 판타지’를 논의하기는 힘들다.

 

<부산행>은 맞고, <서울역>은 틀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얘기해야겠다. 기술력과 자본으로 무장한 판타지 영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판타스틱 장르로 알려진 공포, SF, 판타지 장르는 환영받지 못했다. 식민지-전쟁-분단-냉전 등의 “환상성이 살아남기에는 너무나도 척박한” 시공간을 지니고 있었던 한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르였고, 인기가 있어도 마니아 문화로 그쳤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의 판타지물의 특징은 그 중심이 괴물, 보여서는 안 될 것들이 출몰하는 2차 세계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 즉, 관객이 속한 1차 세계다. <신과 함께>의 주인공은 억울하게 죽은 군인, 살 곳을 잃은 철거민, 인연을 끊은 가족들이며, <부산행>은 매정한 증권사 직원인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현실에 존재하지만 현실에 있음을 인정하기 싫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관계들. 영화에는 이런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판타지랄 것이 (요즘 말로) 1도 없는 상황들 말이다.

화려한 기술과 자본이 뒷받침하여 만들어낸, 천만이 즐겨 본 한국의 판타지 영화가 이런 로우 판타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기이한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판타지 영화는 두 길을 동시에 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허깨비가 출몰하는 로우 판타지와, CG가 만들어낸 환상이 그려내는 하이 판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길에서 판타지 서사는 봉합 불가한 것을 봉합한다. 철거반이 들이닥쳐 언제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을 밀어버릴지 모르는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결국 마동석과 같은 슈퍼히어로를 만나 “나쁜 사람은 없어. 상황이 나쁠 뿐이지”라는 착한 마음을 얻게 된다는 <신과 함께>의 결말과 같은 것 말이다. <부산행>에서는 윤리를 무시한 채 증권을 판 ‘자본주의적 선택’ 때문에 그렇게 좀비에 쫓겼으면서도, <신과 함께>에서 ‘펀드 상승’은 모든 불행한 상황을 리셋 시킨다. 

어쩌면 모든 영화적 형식을 떠나서 “나쁜 상황은 로또로 극복된다”와 같은 서사가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자본주의적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좀비에 맞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일이라도 감당하는 아버지 서사, <부산행>은 맞고, 성매매 여성을 착취하는 ‘아빠’가 등장하는 <서울역>은 틀리다. 그곳에는 나쁜 상황을 구원할 판타지가 들어설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글·김청강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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