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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느슨한 연대-감정에서 시작하고 감정에서 끝난다
[장윤미의 문화톡톡] 느슨한 연대-감정에서 시작하고 감정에서 끝난다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0.01.0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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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트렌드를 예상하고 분석하는 책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키워드는 바로 느슨한 연대다. 트렌드 분석과 전망 관련 서적 중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리고 있는 『트렌트 코리아 2020』, 빅데이터를 통해 트렌드를 전망한 2020 트렌드 노트의 경우 다양한 문화 현상의 하나로 ‘느슨한 연대’를 꼽고 있으며,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의 경우 ‘느슨한 연대’라는 개념을 트렌드 중 하나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트렌트가 만들어지는 토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 착안하여 책 제목 자체를 라이프 트렌드: 느슨한 연대로 하여 ‘느슨한 연대’라는 용어를 일종의 화두처럼 내세우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 느슨한 연대라는 개념이 단지 동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호명되는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적용 활용되며 생활 방식과 생각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촉매제가 되는 동시에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대안적 문화의 토대로 정착할 것이라는 전망은 어렵지 않다.

 

김용섭, 『라이프 트렌드: 느슨한 연대』
김용섭, 『라이프 트렌드: 느슨한 연대』

사실 ‘느슨한 연대’라는 용어는 느닷없이 등장한 유행어가 아니다. 이 표현은 1990년대 후반 정치경제권에서 기존 협력 시스템이나 제도가 지닌 물리적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대안적 방식 혹은 참여 형태를 제안하는 방법의 하나로 쓰였다. 그런데 연대라는 명사에는 ‘굳게 뭉쳐진’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느슨하다’라는 형용사와의 조합 사이에는 심리적/물리적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느슨함과 연대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 지금처럼 나란히 묶여 하나의 개념으로 사용되기보다 워딩 하는 사람의 입장과 태도, 그리고 콘텍스트(context)에 따라 나란히 쓰이기도, 나뉘어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특히 2~3년 전을 기점으로 하여 ‘느슨한 연대’는 하나의 개념으로 정착되어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변화하고 있는 문화 현상의 전반을 설명하는 데 두루 사용되고 있다.

‘끈끈한 연대’의 주어가 ‘우리’였다면 ‘느슨한 연대’의 주어는 ‘개인’이다. 끈끈한 연대의 암묵적 조건은 ‘대의를 위한 나의 희생’이라면 느슨한 연대는 ‘훼손되지 않는 나의 감정’이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소속된 연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그러한 행동을 함부로 배신이나 배반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그의 선택은 언제든지 나의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떠한 선택이든 기꺼이 존중해준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취향과 목적에 따라 개인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의 개수는 무한대다. 또한 최종적으로 취향이 바뀌거나 목적을 달성하면 공동체는 쿨하게 해산한다.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만큼이나 탈퇴하는 것 역시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나의 스타일과 맞지 않다고 느끼거나, 나의 신념에 보다 더욱 최적화된 공동체를 찾았다면 가입과 탈퇴를 오가도 무방하다.

그런데 탈퇴를 결심하게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 공동체가 나에게 원치 않는 감정 노동을 요구할 때이다. 아무리 추구하는 목표가 같고 비슷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과 극명하게 달라 부담을 느끼거나 대의라는 명분으로 내게 무리한 감정 노동을 지속적으로 요구 ‘당’하는 순간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사라진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연결되지 않은 덕분에 나와 맞지 않는 생각에 동의할 필요도 없고 눈밖에 날까 봐 할 말을 참지 않아도 된다. 의리가 없어서도, 신뢰성이 낮아서도 아니다. 다만 추구하는 생활 방식이자 일상을 꾸려나가는 태도 정도로 해석하면 충분하다.

이 정도 수준에 이르면 지속 가능한 공동체는 고사하고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가 소멸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높아질 것이고, 각자도생이 일상화된 상태에서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자는 점점 증가하여 결국 우리 사회를 분열의 상태로 이끌 것이라는 우려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공동체는 수십 개씩 만들어지고 있으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간적 제한을 가리지 않으며 양적/질적 팽창을 이루고 있다. 바로  느슨한 연대라는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밀레니얼 세대는 물론 그 앞의 세대들까지도 매혹하는 느슨한 연대의 강력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건 바로 그 연대 안에서 개인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 혹은 태도 표출의 스팩트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 지 모른다.’라는 ‘상상의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관계에 있어서 강력한 자기 검열 혹은 자기반성의 근거로 작용한다. 이 말은 때때로 ‘저주’로도 인식되어 좋은 게 좋은 거고, 내가 한번 참으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말로 실체 없는 이 두려움을 도덕적 관념으로 억압한다. 그러나 느슨한 연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동체는 적어도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존중한다. 때로 그 불편함을 표현하는 방식이 타인이 불쾌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나와 다른 의견  제시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가 선택한 연대에 대한 공식적인 예의다.

분명한 것은 느슨한 연대는 개인이 공동체에 귀속된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 공동체를 수용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태도이며 이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곧 감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곧 ‘불편’과 ‘예민’ 두 가지로 대표된다.

 

불편(함을 참지 않기)

듣기 싫은 것 중 하나는 나에게 유익하지 않은 TMI(Too Much Information)다. 궁금하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개인사를 늘어놓는 건 꼰대고, 쓸데없이 개인사를 캐묻는 건 오지라퍼다. 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내 의지를 묻지 않고 내 감정을 노동화하기 때문이다. 원데이 클래스, 취향 모임, 독서 모임 등이 유래 없이 활성화되는 이유는 그 안에서는 개인사를 묻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취향으로 연결된 모임은 원치 않는 감정 노동을 할 필요도, 요구하지도 않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감정 노동을 하지 않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이른바 뒷담화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부재하다는 데 있다. 저마다의 개인사를 모르니 '나-너-그'의 관계에서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어렵다. 공통 분모가 없으니 학연, 지연, 개인적 정보(성격, 지위, 직업) 등이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공동체를 강하게 연결하고 또 쉽게 분열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것은 뒷담화다. 뒷담화는 비밀과 치부를 영양분 삼아 커진다. 뒷담화의 분위기가 견고하게 형성된 곳에서 그것을 거부하려면 '미움받을 용기'는 필수 옵션이다.

 

미내플, 『기운 빼앗는 사람, 내 인생에서 빼버리세요』
미내플, 『기운 빼앗는 사람, 내 인생에서 빼버리세요』

개인은 뒷담화의 표적이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적을 만드는 건 쉽지만 적이 되는 건 두렵다. 차라리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이 훨씬 편하다. 나를 아무도 모르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 보지 않고 해도 되고 평소보다 더 솔직해져도 상관없다. 이 공동체에서 나의 치부는 들킬까 봐 숨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치유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나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람들과는 어쩔 수 없이 나의 본심을 숨겨야 할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많다. 친밀함을 깨지 않기 위해서, 이탈당하지 않기 위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서. 그러나 불편함을 숨기거나 그것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성장하지 못한다.

 

예민(함을 드러내기)

‘예민하다’라는 말은 긍정보다 부정의 뉘앙스가 좀 더 강하다. 예민하다는 ‘유난스럽다’의 유의어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예민하다’는 ‘유난스럽다’가 지닌 부정적 의미로부터 탈각한 대신 ‘섬세하다’, 또는 ‘세심하다’와 같은 긍정적 의미가 부가되면서 어떤 대상에  대해 수용의 정도, 혹은 태도를 설명할 때 쓰인다.

소속된 집단에서 스스로 자신을 예민하다고 선언하게 되면 좋게는 ‘자발적 아싸’로, 나쁘게는 ‘왕따’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 집단은 소수를 이해할 만큼의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 역시 이러한 상황을 겸허히 수용하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나의 예민함을 드러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 현명한 행동은 나의 예민함을 공동체에 알리지 않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민함을 참는 것이다. 그러나 참는 것보다 더 심각한 건 집단이 요구하는 것들에 대해 무비판적 수용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예민함을 느껴야 하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다.

그러나 나의 의지로 선택한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은 나의 예민함을 스스로 인지하고 또 타인에게 당당히 알리는 것이다. 이 예민함이 존중될 때 나-너-그 모두 수평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나의 예민함을 인지하는 것은 나라는 개인을 인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2020 트렌드 노트에서 예민한 사람들이 원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나를 침범하지 않을 것, 나의 즐거움을 헤치지 않을 것,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할 것."[1] 이 세 가지는 나와 공동체를 모두 지킬 수 있는 가장 명확하고도 중요한 원칙이다. 이 원칙 중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다고 느끼면 언제든지 공동체에서 탈퇴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예민함을 지키는 것이다. 단 자신은 예민하고 자유로운 영혼임을 선언하면서 타인에게는 공동체 존립을 강조하며 예민을 유난으로 돌리는 행동은 강퇴감이다.

 

웹드라마,『좀 예민해도 괜찮아』시즌2
웹드라마,『좀 예민해도 괜찮아』시즌2

‘나’는 유난스럽지도 은밀하지도 않다. 다만 예민할 뿐이다. 기존의 방식으로 묶인 공동체에서 나의 예민함이란 인지되어서도 안되고 인지한다고 해도 숨기거나 참아야 했었다면 내가 선택한 공동체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의 예민함을 인지하면 인지할수록 나의 일상은 훨씬 풍부해지고 즐거워진다. 예민할수록 감정과 태도는 세분화되고, 이것이 세분화될수록 내 취향은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취향은 자기만족으로 끝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고 공유되고 싶다. 결과적으로 인정 욕구와 공유 본능은 공동체를 필연적으로 소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존하는 한 연대한다

인간에게 연대는 생존이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충성도에 따라 부여받은 것들로 나의 생존은 증명되었다(회사에서는 직급, 횟수에 따라 연봉을 올려받거나 승진을 하거나, 지위에 맞는 공간을 보장해주는 방식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일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제안들이 달콤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것만큼, 또는 이것보다 중요한 건 내 감정을 값어치 없는 노동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내 감정을 훼손당하거나 부당한 힘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동체의 유익을 명분으로 내 감정을 훼손하는 일련의 행위는 더 이상 (참는다고) 복이 오게 만들어주는 마법이 되지도, (버틴다고) 승리를 안겨주지도 않는다. 다만 폭력 그 자체일 뿐이다. 이전에는 이를  폭력이라 부르는 대신 적응력이라는 말로 대체되어 사사화되었지만, 이제는 적어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나 공감대가 공론화된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공론화된다고 좋은 것도, 모든 문제들이 완벽하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공동체 내에서 나는 이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선언할 수 있고,  ‘유난떤다'는 반응 대신 ‘예민하다'로 섬세화, 세밀화 하여 수용해주는 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유의미하다.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이상을 버리지 않는 한 나와 타인과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관계 속에서 오는 안락함과 유대감, 그리고 성취감은 개인은 성장하게 만드는 최고의 촉진제이자 영양제이기 때문이다. 이기주의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공동체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와해시킬 수 있는 요소를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느슨한 연대는 지금보다 더 활성화될 것이고 다양화될 것이다. 따라서 느슨한 연대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나만 된다'는 이기주의의 발현이 아니라 '누구도 된다'는 공동체 의식을 탑재해야만 할 것이다. 느슨한 연대는 단지 특정한 시대 또는 특정한 세대에서 선호되는 트렌드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느슨한 연대는 앞으로 우리 사회를 유지 지탱해 왔던 끈끈한 연대의 판을 완전히 전복시킬 지도 모른다.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택'당'할 수 있다는 고문을 희망 삼아 불편을 말하지 못하고 예민함을 유난스러움으로 판단 당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거기서 '나'라는 개인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선될 수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나의 일부가 아니라 곧 나다. 나의 감정을 헤치지 안 되, 타인을 지옥이라 여기지 않으면서 우리는 충분히 연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매듭의 강도를 규정하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건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묶일 수 있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 끈끈한 혈연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느슨한 연대라도 맺을 방법을 찾아주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다. [2]

 

참고문헌

[1]염한결 외, 2020 트렌드 노트, 북스톤.

[2]김난도 외, 이프 트렌드 2020: 느슨한 연대, 미래의 창.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글: 장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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