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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의 문화톡톡] ‘자낳괴’와 그 소비자들
[이은지의 문화톡톡] ‘자낳괴’와 그 소비자들
  • 이은지(문화평론가)
  • 승인 2020.01.0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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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 × 소비자본주의사회의 창조적 만남

개그맨 유병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창조의 밤> 코너에 홀연히 나타난 인물 ‘카피추’는 그야말로 돌풍에 가까운 인기를 얻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표절제로’를 내건 코너에서 그가 소개한 ‘자작곡’들은 한국대중문화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봄직한 노래들을 태연하게 표절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노래한 김범수의 <보고 싶다>는 사랑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노래한 <보고 싶다고 다 볼 수 있다면 이별 없는 세상이겠죠>로, 정숙한 동시에 순정한 여성의 이미지를 표상하고 있는 장윤정의 <어머나>는 ‘나이스’하게 부킹하고 헤어지는 유부녀가 등장하는 <어머나이스>로 둔갑하는 식이다.

 

 

이처럼 원곡에는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뒤집힌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그야말로 ‘창조적’인 표절에 사람들은 열광하였다. 분명 순수 창작곡이라고 했음에도 묘하게 익숙한 멜로디에, 갖은 기교를 덧붙여 어딘가 변주된 새로운 멜로디는 원곡과의 유사성과 차이를 동시에 발생시키며 웃음을 유발한다. 각종 창작물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원곡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원곡을 노골적으로 가져다 쓰되, 다른 방식으로 변주하기에 저작권을 물을 수도 따질 수도 없는 애매한 위치에 그의 노래들은 자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카피추가 일관하는 ‘욕심이 없는 남자’라는 설정 또한 웃음을 유발한다. 세속을 철저히 등지고 산에 사는 자연인이라지만, (자연인이어서 은행계좌가 없기에) 출연료 명목으로 제시된 물품 중에서 집된장 대신 맥북을 선택하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자랑한다. <창조의 밤>이 인기를 끌자 손수 유튜브 계정을 만들고 광고 영상을 올리는 기민함을 발휘한다. 항상 자기 소개로 내세우는, 자신은 욕심 따위 없다는 주장은 그것이 거짓임을 어린아이도 알 정도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기에 누구든지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이윤 추구를 중심으로 빈틈없이 구축된 세계에서 물욕이 없이 살기란 도저히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피추의 말대로 그가 자연인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자연이란 자본주의가 장악한 사회의 믿음을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의미에서의 제2의 자연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고 싶은 일에 전심을 다해 몰두하다보면 종종 그것이 어느 날 마법처럼 환금성을 갖게 되는 성덕의 판타지를 다들 갖고 있는 오늘날이다. 인기 유튜버나 SNS 인플루언서가 되면 순전히 좋아서 시작한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일들의 보상이 언젠가 어디선가 황금동전이 되어 하늘에서 반짝이며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동화 같은 상상을 사람들은 은밀하게 품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이러한 심리가 자연이자 본성이 된 세계에서 카피추는 분명 자연인이다.

 

광고가 더는 기만적이지 않은 세계

<창조의 밤>이 대박을 터뜨린 뒤에 다시금 진행된 <창조의 밤>은 놀랍게도, 혹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영상 전체가 한편의 광고였다. 오히려 놀라운 점은 그 영상이 누가 봐도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기다는 데서 찾을 수 있으리라. 나영석 사단에서 제작되는 예능의 최근 흐름이 보여주듯이, 광고는 더 이상 영상창작물에 불쑥 끼어들어 불쾌감을 유발하는 이물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능이 되어가고 있다.

광고는 산업화 이후 대량생산체제에서 잉여로 생산되는 상품에 대한 수요를 인위적으로 창출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서 고안된 심리 조작 장치이다. 광고는 태생적으로 현실의 욕구를 조작하기 위해 도입된 기만적 수단이다. 이러한 광고가 텔레비전을 통해 송출되면서 그 기만적 성격은 보다 증폭된다. 파편적 이미지들이 점멸하며 연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텔레비전 앞에서 인간의 뇌가 비판적 사고를 상실한다는 것은 알려진지 오래된 사실이다. 텔레비전 광고는 사람들의 욕구를 조작하여 대량생산체제에 적합한 생활방식을 고수하도록 성공적으로 인도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마저도 거실에 벽난로가 놓여 있던 자리를 텔레비전이 막 탈환했던 과거에나 가능했을 낡은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광고의 기만성에 대한 논의는 미디어 영상물이 유사 자연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시절의 순진한 근대인들을 꾀어내는 요사스러운 장치로 광고를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날로그가 과거의 유물이 되고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지금, 스마트폰을 쥐고 태어나다시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그러한 도식마저도 순진할 따름이다. 광고의 기만성은 어디까지나 잉여로서의 소비재가 결코 잉여가 아니라는 환상을 부여하는 한에서 주어진 특성이었던 바, 그 환상이 오롯이 현실의 자리를 차지한 오늘날의 광고는 더 이상 기만적이지 않다. 소비는 곧 삶이 되었고 소비를 장려하는 광고는 공기처럼 우리의 주변에 상존한다. 그리고 마침내 광고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는 즐거운 소비재가 되었다.

 

그냥 형이 잘 됐으면 좋겠어, 라지만…

개인 콘텐츠의 조회수와 구독자수 등이 곧장 수익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향유하는 경험이 일상화되면서, 수익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광고에 대한 거부감은 보다 줄어들었다. 내가 애정하는 인기 유튜버가 계속 활동할 수만 있다면 그의 콘텐츠에 포함된 광고를 건너뛰지 않고 보는 수고쯤이야 대수롭지 않다. 굳이 광고를 보고 싶지 않다면 프리미엄 회원의 형태로 광고비를 지불하면 된다. 즉 광고를 보는 시간과 수고를 대가로 지불하는 대신에 광고가 없는 환경을 구매하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아프리카 TV의 별풍선과 같은 온라인 후원 문화는 광고를 매개하지 않고 후원금을 통해 크리에이터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수익을 만들어주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화 사회에서는 대량생산되는 상품들이 소비되고 처분되어야 할 잉여였다면, 오늘날에는 자신의 기호를 충족시켜주는 콘텐츠 자영업자들의 생존과 성공이 그러한 잉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본의 영속을 위해 생산된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노동하는 악순환 속에 발생하는 또 다른 차원의 잉여, 즉 소비에 강제로 정향된 욕구를 충족해도 끝내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위로해주는 지극히 쓸모없고 ‘개취저(개인취향저격)’하는 영상물들이야말로 소비자본주의사회의 하수처리장치로서 활발히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첨단의 장치가 갖는 순기능이라면 노동-소비의 굴레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하여금 그 굴레에서 충족되지 않는 잉여의 욕구를 각자의 취향에 맞게 해소시켜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과거보다는 덜 폭력적이고 좀 더 다원화된, 즉 매끈하게 포장된 지옥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장치의 부역자들인 크리에이터들이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도록 쏴주는 후원금이 단지 (후원자 개개인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할) 보다 큰 규모의 소비에 탕진할 쌈짓돈이 되고, 그들이 이른바 ‘FLEX’라는 것을 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족하는 또 다른 창조적인 하수처리과정이 창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본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그 어떤 새로움도 본질적으로는 예전과 동일한 낡음을 산출할 뿐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윤을 창출할 수만 있다면 물불 가리지 않는 이 시대의 ‘자낳괴(자본이 낳은 괴물)’들을 애정 있게 지켜보고 또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자기연민을 동반하는 크나큰 유희임은 분명하지만, 자낳괴가 낳을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자낳괴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경험이다.

 

사진출처 : 유튜브

 

글: 이은지

문학평론가. 2014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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