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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위안 이상의 판타지, ‘루왁인간’
[양근애의 문화톡톡] 위안 이상의 판타지, ‘루왁인간’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0.01.20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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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이라는 게……야속한거지.”

볼리비아산 원두를 수입해오는 도중 컨테이너 폭발 사고로 50톤의 원두를 바다에 빠뜨려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 정차식. 텔레비전 드라마 <루왁인간>은 만년부장 정차식이 회사 사무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기보다 두 살 어린 상무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중소기업부터 시작한 ‘대룡코퍼레이션’에서 근무한 시간이 자그마치 35년이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펫차식’, ‘폐차식’이라는 모멸에 찬 별명뿐이다. 고졸 출신으로 IMF 때도 버틴 그였지만 엑셀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눈도 침침한 그를 후배 직원들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계약 해지를 알리기 위해 직접 거래처 공장을 방문하는 정차식과 달리 후배 직원은 이메일로 계약 만료를 통보 해놓고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며 이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사원들의 힘으로 훌쩍 큰 회사는 이제 손톱깎이나 면봉을 파는 일이 어울리지 않지만 정차식은 이메일로 통보한 직원의 행동이 ‘쪽팔리다’고 일갈할 줄 아는 인물이다. 지금 시스템에 맞는 능력이 부족할지는 모르지만 인간적인 예의를 효율보다 앞세우는 정차식의 모습은 무능하고 늙은 가장에 대해 값싼 동정을 거두게 한다. 그에게는 열심히 일해 온 직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계약 해지를 알리러 온 차식을 탓하는 대신 시대의 흐름이 야속하다고 말하는 공장 사모의 말은 그래서 더 씁쓸하다. 빠르게, 효율적으로, 다수에게 이익인 방식으로 세상이 변화하는 동안 우리는 진짜 괜찮아진 것일까.

 

<루왁인간>은 촘촘한 이야기 결을 가지고 있다. 혈기와 열정으로 회사에 몸 바친 과거부터 희망퇴직자가 되어버린 나이든 모습을 비추는 현재까지 정차식이 살아온 세월을 상기하는 방식이 섬세하다. 입사 초기에는 갓 등장한 신인 신해철을 좋아하는 청년이었으나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BTS마저도 낯설고, 그땐 몇 마디 영어를 용기 있게 하기만 해도 고졸 학력을 상쇄하고 남았지만 이젠 고졸 출신이 만년 부장의 이유가 되어버렸다. 임플란트 비용을 아끼느라 총각김치를 빨아 먹다시피하는 정숙은 인색한 아내나 엄마가 아니라 차식의 마지막 출근날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쓰다듬을 줄 아는 사람으로 나온다.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치킨집을 차린 정식과 싱글로 노모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영석 등 전형에 갇히지 않는 인물이 서로를 보듬는 장면도 과장 없이 따뜻하다. 갑질하는 상무가 잘리고 몇 시간 만에 새로 들어온 상무는 사장의 막내딸이지만 능력도 인성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짐승 같은 대우를 받은 페르난도는 정차식에게 연민을 느끼며 커피체리 나무를 보내온다. 직업이나 신분에 대한 선입견으로 상황을 만들지 않는 방식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페르난도가 보내온 ‘볼리비아의 햇살’처럼 드라마는 세상 구석구석 온기를 전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사람이 매일같이 성실하게 출근하는 건 인간 학대야.”

루왁 커피((Kopi Luwak)는 가장 품질이 좋은 커피 체리를 먹은 사향 고양이의 배설물에서 채취한 커피를 말한다. 그렇지만 야생 루왁은 실제 커피의 맛과 풍미보다는 워낙 찾아보기 어려운 희소성 때문에 비싼 가격이 매겨져 있기도 하다. 루왁이 유행하자 사향 고양이를 우리에 가두고 커피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와 같은 고양이 학대 문제가 불거지면서 커피 루왁의 명성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상무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퍼포먼스로 커피체리를 집어삼킨 정차식이 루왁 원두를 배설한다는 설정이 신선하다. 드라마는 정차식이 오랜 진통 끝에 커피 원두를 생산했고 차식이 그것을 변기에서 꺼내드는 장면을 재현한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이 상황을 보란 듯이 연기한 안내상의 연기가 흥미롭다. 평소 커피를 마실 줄도 모르는 차식이지만 카페를 운영하는 딸이 우연히 그 원두를 가져가 사람들에게 팔게 되면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차식은 원두를 생산하고 지현은 처음으로 매출 흑자를 기록하며, 딸이 좋아하는 것을 본 차식은 출장 간다고 둘러대고 모텔방에서 더 많은 원두를 생산하기 위해 애쓴다. 원두를 배설하려고 무리한 차식은 커피체리로 붉게 물든 두 손을 바라보며 쓰러졌다가, 회사로 달려가 이대로 그만둘 수 없다고 항변하다가 다시 쓰러지고 결국 병원에서 암 판정을 받는다.

우리에 갇혀 커피체리만 먹고 원두를 배설해야하는 사향 고양이와 수십 년 간 회사에 갇혀 일만 하는 직장인의 삶을 유비 관계로 놓은 것이 그야말로 ‘웃프다’. 회사가 이만큼 크는 동안 무수히 많은 직장인들의 노동이 바쳐졌지만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는 올해의 우수사원상과 같은 허울 좋은 상장으로만 남을 뿐이다. 차식이 자신이 배설한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시고 굵은 눈물을 떨구며 “정말 맛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생산을 위한 노동이 오히려 빈곤의 악순환이 될 때,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불가능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대 받은 고양이에게서 나온 커피는 더 이상 팔지 않겠다는 딸에게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너만 생각하라고 말하는 차식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도 신의 온기가 머물기를”

 

처음으로 원두를 배설하고 난 다음날, 차식은 꿈처럼 환영처럼 고양이를 만나 “어때 고양이가 된 기분이?”에 해당하는 야옹 소리를 듣는다. 이 드라마의 비현실적인 설정이 제일 극대화 되는 것은 물론 차식이 인간의 똥이 아닌 생두를 배설한다는 것이지만, 사실 드라마 전반에는 현실 사이에 놓인 비현실이 판타지처럼 펼쳐진다. 호세의 커피체리나무가 처음 배달되는 날 사무실에 울려퍼지는 노래 ‘cuando hay un mal dia’(나쁜 날이 오면)은 차식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리고 은퇴 기념 파티를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거울 속 자기의 얼굴이 고양이로 변하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나 화장실에서 다른 직원들의 비난을 받고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다 과거로 이동하는 장면, 또 모텔에서 쓰러졌을 때 딸을 임신했던 시간으로 돌아간 장면 등은 현실 속에 깃든 판타지로 강퍅한 현실에 위로를 준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 진짜 판타지는 이런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는 날, 회장에게 자신이 받은 ‘최고의 세일즈맨상’을 보여주며 “이 회사 이렇게 성장한 거 혼자 큰 거 아닙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시간, 노력, 눈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압니다. 회장님도 그걸 아셔야합니다. 그리고 저 거지 같은 엘리베이터 좀 치워요. 여기 직원이 몇 명인데 언제까지 저딴 거 하나만 타라는 겁니까?”라고 소리치는 장면 말이다. 노동이 나의 성장이 아니라 순환하는 삶의 존속만을 지시할 때, 현실 사이에 깃든 판타지의 위안보다 이 같은 속 시원한 발언이 훨씬 더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답답하고 멍청해 보여도 내 방식대로 살래.”라고 말하는 지현의 세대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비난하기보다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판타지가 기입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주인공의 신체에 불가해한 일이 일어나거나 시공간을 이동하거나 영혼이 뒤바뀌는 등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들이 안방극장에서 조명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 보이지 않는 현실 이면의 세계에 더 중요한 문제들이 놓여 있다는 것을 새로운 발상과 참신한 시도를 통해 보여주는 드라마가 많아진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비록 판타지일지라도 규범적 현실 너머를 상상하고 균열을 내며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일상의 영역에 그러한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해 보인다. 루왁인간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 사진 출처

<루왁인간> : JTBC 공식홈페이지

http://tv.jtbc.joins.com/photo/pr10011143/pm10056265/detail/15944

 

글: 양근애(문화평론가)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연극평론가. 드라마터그. 2016년 방송평론상 수상. 역사, 기억,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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