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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 영화의 시간과 가치를 증명하는 거장 스코세이지
[김희경의 문화톡톡] 영화의 시간과 가치를 증명하는 거장 스코세이지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0.01.28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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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고>, <아이리시맨>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아이리시맨>(2019)의 오프닝은 그의 이전 작품 <휴고>(2011)의 오프닝을 연상케 한다. 두 작품은 소재부터 구성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색채를 갖고 있다. <휴고>는 영화를 주제로 한 영화, 즉 ‘메타시네마’에 해당하며, <아이리시맨>은 미국 근현대사의 이면을 담고 있는 갱스터 영화다. 그럼에도 두 작품의 오프닝엔 묘한 접점이 만들어져 있다. 두 작품뿐 아니라 스코세이지의 작품 전반엔 그의 인장처럼 여겨지는 오프닝 트래킹숏이 동일하게 들어가긴 한다. 카메라가 한번에 미끄러지듯 공간 안으로 들어가고, 특정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롱테이크로 찍는 방식이다. 그런데 두 작품엔 이 트래킹숏만 겹치는 게 아니다. 카메라가 비추는 장소, 경유하는 과정, 카메라의 도착 지점이 유사하게 나타난다.

 

영화 '아이리시맨'.
영화 <아이리시맨>

먼저 <휴고> 이야기는 1930년대 프랑스 파리 기차역을 비추며 시작된다. 역에 두 대의 기차가 도착하고, 카메라는 이 기차들 사이를 지나 역사(驛舍) 안으로 쑥 들어간다. 그리고선 수많은 군중을 헤치고 커다란 시계탑 앞에 멈춰선 후 도착 지점에 이른다. 시계 숫자의 틈 사이로 역사 사람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어린 아이 휴고(아사 버터필드)의 얼굴이다. <아이리시맨>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카메라는 2000년 미국의 한 요양병원을 비춘다. 이어 병원 복도를 훑고 지나간다. 그러다 뒷모습을 보인채 휠체어에 앉아 있는 82세 노인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에게 멈춰선다. 카메라는 이내 프랭크의 앞으로 다가가는데, 이때 그의 얼굴을 곧장 비추지는 않는다. 무릎 위에 올려진 손을 먼저 비춘다. 손목엔 번쩍이는 금색 시계가, 손가락엔 금색 반지가 있다. 그리고 나서야 카메라는 프랭크의 얼굴을 정면으로 잡는다. 결국 두 작품의 오프닝 모두 ‘공간-시간(시계)-얼굴’로 이어지는 구조인 것이다.

오프닝은 영화를 여는 시작점인 동시에 감독이 추구하는 도달점을 알려주는 지표다. 그렇다면 스코세이지는 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작품에서 유사한 오프닝을 배치한 것일까. 그가 오프닝, 나아가 영화 전체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영화는 미학과 감정, 정신"

이 답을 구하기 전, 큰 화제가 됐던 스코세이지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아야 할 것 같다. 스코세이지는 지난해 11월 뉴욕타임스(NYT)에 ‘죽어가는 영화제작 예술’이란 기고문을 싣고 “마블 영화는 영화(cinema)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영화는 미학과 감정,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마블 영화엔 그런 부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미학과 감정, 정신’. 스코세이지가 정의한 영화는 이 묵직하고 단단한 가치들을 담고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코세이지가 두 작품에 활용한 오프닝은 이 가치를 담은 영화란 무엇인지, 영화는 어떻게 흘러야만 하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휴고>는 스코세이지가 처음으로 만든 3D영화다. 그가 3D기술로 찾아 떠난 곳은 바로 ‘영화’의 세계다. 카메라가 있던 프랑스 기차 역은 세계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의미한다. 영화 역사의 시작점에서 그의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 중간엔 ‘열차의 도착’을 통해 영화를 처음 접한 관객들이 열차가 들어서는 장면에서 깜짝 놀라는 모습이 나이기도 한다. 또 3D 기술을 활용해 이 기차가 역사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장면도 구현한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오자면, 카메라가 역사 안을 지나 비춘 커다란 시계탑은 위대한 걸음을 내딛어온 영화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어 도달한 휴고의 얼굴은 그 시간을 함께 지켜온 관객을 상징한다. 휴고는 역사 안 장난감 가게 할아버지 조르주(벤 킹슬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조루주의 손녀딸 이자벨(클로이 모레츠)와 함께 새로운 모험을 하며 조르주의 비밀을 알게 되고, 곧 영화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장난감 가게 주인인줄만 알았던 조르주는 실제 프랑스 영화감독이었던 조르주 멜리에스였던 것이다. 스코세이지는 그가 만들었던 세계 최초의 스튜디오를 휴고의 모험과 3D기술을 결합해 복원시킴으로써, 멜리에스의 업적과 꿈을 복기하고 추앙한다.

 

영화 '휴고'.
영화 <휴고>

<아이리시맨>의 오프닝 역시 유사한 흐름과 의미를 갖는다. 카메라가 비춘 미국의 요양병원은 갱스터 프랭크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곳이다. 프랭크가 과거를 회고하며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공간인 셈이다. 영화는 그의 회고와 함께 1940~2000년에 달하는 장대한 미국 근현대사를 톺아본다. 이는 프랭크에게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 세 가지 타임라인을 통해 나타난다.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와의 만남, 지미 호파(알 파치노)와의 만남, 지미 호파를 살해한 순간이다. 어찌보면 프랭크라는 한 개인의 사건에 불과하지만, 영화는 이를 미국 근현대사에 녹아든 굵직한 사건들로 확장해 나간다. 지역 사회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키워간 갱스터 집단, 전미트럭운송노조 ‘팀스터스’를 둘러싼 갈등과 배신, 존 F. 케네디의 당선과 암살이란 충격적인 역사적 사실과 연결한다.

오프닝에서 카메라가 비췄던 그의 손에 있는 금색 시계와 반지는 영광과 배신, 회한이 담긴 굴곡의 시간을 상징한다. 프랭크에게 시계를 준 사람은 지미, 반지를 준 사람은 러셀이다. 두 가지를 모두 한 손에 차고 있는 것은 프랭크의 인생에서 두 사람이 동전의 양면같은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피아 러셀은 고기를 운반하는 트럭을 몰던 프랭크가 본격적인 갱스터 생활을 하게 해준 인물이다. 팀스터스를 이끌던 위원장 지미를 프랭크에게 소개시켜준 것도 러셀이다. 그러나 러셀은 프랭크를 기계처럼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강압적 존재이기도 하다. 프랭크는 그가 시키는 일을 어떤 가치 판단도 없이 무조건 해치운다. 반면 지미는 프랭크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인물이다. 그를 팀스터스의 지부장으로 만들어 자발적인 추동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프랭크는 결국 러셀의 지시에 따라 지미를 배신하고 만다. 지미를 죽이고도 이 시계를 그대로 차고 있는 것은 프랭크, 즉 미국 근현대사에 자리했던 수많은 개인들이 체험한 눈부신 기억과 부끄러운 회한을 동시에 드러낸다.

카메라가 도착한 프랭크의 얼굴은 스코세이지가 말한 영화의 가치 ‘미학과 감정, 정신’을 담은 결정체다. 스코세이지는 <휴고>에서 3D기술을 활용했듯, <아이리시맨>에선 ‘디지털 디에이징’ 기술을 사용했다. 70살이 넘은 배우의 얼굴을 젊은 시절의 얼굴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스코세이지는 트럭 운전을 하던 젊은 시절부터 갱스터가 되어버린 중년, 감옥에 갔다가 요양 병원에 가기까지의 노년의 삶에 이르기까지 프랭크의 얼굴을 오직 한 배우 로버트 드 니로의 얼굴로만 표현했다.

 

영화 '아이리시맨'.
영화 '아이리시맨'.

얼굴에 대한 영화적 고민과 새로운 시도는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보이후드>(2014)에서 한 소년이 6살부터 18살이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하지만 그 시도에서 아직은 미흡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스코세이지가 시간을 역행하며 도전한 디에이징은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것임에도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만은 평가할 수 없다. 배우의 얼굴은 젊은 시절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나이가 들어 느릿느릿하고 둔탁해진 움직임은 미처 다 숨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디에이징을 통해 프랭크의 얼굴을 드 니로만의 얼굴로 고집한 것은 한 사람이 온전히 느꼈을 시대의 무게와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자 했던, 거장 스코세이지 이기에 고집하고 구현해낼 수 있는 영화의 가치다.

여기서 잠깐 프랭크가 가진 소극적이고 순응적인 자세를 떠올려 보자. 영화에서 프랭크는 러셀의 명령에 철저히 따르는 모습을 보인다. 프랭크의 수동적인 태도는 러셀을 만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참전 경험을 떠올리는 플래시백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는 상사, 정확히는 어떤 순간에도 자기 앞에 주어진 시대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점에 대해 프랭크가 갱스터임을 차치하고 보면, 왠지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간의 파고 속에서 그저 명령에 의해 움직이고 주어진 일을 할 뿐인 평범한 누군가의 암묵적 수동성을 그의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프랭크의 행위가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관객이 프랭크에 밀착되어 갈수록 영화는 프랭크의 태도에 대한 경각심을 동시에 드러낸다. 프랭크의 딸 페기의 시선을 통해서다. 페기의 얼굴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성인 여성으로 변해 가는데, 그 얼굴은 막연한 두려움을 거쳐 프랭크를 단죄하는 듯한 냉철함으로 바뀌어간다. 그리고 더 이상 회복하기조차 힘들어진 딸과의 갈등 속에서 프랭크는 회한을 느낀다.

 

찬란했고, 찬란할 영화의 시간과 가치

두 작품은 클로징도 묘하게 닮았다. 클로징에서 카메라는 문이 열린 공간을 비춘다. 그리고 그 안엔 어떤 얼굴이 있다. <휴고>엔 휴고가 모험을 하게 된 계기가 된 로봇 인형이 한 방의 책상 의자에 앉아있다. 옆방에선 휴고와 조르주 가족의 파티가 한창 열리고 있다. 말도 움직임도 없는 로봇 인형이지만 왠지 웃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앞으로도 영화의 시간이 쭉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관객들로 하여금 그 시간을 기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아이리시맨>에선 프랭크가 요양병원 안 자신이 머무는 방에서 혼자 남겨진 것을 비춘다. 프랭크는 지미가 침실의 문을 살짝 열어놓았던 것처럼, 자신의 방문도 조금 열어두라고 한다. 모두가 죽고, 딸들은 찾아오지 않아 홀로 남은 프랭크가 느끼는 짙은 고독이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 '휴고'.
영화 <휴고>

어쩌면 스코세이지가 전혀 다른 색채의 두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영화’ 그 자체의 의미였던 건 아닐까. <휴고>를 통해선 찬란했고 또 앞으로 찬란할 영화의 시간을 축복하고, <아이리시맨>을 통해선 영화의 가치 ‘미학과 감정, 정신’을 구현하는 법을 스스로 증명하면서 말이다.

 

*사진출처:네이버영화

 

글: 김희경(문화평론가)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정책 및 기획 박사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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