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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의 문화톡톡] 냉전 유토피아 ‘한국’의 영화지리학
[박현선의 문화톡톡] 냉전 유토피아 ‘한국’의 영화지리학
  • 박현선(문화평론가)
  • 승인 2020.02.10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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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험프리 렌지 콜렉션

1. 험프리 렌지는 누구인가?

험프리 렌지(Humphrey Leynse, 1921-1977)는 냉전을 전후해 미국과 유럽, 아시아를 가로지르며 군인에서 교육자문가, 미공보원, 민간 영화제작자, 다큐멘터리 감독, 교수 등 다양한 이력으로 활동했던 매우 독특한 인물이다. 특히 1960년부터 1966년까지 한국의 미공보원(USIS) 영화과에 근무하며 여러 문화영화를 만들었다. USIS 활동을 그만 두고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다시 한국에 들어와 부인과 어린 아들과 함께 울릉도에 거주하며 2년 동안 섬마을 어민의 삶을 기록한 세미다큐멘터리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 Out There, A Lone Island>를 제작했다. 미공보원과는 별도로 자신의 프로덕션 작품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휘트니박물관과 미국현대박물관 등 주로 뉴욕 등지에서 소개되었다. 

 

험프리 렌지가 만든 울릉도 세미-다큐멘터리,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 Out There, A Lone Island'
험프리 렌지가 만든 울릉도 세미-다큐멘터리,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 Out There, A Lone Island'

한마디로 헴프리 렌지는 1960년대 활발히 활동했던 미공보원이자 영화인이다. 그런 그가 새롭게 조명된 이유는 그가 당시 한국에서 제작하고 수집한 영화 콜렉션이 국내에 소개되면서이다. 모두 25편의 주한미공보원 문화영화와 뉴스릴, 렌지의 개인다큐멘터리와 소수 사진자료 등이 포함된 <험프리 렌지 콜렉션>의 작품들은 1960년대 문화 냉전의 시각체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렌지 개인의 시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들로 그 의미가 독특하다. 특히, 험프리 렌지 콜렉션은 1950년대를 지나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이 아시아 외교 정책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1960년대 한국의 냉전 지리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렌지 콜렉션에 담긴 미공보원의 문화영화 텍스트들은 한국의 로컬 공간들에 대한 흥미로운 심상지리를 드러내고 있는데, 특히 해양의 공간지리, 즉 섬과 바다를 다룬 작품들이 많다. 앞서 말했던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는 울릉도에 관한 세미-다큐멘터리로, 냉전 시대 서구인의 시선에 포착된 한국 로컬 공간의 해양적 노모스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2. ‘한국’의 로컬리티와 지리학 

<험프리 렌지 콜렉션>의 영화들이 1960년대 미국의 냉전 공보활동을 투영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은 1960년대 들어 미국은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민족국가들을 자유세계 안으로 포섭하고 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리드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이 국가들의 로컬리티―즉, 전통과 문화, 로컬 공간―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아래 이미지는 1960년대 초 미국의 관점에서 생산된 한국의 지리학적 로컬리티를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림 1>이 한국의 해안선을 중심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소들과 관광 포인트를 보여주고 있다면, <그림 2>는 내륙과 산맥을 중심으로 사실적이긴 하지만 거의 접근이 불가능한 공간으로서 한국을 제시한다. 

 

그림 1
그림 1
그림 2
그림 2

이 지도 이미지들의 출처는 1961년 8월 출판된 Korean Report(한국소식)의 창간호이다.1) 이 출판물은 주미 한국대사관의 한국정보부(Korean Research and Information office)에서 발행하는 영문 소식지로 해외에 한국의 역사와 정치, 경제 등을 소개하는 기사들과 당시 사회상을 담은 기사들을 주로 담고 있다. 

박정희 군사 정권의 냉전 근대화 프로젝트의 서막이 오르는 가운데 첫 출간된 Korean Report 1호는 위와 같이 한국의 지리와 풍토, 문화유산과 관광지에 대한 소개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다. 이 잡지에 실린 특집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 정치적 맥락의 측면에서, 국내에선 5.16 쿠데타가 일어나 온 국민이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 빠져 있는 1961년, 한국의 지리와 풍토에 대한 특집으로 소식지를 해외 독자를 겨냥해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한 수용적 독해의 문제로서, 이 냉전 정치적 지리학의 무게중심이 그 특집의 제목인 “Land of Korea”(한국의 육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해안가와 해양에 있다는 사실이다. 특집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기사내용은 동해, 화진포, 강릉시의 남쪽으로 송도 해수욕장, 포항, 부산, 해운대, 진해, 제주도, 한라산, 서귀포, 목포, 대흑산도, 변산반도, 만리포 해수욕장, 대천 해수욕장, 인천, 강화도 등과 같은 해양적 장소를 중심으로 한다. 또한 두 번째 특집기사가 보여주듯이, 한국의 수도 서울과 내륙지방에 대한 설명은 일종의 출발점으로 작용하여 제주도와 해양 산업, 섬지방의 생활 등에 대한 정보 속에서 흡수되고 있다. 

1960년대 초반, 한국에 대한 소개가 해양과 섬이라는 지정학적 알레고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특징은 렌지 콜렉션에서 특히 비평적 주목을 요하는 몇 편의 문화영화들에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소록도, 울릉도와 제주도를 배경으로 제작된 일련의 문화영화들, 렌지가 미공보원 생활을 은퇴한 후 만든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는 1960년대 USIS 영화들의 전략적 변화의 특성과 더불어 냉전 시대 서구인의 시선에 포착된 아시아 로컬 공간의 지리적 영화학을 담고 있다. 마루카와 데쓰시는 전후 일본의 사고체제 속에서 어떻게 바다가 특권적 비극의 장소로 집합적으로 상기되었는가를 논의하면서 “‘바다’야말로 냉전시기 일본의 역할을 합리화하는 이미지 장치”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2) 냉전 일본의 심상지리는 1세계 대 2세계를 바다와 육지로 나누는 해양사관을 보여주는데, 이는 유럽과 일본을 제1세계로, 그 중간에 넓게 펼쳐져 있는 아시아대륙에 대해서는 문명화가 곤란한 ‘육지’에 갇혀 있는 제2세계로 기술하는 해양사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 바다는 어떻게 상상되었을까?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문화영화와 비교해보면, 이 해양 로컬리티의 문제는 더욱 흥미로와진다. 사실 국토에 대한 관심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그리고 근대화 프로젝트의 관점에서 볼 때 국내에서도 매우 중요한 화두였다. 해방 직후 이용민 감독이 만든 <제주도 풍토기>(1946), 1958년 12월에서 1959년 7월까지 특집 연재기사로 실린 <풍토순람>, 1950년대 대한산악회 학술조사단에서 촬영한 <독도>(1954). <독도와 평화선>(1956), <독도>(1957) 등의 영화들은 해방 후부터 지속적으로 한국의 지리와 풍토에 대한 기록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 듯이, 국립영화제작소의 <팔도강산> 시리즈는 국토의 재현이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선전 차원을 넘어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일종의 대중적 오락이 되었음을 시사한다.3) 국내 문화영화들의 경우, 해양이 특권적 장소 혹은 제1세계적 모험의 장소를 의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풍토기 혹은 국토유람과 같은 용법이 보여주듯이, 바다, 섬, 해안선들은 ‘한반도’ 내륙의 확장된 영토인 동시에 민족-국가의 경계를 구심적으로 보여주는 총체적 신체의 일부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3. 냉전 ‘극동’의 노모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여기서 주목하는 렌지 영화들의 경우 해양 이미지가 위에서 논의한 ‘국토’의 민족적, 근대적 전유를 위한 통합적 표상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냉전과 더불어 세계의 지리적 시공간은 금이 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균열 속에서 한국은 바다를 국토의 일부로 표상하는 주체적 입장을 국내 문화영화를 통해 견지하고자 했지만, 글로벌 냉전의 지리학 속에서 한국 자체가 해양 자체로 표상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았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냉전의 지리적 재편성은 미국이 생산한 여러 종류의 세계지도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4) 아래 지도 그림들은 미국의 헤게모니의 관점에서 지구의 대륙과 해양을 분할하고 분배하는 냉전 지리학의 노모스(nomos)를 보여준다. 

그림 3. “One World, One War” by Richard Edes Harrison
그림 3. “One World, One War” by Richard Edes Harrison
그림 4. Pacific Theater Map for World War II and Cold War booklet
그림 4. Pacific Theater Map for World War II and Cold War booklet

<그림 3>의 지도가 북극의 얼음 대륙을 중앙에 놓고 미국과 (당시) 소련의 대립을 상징함과 동시에 미국과 아시아의 지리적 인접성과 친화성을 강조한다면, <그림 4>의 지도는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냉전의 역사 속에서 지정학적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함에 따라 기존 동-서의 위치를 뒤집고 두 대륙이 위치하기 시작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시아의 지리적 재편성이 1960년대 한국의 로컬리티를 표상하는 가운데 서구 냉전의 시각체계가 가동시킨 해양의 노모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4. 섬들의 나라: 냉전 ‘한국’의 영화적 지리학  

렌지 콜렉션에는 섬과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다수 들어 있다. 특히 이 영화들은 울릉도와 제주도의 풍광과 계절, 환경, 그리고 주민들의 애환을 밀착해서 보여주고 있다. USIS에서 제작한 <등대>, <뱃동무들>, <섬마을 의사>, <산>과 같은 텍스트들은 모두 해안가와 어업, 섬생활 등을 주제로 한 문화영화들이며, 오셔니아 프로덕션에서 직접 만든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는 울릉도를 배경으로 한 세미-다큐멘터리다. 특히, <등대>와 <섬마을 의사>는 문화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구성요소들, 즉 기록화면과 극화, 내레이션을 모두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등대>의 오프닝 시퀀스에는 전지적 시점의 화자가 등장하며 한국의 주요 등대 소재지를 소개하고 오륙도의 등대지기 김씨와 부산의 어부 박선장의 일화를 통해서 등대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영화는 해양의 지리학과 노모스를 가장 형식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는데, 총 21분여의 길이 속에서 초반부 10분이 서해안의 칠발도 등대, 부산 절영도의 등대, 동해안 포항의 등대 등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데 할애된다면, 후반 10분은 태풍과 해무 앞에서 위기에 처한 선장이 한 등대지기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귀항한다는 극화를 전달하고 있다. <섬마을 의사>의 경우는 울릉도의 민속지적 기록과 극화, 내레이션의 층위가 좀더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영화는 실제 울릉도에 최초로 병원을 열고 의료 활동과 사회사업을 펼쳤고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이일선 박사가 처음 섬에 들어와 정착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때 섬의 실제 생활과 재연을 통한 극화들, 그리고 이일선 자신의 1인칭 내레이션이 병치되면서 <섬마을 의사>는 한층 내면적이고 성찰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이들 두 편의 영화, 즉, 렌지가 USIS 재직 시절 만든 문화영화들과 비교해서, 그가 미공보원을 그만두고 자신의 제작사인 오셔니아 프로덕션의 이름으로 만든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는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이나 계몽적 효과들을 확실하게 희박화시킨다. 이는 두 가지 요소의 부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내레이션의 부재이며 둘째는 비판적 시각의 제거이다. 약 66분 가량의 세미 다큐멘터리인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를 구체적으로 들어다보면, 처음에는 한 획씩 한자 ‘合’이 나타나고 영어 자막으로 “man speaking with one mouth”가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오세니아 제작’과 타이틀이 이어진다. 험프리 렌지(제작, 감독)와 주디스 렌지(특수효과)의 이름 후에  검은 화면에는 영어 자막으로 설명이 나타난다. “수백 마일 떨어진 어떤 곳에 울릉도 섬이 누워 있다. 사람들은 한국인이다. 이들은 산자락에 농사를 짓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이 섬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영화에 나와 본 적도 거의 한번도 없다.” 이어서 스틸 사진과 짧은 영상들로 이루어진 몽타주로 오프닝 시퀀스가 연결되는데, 여기에는 바다에서 바라본 울릉도의 전경과 해안가의 풍경, 마을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들과 촬영을 하고 있는 카메라맨의 모습, 그리고 영화를 제작한 험프리 렌지 가족의 모습이 함께 병치되고 있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울릉도의 풍경과 사람들을 배경으로 음악과 제작에 도움을 제공한 이들의 크레딧이 올라가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는 전반적으로 울릉도의 바다와 절벽, 겨울과 같은 자연 풍경과 기후를 바탕으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남자들은 오징어잡이를 위해 돛단배를 타고 여자들은 물질을 해서 미역을 딴다. 아이들은 달음질을 하고 토끼를 키우고 돼지에게 여물을 먹인다. 마을에서는 각종 어축이 거래되고 미장원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파마를 하거나 면도를 한다. 

영화는 자연과 풍속에 대한 다큐멘터리 기법과 플래시백이나 극적 구조와 같은 허구적 내레이션 기법을 혼합하는데, 극화는 울릉도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바다가 절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을 세워 살고 있는 이 가족은 엄마와 두 아들, 그리고 할아버지가 전부다. 영화는 비가 내리는 날에는 지붕 사이로 새는 빗물을 양동이에 담아야 하고 좁은 방에 작은 상을 놓고 밥을 먹어야 하는 가족들의 일과를 밀착해서 보여준다. 무덤가에 엎드려 술을 따르며 곡을 하는 엄마의 모습은 그녀가 처음 시집을 오던 날의 모습과 행복한 부부의 모습과 중첩되고, 플래시백을 통해서 그녀의 남편이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진 지붕에 깔려 죽게 되었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영화의 중반부, 또 다른 비극적 이야기가 등장한다. 엄마의 짧은 플래시백 이후로는 주로 어린 아들과 큰 아들의 일상을 통해서 울릉도의 풍토와 삶을 전달하던 영화는 절벽에 걸린 소를 구하려다가 어린 동생도 결국 절벽에 떨어져 죽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큰 형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동생의 장례식을 치루고 상심에 빠진 형이 새로운 기운을 얻는 것은 함께 자란 여자친구 덕분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울릉도의 바위섬들과 바다,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두 커플의 행복한 모습. 그러나 곧 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고 결국 형이 서울에 다녀오는 사이에 사랑하는 여인은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간다. 영화의 마지막, 절벽 위에 앉아 울릉도의 바다를 바라보는 형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1973년 휘트니 박물관에 <먼 곳에 외로운 섬 하나>가 상영되었을 때 뉴욕 타임즈는 짧은 기사를 하나 싣는다. 한국의 해안에서 140마일 떨어진 작은 섬 울릉도에 대한 영화라는 간략한 소개와 주인공 가족의 극적인 요소들을 담은 줄거리를 전해준다. 이 기사에 따르면 영화는 한국어 대사의 영어 자막 없이 상영되었다. 렌지 감독이 자막을 불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인데, 이 조건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영화 이미지만으로 전달될 수 있는 스토리일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인물들이 아니라 울릉도 자체임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막을 넣지 않은 상태로 영상 이미지만을 통해서 문화적 소통을 하고자 했던 렌지의 의도는 이 영화에 작동하는 심상지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울릉도라는 특정한 공간은 낯설지만 낯설지 않다. 여기에는 바다와 절벽과 거친 기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죽음과 상실, 즐거움과 친밀함, 사랑과 헤어짐 등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시아는 거대한 해양의 섬들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작동하는 심상지리는 이중적이다. 즉, 울릉도는 한국의 특정한 로컬 공간인 동시에 그 속에 ‘아시아인들’이 삶과 투쟁하고 있는 자연상태인 것이다. 여기에 어떤 계몽성이나 선전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예술적 자율성의 의지와 아시아 지역에 대한 냉전의 심상지리가 결합되어 있는 지점이다.

 

5. 문화 냉전을 둘러싼 아포리아

결론을 대신해서 이 글에 내재된 일종의 딜레마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즉, 렌지 콜렉션에 포함된 영화들이 어느 정도까지 ‘렌지의 영화들’(즉, 작가적 시그니처를 지닌 영화 작품들)로 분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냉전 시기 해외 영화인들의 국내 영화제작에 대한 연구에서, 적어도 두 가지 아포리아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출현할 것이다. 첫째,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진행된 미국의 공보활동 속에서 한 개인의 역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은 ‘냉전’은 지구를 뒤덮은 보이지 않는 큰 구름과 같아서 냉전의 자장 외부에서 과연 개인 특유의 의미생산이란 것이 가능했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완전한 긍정의 답을 내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최근의 냉전연구가 보여주는 변별점을 상기해 볼 때, 서구 중심의, 그리고 국가정책 중심의 ‘냉전’ 자체를 ‘문화 냉전’이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음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준다. “문화 냉전의 틀”은 우리에게 “양대 강국 중심, 정부와 정부 관계 중심의 냉전관을 탈중심화하여 한층 복안적이며 중층적인 냉전상을 제시”1)해주기 때문이다. 복수의 시선을 지닌, 다중적 주체들의 헤게모니 투쟁이 전제된 냉전의 시각 체계를 염두에 둔다면, ‘렌지의 영화들’이 지닌 함의 역시 더욱 풍성해질 것이며, 이들에 대한 꾸준한 논의가 더욱 필요할 것이다. 두번째 아포리아는 렌지의 영화들이 해석의 텍스트인 동시에 역사적 사료로서 기능하는 지점이다. 즉, 텍스트로서의 영화와 사료로서의 영상(이미지)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렌지의 영화들은 결국 그가 ‘만든’ 이야기들과 그가 ‘소장한’ 혹은 ‘수집한’ 영상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들은 대부분 우리가 ‘문화영화’라 부르는 것들로 기록 영화, 프로파간다 영화, 극영화와 같은 다양한 층위에 걸쳐 있다. 그렇다면 렌지의 영화들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특정한 영상들이 채집되고 수정되고 보관되는 과정 속에는 당시 실생활 내지 실제 사물들을 기록하고자 했던 욕구들이 어디에서 기인하였으며 어떤 관객성을 전제로 했는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냉전의 심리적 리얼리즘에 접속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들로 이어진다. 냉전 시기 미공보원의 영화제작과 해외 영화인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문화와 역사, 감각체계 간의 문제가 분리불가능하게 뒤엉켜 있는 한층 복잡한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며 새로운 문제제기와 중층적 관점, 해석의 실험들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이 글은 필자가 쓴 아래 논문을 수정, 축약한 것이다.        

박현선, 「냉전유토피아 ‘한국’의영화적 지리학 – 험프리 렌지 콜렉션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47, 인하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17

 

<각주> 

1. Papers of John F. Kennedy. Presidential Papers. White House Staff Files of Harris Wofford. Alphabetical File, 1956-1962. Peace Corps: Countries: Korea, August 1961.

2. 마루카와 데쓰시, 『냉전문화론』, 장세진 옮김, 너머북스, 2010, 82쪽

3. 국립영화제작소가 제작하고 연방영화사가 극장 흥행을 대행했던 <팔도강산>(배석인, 1967)은 무려 32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국립영화제작소는 <속 팔도강산: 세계를 간다>(양종해, 1968),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등 3편의 연작을 만들었다.

4. Keith C. Clarke, Mapping the Cold War: Cartography and the Framing of America’s International Power.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15.

5. 기시 도시히코, 쓰치야 유카, 『문화냉전과 아시아』, 김려실 역, 소명출판, 2012, 17쪽. 

 

글: 박현선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 『문화/과학』 공동편집장, 한국영화학회 상임이사로 현재 활동하고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한국학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게스트 프로그래머,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영화의 모더니즘과 정치적 미학에 관한 연구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얼바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시아 냉전의 문화정치, 한국영화의 정치적 미학, 기억과 정동 연구, 여성과 도시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출판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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