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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가치를 공유하는 성장, <스토브리그>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진화
[양근애의 문화톡톡] 가치를 공유하는 성장, <스토브리그>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진화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0.02.1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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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을 벗어난 텔레비전 드라마

방송 플랫폼의 다변화로 인해 텔레비전 드라마를 텔레비전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본 방송을 보지 않는다는 반증인 ‘본방사수’나, 종영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드라마를 몰아보는 ‘정주행’, 드라마를 보면서 인터넷 사이트 댓글로 팬심을 공유하는 ‘불판’ 등 텔레비전 드라마를 향유하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여전히 거실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텔레비전은 점점 더 선명해지는 화질과 그만큼 비싸진 비용을 자랑하는 가구이지만, 가끔은 액자 프레임 속에 얌전히 들어앉은 환상 속의 보물 상자 같기만 하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텔레비전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드라마의 내용도 많이 달라졌다. 이젠 거의 쓰지 않는 ‘안방극장’이라는 별칭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일상성과 보수성을 드러내는 말과 다름없었다. 일과가 끝난 후 먹을거리를 앞에 놓고 가장 편한 자세로 리모컨을 눌러 불러내는 드라마는 일상의 고민을, 일상을 살짝 일탈하는 기분 속에서 해소해주는 친절한 이웃과 같다. 그 친절한 이웃은 내일도 지속되어야 할 일상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비판보다 위로와 격려 쪽에 손을 들어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속삭인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드라마 속에서는 착한 사람이 끝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시청자들의 소망을 ‘시적 정의’(poetic justice)로 그려내는 것이 드라마의 몫이었던 것이다. 느닷없는 죽음이나 체제를 전복하려는 의지, 불가해한 비밀의 폭로 같은 결말은 영화관에서나 가능했을 뿐, 드라마는 꿈도 꾸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전설로 남은 <지붕뚫고 하이킥>(2010)의 결말이 불러일으킨 논쟁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현실의 가장 잔인한 민낯을 보고 싶지 않았던 시청자들의 충격을 가늠케 해준 사건이었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의 고질병이자 시청률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여겼던 로맨스를 의지하지 않는다. 의학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 법정드라마는 법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라며 자조하던 그 시기, 로맨스 드라마를 비롯한 대부분의 텔레비전 드라마의 장르는 멜로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한 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한 끝에 성취하는 이야기는 강퍅한 삶에 지친 시청자들이 기댈 언덕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주인공들의 달콤 쌉싸름한 연애의 완성을 기대하지 않게 되고 ‘브로맨스’나 ‘워맨스’가 그 자리를 대체해도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인물들의 전문 용어 난무한 텔레비전 드라마의 등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시청자들을 흡수했다. 시청률보다 화제성에 주목하는 사후 평가도 변화의 주요 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의 허들을 뛰어 넘어 드라마만의 장르 문법을 개척하는 이 새로운 흐름을 견인하는 데는 드라마를 자기 세상으로 끌어들인 팬덤의 역량도 컸다.

 

드라마 바깥의 퍼포먼스

<스토브리그>(SBS 금토 드라마, 이신화 작, 정동윤 연출)는 진화하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장점들이 집약된 드라마이다. 방영 초기 드라마의 인기를 두고 “‘스포츠 드라마는 안된다’는 공식을 깬 드라마”라거나 “‘스포츠 드라마’가 아니라 ‘오피스 드라마’”라는 언급들이 잦았다. 좋은 드라마는 그 소재가 스포츠이건 댄스이건 중요하지 않겠지만, 스포츠 드라마가 내재할 수밖에 없는 부담 요소들을 극복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주요 관전 포인트였던 것도 사실이다. ‘야구를 잘 아는 사람들도,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흥미롭게 본 이 드라마의 매력은 물론 밀도 있는 스토리라인에서 오는 부분이 크지만, 앞서 말한 텔레비전 드라마 제작과 시청의 변화된 흐름을 통해 그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만년 꼴찌팀인 ‘드림즈’의 처절한 경기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첫 회부터 ‘드림즈’의 모습을 실제 야구팀과 비교하는 팬들이 많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연고지에 대한 충성도가 강한 국내 야구팀의 특징을 잘 살리고 야구 경기 안팎에서 일어난 각종 에피소드를 망라한 덕분에 가능한 반응이었다. 첫 작품을 내놓은 이신화 작가의 저력 못지않게 연출을 비롯한 제작자들의 ‘깨알 같은’ 구성이 돋보였다. 그 덕에 드림맨 인형, 선수 유니폼, 열쇠고리, 컵 등을 굿즈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SBS <스토브리그> 공식홈페이지에 마련된 ‘PD노트’를 통해 드라마 전후의 경험을 이어주고 팬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마지막 회를 앞두고 올라온 ‘이 드라마의 마지막 회를 보려면 알아야 하는 것’에는 야구 관련 용어들을 마치 프리젠테이션을 하듯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다. 검색이 일상화 된 시청자들에게 이와 같은 이벤트들은 정보 차원에서도 유익하지만, 팬서비스 차원에서도 즐거운 경험이 된다. 요컨대, <스토브리그>는 드라마 내적 구성뿐만 아니라 드라마 앞뒤의 퍼포먼스를 통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스토브리그> 이전에도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을 실제 인물로 생각해서 악역을 연기한 사람에게 비난을 퍼붓거나 주인공의 성격을 실제 배우의 성격으로 착각하는 등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팬들은 배우와 캐릭터 간 동일시와 차이를 의식하며 그 사이의 간극을 기꺼이 즐기고 드라마 바깥의 세계를 재창조한다. 가령, 임동규 역을 연기한 조한선은 임동규가 아니지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드림즈의 팬으로서 임동규에 관한 정보를 그러모아 임동규를 마치 살아있는 선수처럼 응원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드라마 종영 직후 나온 배우 조한선의 인터뷰에는 그 스스로가 조한선과 임동규를 오가는 상황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강두기가 실제 야구 선수가 아니라 성악과 출신 배우 하도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 사실이 언급되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눈치 챙겨’를 들을 수밖에 없고, 드라마 종영 후에는 그가 연예인 야구단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팬덤의 문화적 역량은 드라마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넘어설 수 있게 한다.

 

가치와 성과의 양립 가능성

<스토브리그>는 인간적인 감정보다 실리를 추구하고 맹목적 신뢰보다 의심을 통해 판단하는 백승수라는 인물이 드림즈의 단장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실력과 역량을 겸비한 다양한 선수들이 있고 또 운영, 마케팅, 스카우트 등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들이 프런트에 포진하고 있지만 몇 년째 성적 부진을 못하고 있는 이 오래된 팀에 외부인인 백승수가 몰고 온 파장을 중심으로 드라마의 전반부가 진행된다. 백승수의 이력은 다양한 스포츠팀의 단장을 맡아 우승을 이끌어내고, 그 팀의 해체를 겪는 수순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를 높이 산 구단주 조카 권경민은 큰아버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기업에게 적자를 남기는 야구팀 해체의 큰 그림을 그리려고 백승수를 단장으로 영입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드림즈’라는 야구팀은 팬들에게는 미우나 고우나 버릴 수 없는 ‘우리 팀’이지만, 자본을 대고 이익을 창출하려는 기업 입장에서는 골칫덩이인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대항하는 인간성의 논리가 아니라, 이윤 창출의 논리를 대적하는 실리와 합리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권경민과 백승수의 갈등은 흥미롭다. ‘조커’를 떠올리게 하는 자주색 양복을 입고 ‘조카’로서 가진 열등의식을 훌륭하게 보여준 오정세와 싸가지도 사회성도 없지만 통하는 리더십을 보여준 백승수 그 자체였던 남궁민의 연기 대결이기도 했다. <비밀의 숲>의 황시목이나 <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처럼, 인정에 기울지 않고 냉정을 유지하는 ‘다크 히어로’의 등장은 그리 특이하지 않지만, 백승수에게만 있는 특징이 있다. <스토브리그>의 마지막 회는 백단장을 드림즈에 머물게 하는 해피엔딩 대신 그 특징을 메시지로 잘 전달하는 결말을 택한 것 같다.

“효율적, 집약적, 성장 우선. 그런 단어들로 대표님은 굉장히 많은 성과들을 일구어내셨습니다. (…) 그런데 몇 퍼센트의 성장, 몇 천억의 매출 달성, 그런 말들의 반복이 주는 공허함은 없었습니까. 저는 늘 누군가를 책임져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저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독단적일 때도 그냥 저를 따라와 주기도 하면서요. (…) 혹시 설득당하지 않았던 것이 대표님 아니었습니까. (…)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이상 공허한 성장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스토브리그> 마지막 회에서 백승수는 ‘드림즈’를 해체시키겠다는 재송그룹을 대신할 새로운 구단을 찾기 위해 IT그룹인 PK를 찾아간다. 위의 대사는 대표가 요구한 PT의 말미에 백승수와 대표가 주고받은 말, 정확하게는 백승수가 던진 말들이다. 백승수는 어린 시절 함께 야구를 하며 놀았던 친구들과 벤처 기업을 차리기도 했던 대표가 결국 친구들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일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자신도 대표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했던 일들을 해온, 성과주의형 인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드림즈의 우승이 곧 드림즈의 성공이 아니며 성과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백승수에게 대표의 판단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치를 공유한 성장이 더 의미 있다는 이와 같은 메시지는 왜 드림즈에서 은퇴하려고 하냐는 물음에 답한 임동규의 말과 상통한다. 임동규에게 선수 생활이 연봉 액수로 판단되지 않듯, 야구 경기를 보는 사람들은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승리하는 것을 보기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로는 실패하더라도 기억에 남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경기들이 있다는 것. <스토브리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어느새 오염되어 버린 ‘가치’, ‘성과’, ‘성장’과 같은 개념을 재정의하게 만든다. 기업의 성장은 자본의 축적으로만 평가될 수 없고 문화의 가치는 부가가치 창출 자체가 아니며 노력을 통해 얻어내는 성과는 반드시 생산력을 담보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말이다.

<스토브리그> 종영 후, 작가가 마지막 대본에 제작자들에게 고마움을 담아 쓴 긴 편지를 남겼다는 기사를 읽었다. 거기서 이 작품이 ‘망하더라도 만들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용기를 주어 감사하다는 대목을 발견했다. ‘망함’과 ‘가치’를 반대편에 놓을 때, 잠재성은 현실 뒤에서 영영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상상력은 좁은 통로에 갇히는 것이 아닐까. “우승을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이세영 팀장의 말처럼 성공하면서 실패하고 실패하면서 성공하는 진짜 성장의 이야기 속에 가치가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이제 따듯한 말들로 감싼 섣부른 위로 대신 냉철한 현실 판단 속 낙관을 유도한다. 다른 매체에 비해 텔레비전은 여전히 보수적인 매체지만, 드라마를 자기 삶으로 끌어들여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적극적인 팬들이 있기에 텔레비전 너머의 일상을 성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모두로부터 배운다.”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야구를 넘어 삶으로 확장되고 있다.

 

* 사진 출처

<스토브리그>: SBS 공식 홈페이지


글: 양근애(문화평론가)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드라마터그로 활동하면서 주로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2016년 방송평론상 수상. 역사, 기억, 정치와 문화 동역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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