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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 닫힌 영화의 문, 다시 열린 영화의 문 - <페인 앤 글로리>
[김희경의 문화톡톡] 닫힌 영화의 문, 다시 열린 영화의 문 - <페인 앤 글로리>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0.02.24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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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페인 앤 글로리>(2019)는 영화의 닫혀버린 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문은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등에 날카롭게 새겨져 있다. 카메라는 수영장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있는 살바도르의 등을 아래에서 위까지 훑는다. 척추 전체에 걸쳐 져 있는 긴 흉터는 제목처럼 그가 느끼고 있을 ‘고통’을 한번에 보여준다. 그 육체적 고통은 영화감독인 살바도르가 영화를 더 이상 찍을 수 없게 된 원인이다.

그런데 영화의 닫힌 문을 상징하는 흉터로부터 시작한 이 작품은 곧 장면을 전환시킨다. 살바도르의 회상 씬으로 어린 시절 그가 환히 웃고 있었던 과거를 보여준다. 어머니 하신타(페넬로페 크루즈)가 동네 이웃들과 빨래를 하다 함께 노래하는 것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던 순간이다. 나이 든 살바도르의 고통을 비춘 직후 배치한 어린 살바도르의 미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의 닫힌 문 안엔 어떤 기억들로 가득 차 있을까. 그리고 이 작품은 그 기억의 파편들을 반복해 끄집어 내는 것일까.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와 ‘돌아오는’ 세 존재

<페인 앤 글로리>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자전적’이란 단어에 담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은 오히려 이 영화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가 느꼈을 영화 밖에서의 ‘고통’이 영화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흐르고 있다. 카메라는 그 고통으로 인해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된 살바도르의 기억의 파편 속으로 조용히 침전한다.

살바도르의 고통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을 의미한다. 영광은 그 반대를 뜻한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성공의 척도는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 말한다. 영화는 살바도르의 큰 흉터로 그의 육체적 고통을 먼저 드러낸다. 그리고 이후엔 그 아래에 흐르고 있는 정신적 고통의 근원을 회상하거나 살바도르를 찾아오는 ‘회귀’의 과정을 반복해 보여준다.

‘회귀’의 대상은 네 가지다. 먼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기억이 영화 내내 파편적으로 흐른다. 기억의 대상은 어머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그의 곁에 더 이상 돌아올 수 없지만, 살바도르는 오랜 시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놓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떠올린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영화의 중심축을 떠받치고 있는 가운데,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던 세 존재가 ‘돌아오는’ 사건들이 잇달아 배치된다. 살바도르 증오하는 연기를 했던 배우 알베르토, 살바도르의 동성연인이었던 페데리코,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게 해준 베나치오가 그린 그림이다. 결국 어머니부터 세 가지 존재는 살바도르의 인생을 관통한 정신적 고통과 연결된 존재들이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과 화해

살바도르의 첫 회상 씬은 그의 기억에서 온전히 웃고 있는 유일한 장면이다. 그런데 그 웃음은 어머니의 헌신을 바탕으로 한다. 어머니가 빨래를 하는 사이 어린 살바도르는 어머니의 허리에 올라 앉아 있다. 어머니는 옆 사람에게 아이가 무거워 내려 달라 한다. 그리고선 허리를 펴고 다른 사람들과 빨래를 널며 웃으며 노래를 부른다.

이처럼 어머니의 희생은 살바도르의 삶을 지탱해 온 힘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을 꿈꾸는 살바도르에게 끊임없이 현실을 인지하게 하는 존재다. 살바도르는 어린 시절 가족들과 동굴 같은 집에 살아야 했다. 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억척같이 살아간다. 그리고 살바도르에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신학교를 가라고 한다. 신부가 되기 싫었던 살바도르는 거부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그를 신학교로 보낸다.

어머니와의 충돌이 커다란 갈등으로 부각되진 않는다. 그러나 살바도르의 이상과 어머니의 현실이 반복적으로 부딪혀 왔음을 알 수 있다. 나이 드신 어머니가 살바도르가 자신을 떠나 있었던 것이 서운했다고 밝히며 자신의 희생을 강조하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 어머니에게 살바도르는 “그냥 제 자신이었을 뿐인데 엄마를 실망시켰다. 죄송하다”고 말한다. 이 작은 화해로 모든 것이 해소되진 않는다. 결국 어머니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 앙금이 의도치는 않았지만 모두 사라질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놓지 못하고 끊임없이 복기하는 것은 그에게 어머니란 존재가 자신을 미소짓게 했던 커다란 원동력이었음을 의미한다. 알모도바르 감독이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등 전작에서 어머니를 반복해 그려내며,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회한을 창작 활동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처럼 말이다.

 

정신적 고통을 수면 위로

살바도르에게 ‘돌아오는’ 존재들은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가장 먼저 나오는 알베르토는 살바도르가 유일하게 직접 찾아가는 인물이다. 살바도르는 오프닝에서 수영장에서 나온 직후 알베르토를 찾아 나선다. 알베르토는 자신의 영화 <맛>에 나왔던 배우다. 당시 살바도르는 알베르토가 지나치게 진중한 연기를 했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그러나 32년만에 다시 영화를 보고 새로운 감정을 느낀 살바도르는 알베르토를 직접 찾아간다. 자신의 영화와 화해를 했듯, 알베르토와도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다시 만나게 된 알베르토는 살바도르의 육체적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동시에 그를 짓눌러온 오랜 정신적 고통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살바도르가 알베르토를 만나러 가기 전, 영화는 살바도르의 내레이션과 함께 육체적 고통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을 잔뜩 보여준다. 그 이미지들은 영화의 전체 흐름과 어울리지 않게 느껴질 만큼 현란하지만, 그를 집어삼킨 육체적 고통을 무겁지 않게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이후 알베르토를 만나게 된 살바도르는 헤로인을 접하게 된다. 살바도르는 약 대신 헤로인에 기대 육체적 고통을 잠재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알베르토와의 갈등은 이 육체적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준 헤로인으로 인해 다시 불거진다. 살바도르가 알베르토의 과거 연기를 그토록 싫어했던 것은 살바도르의 전 연인 페데리코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헤로인에 빠졌던 페데리코를 떠나야만 했던 살바도르는 알베르토의 연기가 무거운 이유가 헤로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겨우 화해하게 됐지만, 알베르토가 헤로인을 한다는 사실을 살바도르가 GV를 위해 모인 관객들에게 말하며 둘 사이는 다시 틀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화해는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크게 살바도르를 억눌러 왔던 정신적 고통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이뤄진다. 알베르토는 살바도르가 컴퓨터 안에만 넣어두었던 정신적 고통의 산물을 접하고, 이를 무대에 올리자고 제안한다. <중독>이란 제목의 짧은 글이다. 살바도르는 처음엔 거절하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비록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은 숨기고 그 무대를 보러 가진 않지만, 오랫동안 혼자 안고 있던 고통의 근원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용기를 낸 것이다. 알베르토는 무대에서 페데리코가 헤로인에 빠졌던 중독, 연인을 향한 살바도르의 중독, 나아가 그 고통을 상쇄시켜주던 살바도르의 영화에 대한 중독을 한데 녹여 연기한다. “감정의 부스러기까지 놓치고 싶지 않아”라던 얘기처럼 알베르토는 그렇게 살바도르의 페르소나가 된다.

 

고통의 직시, 돌아온 열망

살바도르가 정신적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자, 그가 잃어버린 것들은 연쇄적으로 회귀한다. 알베르토의 무대를 본 페데리코가 살바도르를 찾아온다. 지나간 옛 연인과의 재회는 영화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후 살바도르가 고통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복은 연인이 옆에 있어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서로를 그리워했던 두 사람이지만 이들의 재회는 짧게 그려진다. 차분하면서도 설렘 가득한 재회에도 살바도르는 페데리코를 보내준다. 살바도르는 그에게 감정적으로 기대지 않고 스스로 중독을 이겨내는 법을 찾아낸다. 페데리코가 어렵게 헤로인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헤로인을 버리고 병원으로 향한다.

알베르토는 살바도르가 직접 찾아나선 대상이라면, 페데리코는 반대로 살바도르를 찾아온 인물이다. 이들에 이어 마지막으로 살바도르에게 회귀하는 대상은 누구도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았지만, 운명처럼 우연히 찾아온다. 성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청년 베나치오가 그렸던 그림이다. 자신의 성체성을 인지하게 된 순간을 어린 소년이었던 살바도르가 어떻게 받아 들였을지는 대사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살바도르가 갑자기 쓰러지고 열병을 앓는 쇼트만으로 살바도르 인생 전반에 걸쳐 느꼈을 고뇌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베나치오의 그림이 살바도르에게 오는 과정이 영화 안에서 다소 인위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사건의 배치도 마침내 자신의 정신적 고통과 마주하기 시작한 살바도르에게 도착한 작은 응원으로 작동한다.

 

“암모니아 냄새, 자스민 향기, 산들바람”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반복적 회상과 연쇄적으로 이뤄진 세 존재들의 회귀는 종국에 영화의 문을 여는 장치가 된다. 살바도르는 새로운 작품을 쓰기 시작하고, 수술대에도 오른다. 그리고 다시 영화 촬영장에 있는 살바도르의 모습은 영화의 문이 다시 열렸음을 보여준다.

살바도르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 어린 시절의 영화란 암모니아 냄새와 자스민 향기, 한여름의 산들바람이었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도 그 비릿한 고통 속에서 피어난 빛나는 열망의 흔적일 것이다.

*사진출처:네이버영화

 

글:김희경(문화평론가)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정책 및 기획 박사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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