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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대중서사와 판타지(3) - 현실과 가상, <레디 플레이어 원>과 『달빛조각사』 의 두 노동 이야기
[기획연재] 대중서사와 판타지(3) - 현실과 가상, <레디 플레이어 원>과 『달빛조각사』 의 두 노동 이야기
  • 유인혁 l 동국대 서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 승인 2020.02.28 13: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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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은 근래 가장 생경한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그것은, 놀이를 위한 장소가 착취의 현장으로 전환된 지옥이다. 이 영화는 전 세계 대부분의 인구가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를 플레이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의 악역, 놀란 소렌토는 ‘로열티 센터’라는 디지털 혹사 공장(Digital sweat shop)을 운영하는 자본가다. 그곳에서는 수천, 수만의 노동자들이 구속구에 묶인 채 강제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 IOI 로열티센터

현실만이 유일한 진짜?

이 영화는 주인공 웨이드 와츠가 거대기업 I.O.I의 방해를 극복하고, 오아시스의 경영권을 획득하는 데서 마무리된다. 이 여정에서, 웨이드 와츠는 순수한 놀이의 가치를 깨닫는다. 즉 놀이의 목적은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님을 배운다. 또한, 놀이와 현실의 진정한 관계에 대해 알아차린다. 요컨대 놀이가 아무리 즐거운 것이어도 “현실만이 유일한 진짜(Because reality is real)”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래서 웨이드 와츠는 오아시스의 디지털 혹사 공장을 철폐하고, 일주일에 2일은 접속을 통제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상업적으로 변질된 게임을 순수한 놀이로 되돌리는 한편, 대중문화의 쾌락에 탐닉한 중독자들을 현실 세계로 해방시키고 있다.

이렇듯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현실과 가상세계의 관계는 대립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현실과 가상세계 사이의 거리가 강조된다. “현실만이 유일한 진짜”라는 진술은 가상세계의 즐거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현실 세계의 진정한 경험을 초과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즉 디지털로 구현된 아바타로는 진정한 친밀성을 형성할 수 없다. 그래서 웨이드 와츠는 진정한 동료애를 깨닫기 위해 현실에서 동료들을 만나야 했고, 사만다와의 대면을 통해서 참된 사랑에 눈뜰 수 있었다. 한편 가상세계를 현실의 논리에 따라 조작하는 것 역시 금기다. 즐거운 놀이가 현실적(상업적)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교훈은, “즐겁게 놀이하라. 다만 현실을 존중하라”가 될 것이다.

 

현실처럼 치열하게!

 

『달빛조각사』 표지

한편 남희성의 『달빛조각사』(2007~2019)는 무척 생경한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끔찍한 노동이 즐겁게 이루어지고 있는 천국이다. 이 소설은 전 세계 게임 인구를 독점하고 있는 가상현실 MMORPG ‘로열로드’를 소재로 한다. 주인공 이현은 로열로드의 가상화폐를 현실화폐로 교환해 돈을 버는 청년이다. 따라서 이현에게 가상세계는 놀이의 장소가 아니라 일하는 직장이다. 그는 하루에 오직 4시간만 잔다. 그리고 한번 게임에 접속하면 80시간 이상 연속적으로 사냥(farming)을 한다. 그는 놀란 소렌토의 노동자들이 억지로 했을 일들을, 자율적으로 하고 있다. 

이현에게 게임은 여전히 즐거운 행위다. 이현은 줄곧 ‘레벨업’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그가 “몸이 부서지도록” 노동하는 것은,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조금씩 노력을 해서 캐릭터가 강해진다. 성장한다. 더 강한 몬스터를 잡는다.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과정이 더없는 쾌락을 주는 것이다. 한편 이현은 노동을 통해 축적한 자본을 투자하는 데도 관심이 많다. 그는 사채업자에게 자산을 모두 빼앗긴 상태에서도 1,000만 원에 달하는 로열로드 접속장치를 구매했다. 그것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까웠지만 투자였다”. 즉 “게임 하나만으로도 명예와 권력, 돈을 가질 수 있는 세상”에 참여하기 위한 티켓이었다. 이후에도 이현은 위험이 따르는 투자를 했다. 

그는 힘들게 쌓은 ‘레벨’이나 화폐를 과감히 투자해, 불확실한 환경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결단의 순간마다 고수익•고위험 투자를 하는 승부사로 그려진다. 이때 『달빛조각사』는 현실과 가상세계의 관계를 연속적인 것으로 재현하고 있다. 이현에게 아바타는 자본축적을 위한 도구이며, 로열로드는 돈을 벌기 위한 일터다. 요컨대 가상세계는 실로 현실의 연장이다. 이때 『달빛조각사』의 교훈은, “즐겁게 노동하라. 마치 놀이하는 것처럼”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쾌락은 절제돼야 하는 게 아니라, 무한히 해방돼야 하는 것이 된다.

 

두 노동자 이야기

여기까지 살펴보면 <레디 플레이어 원>과 『달빛조각사』는 모두 현재 자본주의의 우화처럼 느껴진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사회가 노동과 여가를 분리시킨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과잉한 노동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것이다(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그러나 인간은 비노동의 세계에 탐닉해서도 안 된다. 삶의 현실적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절제다. 적절히 일하고, 적절히 쉬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끊임없는 노동으로 내모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우선 가혹한 경쟁 때문이다. 사회적 성공의 좁은 문이 자기착취를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은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리하여 극심한 초과노동을 자율적으로 수행하기도 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달빛조각사>는 일을 사랑하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웨이드 와츠와 이현은 자본주의 원리, 특히 노동윤리가 인격화된 존재다. 웨이드 와츠는 ‘워라밸’을 강조하는 관리자처럼 행동한다. 그는 마치 자본가와 정치 권력이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하는 것처럼 ‘주5일 접속제’를 입안했다. 노동과 놀이의 균형을 찾음으로써, 건강한 삶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현의 경우, 마치 동기부여 강사처럼 적성과 직업을 합치라고 강조한다. 그는 ‘일에 미쳐라’, ‘즐겁게 일하라’,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조언하며, 자기 발달의 욕망과 사회적 성공의 임무를 통합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것 같다. 

여기서 <레디 플레이어 원>과 『달빛조각사』의 “즐겁게 놀이하라”, 그리고 “즐겁게 노동하라”는 상반된 교훈은 사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번아웃(Burn out)’을 경계하는 신중한 주체를 필요로 한다. 반면에 높은 성과와 혁신을 위해 노력하는 주체 또한 필요하다. 그러니 두 교훈은 일견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이런 교훈의 문제는, 아무리 실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일종의 환상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현의 노동은 지속불가능한 것이다. 부족한 수면과 장기적인 노동은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도 몸을 해친다. 게다가 일에 몰두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사생활을 희생시킨다. 이현에게 사적인 관계는 모두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에 국한된다. 여기, 친밀성을 교환하기 어려운 일 중독자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 스택스 사진

한편 절제의 미덕은 기만적인 것이다. 묻고 싶다. 웨이드 와츠가 해방시킨 노동자들, 그리고 미래의 구룡성채인 빈민가(stacks)의 주민들은, ‘오아시스’가 없는 화요일과 목요일에 무엇을 할까.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만이 유일한 진짜”라는 메시지는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좋은 일자리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 현실과 쾌락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라는 조언은 결국 ‘노동을 더 하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두 노동자 영웅의 모험이 아무리 흥미롭고, 그들의 위업이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어도, 허황하다. 그것은 “충분히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식의 스펙터클 때문이 아니다. 두 작품이 다루는 로봇과 괴물, 마법, 초월적인 신체적 능력은 관계없다. 이 작품들은 자본주의적인 환상을 재현하기 때문에 꿈처럼 느껴진다. 

이상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조절하는 자, 자신의 노동을 쾌락과 통합하는 자. 바로 이런 주체의 모습이, <레디 플레이어 원>과 『달빛조각사』를 공상(Fantasy)으로 만드는 것이다. 

 

글·유인혁
동국대학교 서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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