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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특집] 로맨스 시리즈(4) - ‘결혼의 귀환’을 꿈꿔도 될까?
[계절특집] 로맨스 시리즈(4) - ‘결혼의 귀환’을 꿈꿔도 될까?
  • 송연주 l 문화평론가
  • 승인 2020.02.28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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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가 늘면서 1인식과 밀키트 판매량도 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1인 가구만 이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다인 가구의 소비율도 높다는 점이다. 1인식을 여러 개 구매해 온 가족이 다양한 음식을 나눠 먹고, 밀키트를 이용해 조리시간을 단축하며 여유시간을 가지려는 목적에서다. 

 

우리 가족이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매일 이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소비라는 행위가 발생한다. 소비 행위 앞에서 금전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는 계층은 금전적인 부담을 더 느끼는 계층에 비해 음식 선택의 폭이 넓다. 식탁에 계층 문제가 개입되고, 부모들은 적어도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수준 그 이상을 내 자녀들도 계속해서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든든한 스펙이 돼주려는 부모의 노력에서부터 수저론이 발아된 것이 아닐까. 

 

‘밥씬’에 담기는 다양한 의미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족을 그릴 때 일명 ‘밥씬’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을 둘러싼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으로 돌아갔음을 보여주기 위한 ‘엔딩형 밥씬’의 예로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최근 상영한 이해준, 김병서 감독의 <백두산>에 등장하는 밥씬을 들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가족을 잃은 아이를 품은 ‘대안 가족’의 식사를 보여주는데, 특히 <괴물>에서는 영화 중반 잃어버린 딸과 재회하기를 바라는 판타지로서의 밥씬이 인상적이다. 가족 내 갈등과 서열을 보여주기 위한 ‘갈등형 밥씬’의 예로는 이병헌 감독의 <스물>에서 스물이 됐으나 꿈도 열정도 없이 숨만 쉬며 살아가는 치호에게 잉여적 삶을 지적하며 밥 먹을 자격이 없다고 꾸지람하는 치호 아버지나, 황동혁 감독의 <수상한 그녀>에서의 오말순과 며느리 애자의 고부간 갈등을 밥씬으로 표현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는 ‘가족 이기주의적인 밥씬’이 나온다. 비리 세관 공무원이던 최익현은 범죄조직과 손을 잡고 더 나쁜 놈이 돼간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밥씬에서, 익현은 자기 가족만큼은 살뜰하게 챙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밖에서는 범죄와 얽힌 나쁜 놈이지만, 집에서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익현. 그는 가족의 좋은 식사를 챙기고, 아들에게 영어학습을 시키며 성공을 강조한다.

또 영화나 드라마에서 ‘밥씬’은 빈부 차이를 대비해 보여주는 오랜 클리셰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신데렐라 캐릭터는 자신의 현실에서 ‘못 먹던’ 음식을 상류층 캐릭터를 통해 먹을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상류층 캐릭터는 신데렐라 캐릭터를 통해 ‘안 먹던’, 또는 ‘혐오하던’ 음식을 먹게 된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의 각본집에서 씬 넘버 장소 지시에 기택의 집을 ‘반지하’로, 박 사장의 집을 ‘부잣집’이라는 일반 명사로 표현한다.(1) 보통 고유명사인 인물의 이름을 써서 ‘누구집’으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씬번호에서 마저도 계층이 누리는 공간의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기택 가족이 박 사장의 집을 침범한 그 밤, 이들은 박 사장네의 음식과 양주를 나눠마신다. 한때 대만 카스테라 집을 운영할 만큼 경제적으로 중산층 정도였으리라 예상되는 기택 가족은 전원 백수가 된 현재, 어쩌다 벌게 된 돈으로 “만원에 열두 캔”이라는 카피로 광고된 가성비 맥주 ‘필라이트’를 마셨다. 

그런데 판타지였던 부잣집에 들어가 부자의 음식과 술을 몰래 훔쳐 즐긴다. 그 자리에서, 기택의 아들 기우는 박 사장의 딸 다혜와 정식으로 사귈 것이라고 고백한다. 기택 가족은 “그럼 이 집이 기우의 처가가 되고, 박 사장이 우리의 사돈이 되는 거냐”라며 김칫국을 마신다. ‘바퀴벌레’처럼 부자의 집을 침범하고, 부자의 음식을 훔쳐먹으며, 사돈이 될 판타지를 가지는 기택 가족의 모습은 경제적 계층 차이를 가지고 이뤄지는 결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실 이런 구도는 신데렐라형 드라마에도 흔한 설정이다. <기생충>에서도 대사로 언급하듯 사돈이 될 사람이 재벌가의 가정부이고, 사돈이 사돈의 속옷을 빨래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결혼 반대, 혼사 장애 스토리로 이어지는 것은 그럴 줄 알면서도 보게 되는 또 하나의 클리셰다.

 

‘먹고사니즘’이 잠재운 연애세포

‘같은 집에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을 식구라고 하는데, 가장 보편적인 식구의 유형은 가족이며, 요즘 여러 가족의 형태들이 존재하지만, 가족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결혼, 출생 또는 입양을 통해 맺어진 사람들의 집단’이다. 결혼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관계를 맺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결혼의 주체인 ‘남녀’의 문제, ‘정식’이라는 방법적 문제, ‘부부관계’의 의미 문제 등 여러 쟁점이 있지만, 남성과 여성이 제도권 안에서 부부로 연을 맺는 결혼이 가족을 이루는 작은 단위임은 분명하다. 

결혼은 가문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개인의 문제로 점점 축소돼왔다. 농경시대 가족의 의미와 현재 가족의 의미는 속박과 보호, 부양의 개념에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란 가부장제의 틀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아래 먹고 살기도 힘든 시기에 이뤄지는 결혼이란 상대로 인해 내 삶이 결정될 확률이 높다. 법적으로 피부양자와 부양자의 관계가 생성된다는 것, 그 자체는 부양하는 것도 부양을 받는 것도 모두가 물적·심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다. 

연인이 만나 식구를 형성하는 동거와 달리, 결혼은 제도적으로 서로의 가족이 선택 불가능한 패키지가 돼 얽히게 된다. 그 얽힘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면 결혼 자체를 거부하고 비혼을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행복 문제다. 현재의 결혼은 이전보다 다분히 개인적인 일임에도 비혼을 사회적 문제로 삼는 이유는 국가의 미래를 생각할 때, 비혼이 저출산과 인구절벽으로 이어진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사회는 개인의 결혼 여부보다는 생산가능 인구에 대한 걱정이 앞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혼가구의 출산에도 정부의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교감하고 사랑을 나누는 그 자체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고 피로를 느끼는 N포 세대들이 연애 자체를 기피하는 현실 속에서 큰 실효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먹고사니즘’이 잠재워버린 연애세포가 깨어나지 않는 이상,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은 현실적으로 판타지에 그친다. 

 

“여자는 결혼하면 평생 노예”

누군가의 결혼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농담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아깝더라.” 이런 말은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외모로, 학벌로, 부모의 스펙으로 이들은 결혼하거나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두 사람을 비교한다. 그리고 누가 더 손해인지를 따진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손해율을 낮춰 생존해야만 하는 결혼적령기 청춘들 당사자들에게는 더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된다. 손해를 감수하고 시간과 감정을 낭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비혼 인구가 증가하는 가운데서도 결혼 시장은 유지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데이트 비용, 썸 타는 시간과 그로 인한 감정을 낭비하지 않고 조건에 맞춰 만나 결혼하는 것, 누가 누구에게 손해인지, 내가 먹을 음식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해서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너지가 생길지 아닐지 업체를 통해 검증받고 만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결혼 문화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상류 지향적이다. 자기가 소유한 것을 일정 부분 공유한 것까지는 어쩔 수 없더라도, 깎아 내려가는 것까지는 감당하기 싫은 것은 합리적인 마인드 말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부모가 결사반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먼저 신데렐라의 배우자가 되기를 꺼리는 것이다. 

여성에게 이는 더 큰 문제로 따라붙는다. 여성은 결혼하면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주류를 이룬다는 보고가 있듯이, 여성은 결혼하면 결혼 전 누리던 지위와 자유로운 삶에서 한발 내려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여성의 생애를 갈등적 성별화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김이선, 박경숙의 연구에서 비혼, 만혼, 저출산,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증가와 같은 현상이 여성들이 성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 사회의 성별화된 규범과 제도가 여전히 공고하게 유지되면서 여성의 삶에 다양한 갈등을 일으키고, 그로 인한 갈등적 ‘이탈’이 다양해지고 있는 여성의 생애를 발현한다고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2) 

결혼이 손해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 이전에, 여성에게는 출산과 양육, 맞벌이까지 수행해야 하는 역할로서 평생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문제가 된다. 출산할 경우, 남성이 양육을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는다면 여성은 독박육아를 감당해야 하고, 그로 인한 경력단절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삶의 만족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다른 의미의 보고들이 있듯이 긍정적 영향도 부정할 수는 없다. 

 

‘비혼 선택’인가, ‘결혼 포기’인가

그렇다면 결혼과 연애를 떠나 평생 혼자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앞서 언급한 ‘먹고사는 문제’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이 또한 미래의 판타지이자, 두려움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등장하는 비혼 캐릭터들은 혼자 자신만의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혹은 ‘짠내’를 풍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웃음을 주지만(<미운 우리 새끼>, <나 혼자 산다> 등), 여하튼 그들의 삶의 영역에서 ‘무엇을 먹고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걱정은 필요가 없어 보인다. 즉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나, 단지 외로움만이 문제가 된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판타지가 성립한다. 

그러나, 그들처럼 잘 먹고 잘 살지 못하는 현실 앞에 혼자 살아가는 것은 불안으로 다가온다. 이런 불안에 대해서 한편으로 비혼인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무능하게 바라보는 편협한 시선이 깔린 지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경제력이 있음에도 비혼을 선택하는 자발적 비혼이 많다 하더라도 비자발적 비혼 역시 많은 현실을 생각해 보면 가능한 걱정이다.

경제적인 것보다 더 본능적인 문제는 외로움이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연대할 무언가를 찾는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으며 모임을 만들거나 찾아가고 일회적으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온라인의 만남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질 때, 에바 일루즈의 지적처럼 온라인에서의 기대감이 오프라인에서는 실망감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온라인의 존재와 오프라인의 존재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에 대한 느낌이 오프라인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치가 낮고, 실망할 일도 없고, 오히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일회적 관계성이 연속되는 것을 피곤하다고 느낀다. 감정을 꾸준히 공유하는 것도 구속받는 것도 싫어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혼자의 존재로 남는 것, 그렇게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외로움과 두려움은 또 가지고 있다. 혼밥과 혼술을 하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혼자의 일상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은 열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사람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콘텐츠에서 로맨스를 즐긴다. 웹 소설과 웹툰의 로맨스 영역은 상상 그 이상의 세계로 나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는 웹 소설이나 웹툰과 비교해 제작 공정이 상대적으로 길다. 그래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로맨스 감성의 흐름을 따라잡으려면 기획에서부터 세태를 앞서가거나 혹은 보편의 감성을 가진 신선함으로 다가가야 성공이 가능하다고 기획자들은 지적한다. 최근 흥행한 김한결 감독의 <가장 보통의 연애>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기획이 통했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로맨스물이다. 

<가장 보통의 연애>는 요즘을 살아가는 남녀의 현실 연애로 리얼함과 쪼잔함을 살려줘 공감을 얻었고, <동백꽃 필 무렵>은 싱글맘에게도 순정을 바치는 직진형 ‘촌므파탈’ 용식이 캐릭터를 내세워 사랑을 받았다. 두 작품은 모두 공효진 배우가 주연을 맡았는데, 기존 로맨스물의 여성 캐릭터와 달리 현실적이고 당당하게 변화된 여성 캐릭터의 로맨스로 앞서가 더욱 주목을 받았다. 

마크 펜과 메러디스 파인만은 『마이크로트렌드X』에서 ‘비혼족’에 대해,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독신인구가 증가했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비혼의 주요원인이 실업이며, 비혼이 겪는 제도적 불리함과 노년의 안전망에 대한 불안 때문에 ‘비혼 트렌드’는 어느 순간 정점을 찍고 결혼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결혼의 귀환’을 예측한다.(3) ‘결혼의 귀환’이라는 말 자체가 결혼이 바른 것이고 비혼은 그른 것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결혼이든 비혼이든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고 무엇이 올바른지 말할 수 있는 가치는 아니다. 

다만, ‘비혼 선택’이 아닌 ‘결혼 포기’라면 다른 문제다. 연애도 포기, 결혼도 포기, 관계와 연대 등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는, 그런 한편 로맨스를 콘텐츠로 즐기는 N포 세대들이 살아가는 상황은 좀 더 나아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결혼이 귀환을 하든, 연애가 귀환을 하든 다 좋다. 그 영역이 포기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 온다면 말이다. 

 

 

글·송연주
세종대학교와 정화예술대에서 대중예술과 시나리오를 강의했으며 영화를 연구하고 글을 쓰고 있다.


(1) 봉준호, 한진원, 김대환, 이다혜, 기생충 각본집, 플레인아카이브, 2019.
(2) 김이선, 박경숙(2019), 한국 여성의 생애: 갈등적 성별화와 계층화, <경제와 사회>, 138-170. 
(3) 마크 펜, 메러디스 파인만, 『마이크로트렌드X』, 도서출판 길벗, 서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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