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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1) - 문학과 철학이 실존에게 권하는 숙명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1) - 문학과 철학이 실존에게 권하는 숙명
  • 안치용 l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 승인 2020.02.2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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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리의 창(Johari’s window)’은 인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심리학의 분석틀이다. 나와 타인이 맺는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고, 개선점까지 보여주는 간명한 관계해명 방법론이다. ‘조하리의 창’은 조셉 러프트와 해리 잉햄이라는 두 심리학자가 1955년에 제시했으며 ‘조하리(Johari)’는 두 사람 이름의 앞부분을 합성한 말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조하리의 창은 4가지로 구성된다. 사용되는 변수는 ‘나’와 ‘남’(혹은 타인, 타자), ‘안다’와 ‘모른다’다. ‘2×2’이기에 4분면이 만들어진다. 자신도 알고 타인도 아는 ‘열린(open) 창’[A], 자신은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숨겨진(hidden) 창’[B], 나는 모르지만 타인은 아는 ‘보이지 않는(blind) 창’[C],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unknown) 창’[D]의 4개다. (그림 참조) 

심리학이나 처세, 마케팅에서는 이 4분면을 실용적 전략을 수립하는 데 많이 써먹는다. 당연히 자기계발 모델이나 전략 모형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 예컨대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신천지예수교회를 ‘나’로 놓고 다른 교회들을 ‘타인’으로 놓으면, 신천지의 ‘추수꾼’은 아마도 ‘숨겨진(hidden) 창’에 해당한다. ‘추수꾼 포교전략’은 신천지가 기성 정통 교회를 ‘추수할 밭’이라고 부르며 신천지 신도를 정통교회로 보내 기성 교회를 신천지화하는 포교방법이다. ‘나’와 ‘타인’을 반대로 놓으면, 즉 ‘나’가 신천지가 아닌 다른 기성 기독교 교회일 때 ‘추수꾼’은 ‘보이지 않는(blind) 창’이 된다. 코로나19는 말하자면 ‘미지의(unknown) 창’으로, 지금은 전체 4분면 가운데 D의 영역이 급속도로 확대돼 다른 영역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잠식하는 비상상황인 셈이다. 알려진 ‘미지(未知)’는 더 이상 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이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열린’ 창의 국면이 대대적으로 열리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신천지 입장에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국면이 도래했다고 하겠다.

 

문학과 조하리의 창

 

‘조하리의 창’이 보여주는 이런 범용성은 어쩌면 여기에 따라붙은 ‘분석틀’이란 명칭이 과도한 것임을 시사하는 근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범용성과 또 유용성을 문제 삼기보다는 그것들에 기대 여기서는 ‘조하리의 창’으로 문예사조를 분석해 보자. 

사전(事前)적 논의로, 흔히 말하는 고전주의나 사실주의는 정의(定義)에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논란이 적은 편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이 자리에서 문예사조 자체를 정의하고 넘어가고자 하면 더 이상 이야기를 진전시킬 수 없기에 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는 정의된 것으로 하고,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에 대해선 프랑스 소설 『시르트의 바닷가』의 저자 쥘리앙 그라크의 견해를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그라크는 실존주의를 “매혹적이지만 맥 빠진 화해의 길”이라고, 초현실주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신뢰”라고 평가했다. 얼핏 세상에 떠도는 가벼운 지식을 참조하면 그라크의 설명이 반대로 된 것처럼 느껴질 법하다. 그러나 나는 그라크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조하리의 창’과 문예사조를 결합해 보자. 자신도 알고 타인도 아는 ‘열린(open) 창’, 즉 [A]분면은 고전주의 혹은 사실주의에 해당한다. 명료하고 투명한 세계를 전제한 이 사조들은 ‘열린 창’이 아니라면 존재할 수가 없다.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표명하는 전형성을 떠올리면 다른 창을 상상할 수가 없다.

자신은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숨겨진(hidden) 창’, 즉 [B]분면은 초현실주의이다. 여기서 ‘나’는 작가 혹은 텍스트를 뜻할 수밖에 없다고 할 때, 또 현실 또는 사건은 자체로서 공공연하게 인지된다기보다는 표현되고 구성된다고 할 때, 그것은 ‘나’를 통할 수밖에 없다. ‘나’의 ‘숨겨진(hidden)’ 통찰과 전언이 더욱 더 ‘숨겨진’ 것일수록, 즉 더 독특하고 심오한 것일수록 독자나 사회는 ‘열린(open)’ 맥락에서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기에, 발화자의 심오함은 청자에게 기괴함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만일 어떤 문학(작품)이 전적으로 [B]분면에 위치한다면 그것은 문학이라기보다는 비의(秘義)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B]분면의 문학(작품)은 대체로 A•C•D분면에도 걸쳐질 수밖에 없기에 독자나 사회는 4분면의 종합과 비교를 통해서 비의에 가까운 통찰과 전언(의 일부)을 파악할 수 있다. 주로 [B]분면에 위치하는 문학(작품)은 광휘와 고통을 함께 드러내거나 함께 겪기 마련이다. 비의에 근접한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다.

나는 모르지만 타인은 아는 ‘보이지 않는(blind) 창’, 즉 [C]분면은 낭만주의와 연결된다. 고전주의가 주체와 세상 사이의 ‘조화와 소통’에 관한 확신을 표상한다면, 낭만주의는 그 ‘조화와 소통’에 관한 ‘분열과 불신’을 직관적으로 토로한다. 정도의 차이가 없지 않겠지만 두 사조에서는 모두 주체와 세상을 긍정한다. ‘주체 없는 낭만’이란 말처럼 말 같지 않은 말은 없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주체는 긍정하지만 부재하는 주체이며, 세계의 책략에 쉬이 휘둘린다. ‘질풍노도(Sturm und Drang)’가 대표적이다.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unknown) 창’, 즉 [D]분면은 실존주의를 뜻할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의 ‘나’는 ‘나’임을 확증할 수 없는 ‘나’로 주어지며, 타인 또한 타인으로 확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타인이란 다른 ‘나’에 불과하기에 ‘나’를 확증할 수 없듯이 다른 ‘나’(들) 또한 확증되지 않으며 ‘나’와 마찬가지로 잠정적으로 주어질 따름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내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르는 타인과 마주앉아, 혹은 마주앉았다고 가정하며 대화하는 양상이 [D]분면에서 일어난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려보라. 고도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의 허무한 독백이 작품의 전편을 채운다.

 

앎은 어떻게 판정되나

실존주의를 설명하며 지적된 ‘나’와 ‘타인’의 불확정성과 모호성은, ‘안다’ 또는 ‘모른다’고 할 때의 그 ‘앎’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조하리의 창’의 4분면은 흥미로운 생각을 담아낼 수 있지만, 그 창이란 게 겉보기만 그럴 듯 할 뿐 대단히 취약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부각된다. 우리는 앎과 모름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일단 ‘나’는 ‘나’의 인식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덴마크 요구르트 플레인’이라고 적힌 용기에 담긴 무엇인가를 마시는데, 그것이 ‘플레인 요구르트’가 아니라 ‘딸기 요구르트’였다면 ‘나’의 앎과 ‘타인’의 앎은 달라진다. ‘나’는 남들이 ‘플레인 요구르트’라고 믿고 있는 것을 마시고 있지만 실제로는 ‘딸기 요구르트’를 마시고 있으며, 타인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나’만 알고 있다. ‘조하리의 창’ 구분법으로는 ‘숨겨진(hidden) 창’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확실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가 언제나 확실하다는 말은 ‘나에게’ 확실하다는 제약을 가진다. 확실하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란 보증은 없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대체로 진실과 무관하다. 예를 들어 ‘덴마크 요구르트 플레인’이라고 적힌 용기 안의 ‘딸기 요구르트’를 마시는 상황에서 ‘나’는 ‘딸기 요구르트’ 대신 다른 종류의 요구르트를 마신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요구르트는 비유의 소재로 든 것이기에 범위를 세상사로 확장하면 그런 판단착오는 삶에서 수도 없이 일어나며, 또한 그런 일을 있어나게 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를 댈 수 있다.

영화나 문학에서 흔히 다루듯이, ‘나’는 ‘덴마크 요구르트 플레인’이라고 적힌 용기 안의 ‘딸기 요구르트’를 마시며 그것을 ‘딸기 요구르트’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하면 타인의 판단에 순응해 ‘플레인 요구르트’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또는 실제로 미각과 반대로 ‘플레인 요구르트’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나’는 언제나 확실하지만 항상 판단을 강요받는, 신뢰할 수 없고 허약한 존재이며 ‘나’의 앎은 그런 ‘나’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잠정적이고 임의적인 앎일 가능성을 상존케 한다.

‘조하리의 창’에서 앎의 대상은 세계다. ‘안다’와 ‘모른다’고 말하려면 같은 세계를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전제를 충족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전제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다. 추측컨대 인식의 대상으로 설정된 세계는 설정하는 개인의 수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얼마나 많은 세계를 인간이 자기의 인식 대상으로 대면했는지를 파악해낼 방도는 없다. 

우리(또는 ‘나’들)는 자기가 대면하고 대상화해 알게 됐다고 말하는, 즉 발화한 개인(들)의 인식만을 전해들을 수 있고, 그 전해들음과 자신의 인식을 비교할 있을 뿐 ‘나’와 다른 ‘나’들의 세계 자체를 비교할 수는 없다. 만일 색맹인 사람이 있어 빨간색을 보고 파란색으로 판단하는데 주변에 같은 색맹인 사람들만 있다면, 그들은 세계의 실체와 무관한 진실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저 파란색의 화성을 봐라”란 말이 진실로 인정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의 비교가 아니라 앎 자체임이 자명해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비교할 수는 없고 세계관만을 비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나’가 아닌 다른 ‘나’들의 ‘앎’들 또는 ‘세계관’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나’는 단수이지만 다른 ‘나’들인 타인 혹은 남은 복수이기에, 예컨대 ‘조하리의 창’을 작동시키기 위한 판단의 비교 같은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가 “아 저 파란색의 화성을 봐라”고 판단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집단에 소속돼 있을 때 ‘나’가 화성을 붉은 행성으로 파악한다면 ‘조하리의 창’에 의거해 ‘나’는 ‘숨겨진(hidden) 창’에 속하겠지만, 만일 주변 사람들이 예외적으로 색깔을 ‘정상적으로’ 파악해 ‘나’와 마찬가지로 화성을 붉은 행성으로 파악한다면 ‘열린(open) 창’이 열리게 된다. ‘나’와 ‘나’와 같은 색(色)인식을 하는 사람들을 묶어서 ‘숨겨진(hidden) 창’이라고 분류하는 방법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계층구분을 수행하는 사회과학이지 앎과 모름을 판정하는 인식론은 아니다. 

인식론적으로 ‘조하리의 창’을 운영하려면, 앞서 지적하였듯 진실과 일치(T)하든 아니든(F), 언제나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나’의 인식과 ‘타인’의 인식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다른 ‘나’들인 ‘타인’의 인식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타인’은 다른 ‘나’들이므로 ‘나’와 비교하여 ‘타인’만의 단일값이 주어져야 한다. ‘나’의 인식과 비교되는 ‘타인’의 인식을 구해되는 방법은 평균값 아니면 지배값일 수밖에 없다. 정규분포하는 값들에서 얻어진 평균값은 천박해질 위험을 내포하지만 그나마 합당한 값이라고 하겠다. ‘나’는, 합당한 값인 이 평균값이 투명하게 주어지는 환경에 속해 있다면 ‘나’의 값과 말하자면 ‘전체’의 값을 비교할 수 있게 되고 ‘나’의 값은 정규분포 안으로 끼어들어 그 안에서 비교가능성을 획득한다. 평균값을 산출할 수 있는 정규분포상의 한 지점은 평균값과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전체 값들의 정규분포와 무관하게 특정한 값이 권위/권력/지배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 둘 사이에 분명 차이가 있지만 플라톤이 생각하는 세상이나 히틀러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이런 지배값이 주어진다. 이 때 전체는 정규분포하고 평균값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평균값 대신 지배값이 ‘나’가 아닌 타인의 값을 대표한다. ‘나’의 값은 지배값과 동일한 값으로 수렴되어야 한다고 강요받고 따라서 그것을 ‘나’의 값으로 표명해야 하지만, ‘나’의 인식은 ‘나’의 값이 지배값과 다르다고 판단할 수는 있다. 평균값이든 지배값이든, 그런 것이 주어지면 ‘나’의 값과 타인의 값 사이의 비교가 가능해진다.  

이런 비교 또는 측정이 가능한 4분면은 [A]이다. 고전주의와 사실주의가 자리한 [A]분면은 얼핏 소통과 공감의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해와 단절의 위험이 도사린 공간이다. 작가의 인식론과 그 인식론의 결과물인 문학(작품)은, 작가인 ‘나’의 값과 평균값/지배값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게 된다. 문제는 그 거리를 보는 독자가 자신만의, 즉 개인의 값으로 거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여러 개의 거리가 제시된다는 데서 생긴다. 즉 평균값 또는 지배값, 작가(작품)의 값, 독자의 값이란 세 가지 값이 (방향을 빼면) 세 가지 거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측정된 지점들 사이에서 거리를 파악하게 되면 차이가 확인되고, 차이에 대한 인식은 배제와 소외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A]분면을 인식론이 아니라 사회모델로 파악하면 더 뚜렷해진다. 

[B]분면은 ‘나’의 값은 존재하지만 타인의 값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타인의 값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배값이 없거나 평균값이 없다는 뜻이다. 지배값이 없는 상황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평균값이 없는 상황은 평균값을 구해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작가는, 비교 없이 또한 거리 없이 작품을 순수하게 타자 속으로 던져 넣는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비교가 아니라, 비교를 통한 거리의 제시가 아니라, 그저 세계를 응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신뢰”라고 한 그라크의 촌평은 적학하다.

[C]분면은 자신의 값이 없고 평균값이나 지배값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절의 가능성이 극대화한다. 개인은 자신의 값을 갖지 못한 채 평균값이나 지배값에 압도당하거나 수없이 길게 나열된 개인들의 값 앞에서 부유한다. 자기 값이 없으므로 거리를 측정할 수 없고 그리하여 행동의 방향을 잃는다. 작가는 자기 값을 모른 채 정규분포할 것으로 추정되는 타인(혹은 세계) 속으로 무작정 뛰어들 수밖에 없다. 돌발성과 우연성에 지배받으며, 형상화하는 방식에서 어떤 특정한 타인의 값과 충돌할 개연성이 크다. 극지방의 오로라와 비슷하다. 태양에서 출발한 입자가 지구에서 오로라로 현현하는 것은 지구를 둘러싼 ‘반앨런대(Van Allen Belt)’에 비켜 맞을 때다. 낭만주의는 타자의 값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에 항구적이지 않고 변화에 노출된다. 영구적인 낭만주의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D]분면은 ‘나’와 다른 ‘나’들인 타인의 값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측정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해와 소통의 불능이 근본적 조건이다. ‘나’는 부재한 나의 값과 마찬가지로 부재한 나머지 ‘나’들의 값을 직관적으로 수용한다. 실존주의는 그럼에도 그 차이를 발견해 내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는 도대체 다름과 차이를 어떻게 확인해 내는가. 숨은 기준을 상정하고, 지각된 값의 현상을 보정함으로써 그러한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예를 들어 실존주의는 “거북이가 7Km로 가고 토끼가 70Km로 간다”는 문장을 보면 차이가 있다고 가정한다. 사실 이 문장 자체는 아무 것도 해명하지 않는다. 토끼가 1년에 걸쳐 70Km를 갔는지, 쳇바퀴 돌 듯 근처를 맴돌았는지 등 판단을 가능케 할 근거가 없다. 실존주의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7Km와 70Km의 유비에서 ‘/h’를 발굴하여 삽입하는 해석을 가한다. 단일한 분모를 부여하는 보정만이 실존주의가 성립할 수 있는 궁여지책이다. 그라크가 실존주의를 “매혹적이지만 맥 빠진 화해의 길”이라고 말한 맥락이 이것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아비뇽 페스티벌, 1978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

‘조하리의 창’을 인식론 및 문예사조와 결합하여 살펴본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존재론까지 검토한다면, 근대 이후 우리는 점점 실존주의적인 [D] 분면으로 이행했음을 알 수 있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 즉 ‘der Geworfene’라고 주장한다. 설득력 있는 구상이지만, 문제는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은 던지는, 말하자면 더 상위의 존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데 던지는 존재에 대해선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점이다.

‘der Geworfene’ 구상에서 분명 심원한 측면을 찾아낼 수 있지만, 즉 ‘던져짐’이란 국면부터 설명하기 시작함으로써 삶의 현상적 실체와 고통을 잘 잡아낼 수 있지만, ‘던져짐’을 단정함으로써 그것이 실존주의가 거부한 형이상학으로 귀결한다는 난점 또한 돌출한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실존주의는 종종 ‘던져짐’ 이전을 편의적으로 구축해내기에 이른다. 즉 토끼와 거북이의 이동을, 임의로 ‘/h’를 채워 넣음으로써 속도로 변경한다. 

모르는 ‘나’의 값과 모르는 ‘평균값’을 비교해 그 차이를 찾아내고 거기에서 인간 존재의 좌절과 고통을 그려내는 마술을 실존주의가 행한 셈이다. 마술은 언제나 매혹적이지만 마술 없는 세상이 실제로는 너무 삭막하다는 걸 망각케 한다. 실존주의는 출발지점의 진지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경박해질 위험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한다. 

‘조하리의 창’의 4분면을 문예사조와 인식론의 프리즘을 통해 살펴본 결과, 삶의 현장에서는 어쩌면 우리에게 “매혹적이지만 맥 빠진 화해의 길”인 실존주의 말고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낭만주의 또한 매혹적이지만 오래 갈 수 없는 길이다. 고전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세계에 대한 이상과 추구는 포기할 수 없겠지만 삶을 그것들로 채울 수는 없다. 초현실주의는 더 어렵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신뢰”를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

그러므로 ‘나’에겐 맥 빠진 화해의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그 길은 더 이상 매혹적이지도 않다. 낡고 찢어진 깃발처럼 초라해진 실존주의 너머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실존을 구해 와야 할 텐데, 그것도 형이상학화의 위험을 회피하며 구해야 할 텐데,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실존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실존이 무너진 세계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을 복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 들을 귀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모종의 계시를 통해서 복원이 이뤄질 수도 있겠지만 ‘나’와 다른 ‘나’들이,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 값을 확인하고 비교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는 과정이 더 의의를 갖는다. 실제로 더 의의를 가진다기보다는 더 의의를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실존도 없다. 일종의 “맥빠진 화해의 길”은 그 앞에 천길 벼랑이 있다고 해도 갈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는 견지에서 우리의 실존은 우리의 숙명이다. 실존은 이런 방식으로 계시와 조우하는 모양이다. 문학은 그 숙명을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 

 

 

<편집자주>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는 <르몽드 북클럽 ‘수야문향’(수요일 밤, 문학의 향기에 빠지다)-안치용과 함께 하는 죽어서도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 100>의 매과정 결과물을 정리해 격월로 연재됩니다. 총 100권의 세계문학 명저를 읽는 르몽드 독서스쿨 ‘수야문향’은 2개월짜리 강좌 17개로 구성돼, 총 34개월에 걸쳐 진행됩니다. 2개월에 6권, 매주 한 권씩 미리 정한 책을 읽고 금요일 오후에 모여 토론회를 진행한 뒤 7번째 주에 특강을 듣는 ‘6+1’ 방식으로 각 과정이 이뤄집니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이 독서길잡이 겸 인문학멘토로서 함께 합니다. ‘수야문향’은 3~4월에 13과정 ‘수상한 속죄’가 진행됩니다. 

▲어머니(막심 고리키) ▲거대한 잠(레이먼드 챈들러) ▲추락(J. M. 쿠체) ▲수상한 라트비아인(조르주 심농) ▲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속죄(이언 매큐언) ▲특강(안치용)으로 구성됩니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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