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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모리타 도지, 전공투 세대의 상처와 침묵을 노래하다
[이혜진의 문화톡톡] 모리타 도지, 전공투 세대의 상처와 침묵을 노래하다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0.03.03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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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안보투쟁(출처: 위키백과)
1960년대 안보투쟁(출처: 위키백과)

일본의 안보투쟁과 1960년대의 아이들

전 세계적으로 1960년대는 혁명의 시대로 지칭된다. 일본의 경우 그것은 전후 일본 최대의 시민운동으로 고양되었던 미일 안보반대투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과 일본은 이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맞춰 종전 안보조약을 체결한 상태였지만,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수상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자유주의 세계가 단결해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1951년에 체결된 안보조약이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응하기에 미흡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1958년 일본에 안보조약 전면 개정을 제안하면서 양국은 극비리에 교섭을 추진해갔다. 일본 방위에 대한 미국의 의무를 새롭게 추가·개정한 1960년의 신안보조약의 핵심은 미국과 일본의 군사적 동맹관계를 보다 강화함으로써 공동 방위는 물론,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을 촉구하기 위한 물적 기반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었다. 즉 패전국 일본과 점령국 미국의 기묘한 공모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 국민의 격렬한 반대 시위가 연이어 불거진 상황에서 1960529일 기시 수상은 안보 폐기를 주창하는 사회당이 진입할 수 없도록 국회본회의장의 출입구를 통제한 채 신안보조약을 기습 체결해버렸다. 이렇게 개정된 신안보조약이 196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일본의 긴밀한 군사적 동맹관계의 명분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20118미일 안보조약 개정 60주년 성명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60년간 두 위대한 국가 사이의 바다처럼 단단한 동맹은 미국과 일본, 인도-태평양 지역, 전 세계의 평화와 안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일본에서는 안보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시민운동이 이어졌고 급기야 시위대가 수상 관저를 포위하기에 이르자 기시 수상은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퇴했다. 1960년대 초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일본의 청년세대를 안보투쟁 세대라고 부르는데, 이른바 이 안보투쟁 세대는 1965년에 결성되어 도쿄대학의 야스다 강당 사건(1968)과 아사마 산장 사건(1972)의 급진적 폭력투쟁을 계기로 하여 급격하게 퇴보한 전공투 세대와 종종 정치적으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이 두 세대는 사회적·문화적인 범주에서 동시대의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이 세대들은 패전 이후에 태어나 1960-7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3종의 신기로 일컬어졌던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와 ‘3C’로 불렸던 자동차, 에어컨, 컬러TV를 일상에서 누렸다. 또한 인스턴트 라면을 먹은 첫 세대이자 신칸센(1964)을 타고 도쿄 올림픽(1964)을 관람하는 등 일본의 GNP가 미국의 뒤를 이어 세계 제 2위를 차지했던(1968) 고도경제성장을 경험한 부류였다는 점에서 공통의 문화감각을 소유하고 있었다.

 

전공투(전학공투회의)운동(출처: 위키백과)
전공투(전학공투회의)운동(출처: 위키백과)

전전(戰前) 세대와 분명히 구별되는 이 세대의 대중운동은 일본 정부 주도의 고도경제성장정책이 낳은 부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감각이 갖고 있는 특별함이란 기성 질서와의 충돌을 통해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대중소비사회의 움직임을 선도하면서 개인을 둘러싼 일본 사회 전체에 총체적인 이의 제기를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경제성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0년대 말에 활약한 전공투 세대는 시민 대중의 역량이 총집중되었던 안보투쟁 때와 달리 계급투쟁이나 혁명의식이 대중과 점점 멀어진 시기에 오히려 학원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활동했다. 이러한 특징은 동시대인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례가 없을 만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함으로써 사회제도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감성적 측면에서의 자유를 모색하는 등 개인의 정체성을 둘러싼 자기 확인의 수단을 찾는 데 몰두했다.

왼손에는 아사히 저널, 오른손에는 소년 매거진을 들고, 낮에는 데모를 하고 밤에는 카페에서 재즈뮤직을 들었던 이 전공투 세대는 미일안보체제가 구축되어가는 과정에서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갖고 있는 공소함을 목도하고 있었다. 그 흐름은 급기야 그들의 운동 방침에 극단적인 폭력투쟁의 명분을 가져다주었고, 또 그것이 대중과의 단절로 이어지게 되면서 마침내 일본 학생운동은 궤멸에 이르게 되었다.

 

모리타 도지(출처: Youtube)
모리타 도지(출처: Youtube)

일본 포크계의 신비주의, 모리타 도지

대중음악 분야에서 볼 때 1960년대의 일본에서는 미국의 팝 씬을 모방한 대중음악이 유행을 선도해가던 가운데, 1966년 비틀즈의 일본 공연을 계기로 영국 리버플계 사운드를 모방한 일본 밴드들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이른바 일본 그룹사운드(GS)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비틀즈의 공연은 일본의 청년들에게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의 흥분과 새로운 형태의 오락을 제공해 줌으로써 음악과 패션을 비롯하여 모든 기성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러나 반체제운동의 최전선에 선 일군의 청년들은 GS 붐에 대한 반동으로, 지적이면서도 서브 컬처의 분위기를 강하게 띤 밥 딜런과 같이 뉴 포크계를 계승한 포크가수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현재 일본 포크계에서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여성 싱어 송 라이터 모리타 도지(森田童子)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1952년 아오모리(青森)에서 출생한 모리타 도지는 고등학교 시절 도쿄교육대학의 학생운동 세력과 교류하면서 퇴학을 당했다. 그 이후 전공투 운동에 가담했던 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1972년 연합적군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전공투 세력이 완전한 궤멸에 이른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약 9년간 활동했던 모리타 도지는 7장의 앨범과 4장의 싱글을 통해 대략 50여 곡을 발표하고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는 것만으로도 대중에 매우 신비로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매우 과묵한 데다 현재까지도 본명을 비롯하여 그녀에 대한 어떤 사생활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에서도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드물게 신비주의에 속한다. 크게 부풀린 긴 웨이브 헤어 스타일에 짙은 색 선글라스, 그리고 항상 어쿠스틱 기타를 등에 매고 있는 모습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데, 대인기피증을 앓기도 했던 그녀는 대중 앞에서 단 한 번도 선글라스를 벗은 적이 없으며 또 그 누구도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모리타 도지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보여주듯이, 그녀의 노래는 대체로 우울하고 폐쇄적이며 현실도피적인 색채를 띤다. 또한 시종일관 외롭고 쓸쓸한 와 그 어디에도 없는 ’, 혹은 정처 없이 떠돌고 방황하는 와 그런 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 그리고 생의 고독과 허망과 죽음의 감성을 마치 시를 읊조리는 것처럼 조용히 내뱉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지막히 읊조리듯 노래하는 모리타 도지의 가냘프고 쓸쓸한 목소리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피아노 선율, 그리고 첼로와 기타 현의 울림이 강약을 반복하면서 슬픔과 비애의 분위기를 더해주는 그녀의 곡들은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저절로 빠져드는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친구의 죽음을 소재로 한 모리타 도지의 데뷔곡 <안녕, 내 친구(さよなら僕の友だち)>(1975)는 그녀의 친구가 왜 죽었고 또 왜 그녀가 그것을 애달프게 노래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느끼게 해준다.

 

……

동료가 체포된 일요일 아침

미친 듯이 빗속을 달렸던 다정한 너는

그때부터 변해버렸지

안녕, 내 친구

 

긴 수염에 과묵했던 네가

돌아오지 않은 방안에

너의 칫솔과 코트가 남아있네

안녕, 내 친구

 

나약하고 다정하고 조용한 너를

나는 정말 좋아했었어

너는 나의 좋은 친구였었지

안녕, 내 친구

안녕, 내 친구

 

드라마 '고교교사'(1993)
드라마 '고교교사'(1993)

전공투 세대의 침묵

미국의 히피들이 그랬듯 1960-70년대 저항문화의 상징으로 통했던 장발에 수염을 길게 길렀던 과묵하고도 다정했던 그 친구는 이제 다시는 나에게 돌아오지 못한다. 밤새도록 함께 술을 마시고 나서 쓸쓸히 잠들곤 했던 그 친구는 이제 슬프도록 빛바랜 청춘(早春にて)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아주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 친구를 생각하면 는 눈물이 난다(君は変わっちゃったネ). 모리타 도지의 첫 앨범 <Good Bye>(1975)는 제목이 암시해 주듯이 이제는 빛바랜 추억으로만 남은 친구와의 작별을, 그리고 퇴색한 청춘의 기억을 홀로 간직하고 있는 의 쓸쓸함을 담담한 목소리로 일관되게 노래하고 있다.

당시 모리타 도지는 소규모 라이브 하우스에서의 공연을 이어가면서 조금씩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지만, 1983년 돌연 은퇴 선언을 하고 사라진 이후 대중에게 완전히 잊혀져버렸다. 그랬던 모리타가 현재 일본의 전설적인 포크가수가 된 데는 드라마 작가 노지마 신지(野島伸司)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1993년 노지마 신지 극본의 드라마 <고교교사(高校教師)>에 모리타 도지의 <우리들의 실패(ぼくたちの失敗)>가 주제곡으로 사용되자 그 곡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시청자들의 문의가 쇄도하면서 그녀가 재조명되었기 때문이다.

노지마 신지는 그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 친구의 손에 이끌려 갔던 모리타 도지의 라이브 공연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경험을 되살려 1993년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사용했고, 이후 극장판 <고교교사>에서도 역시 모리타의 곡 <만약 내가 죽는다면(たとえばぼくが死んだら)>을 다시 사용했다. 드라마 <고교교사>가 대중에 화제가 되자 곧바로 모리타 도지의 베스트 앨범과 초기 앨범이 재발매되면서 새로운 팬 층이 형성되었지만, 그녀는 그저 주부 역할에만 전념할 뿐 음악활동을 재개할 생각이 없다면서 또 다시 칩거해 버렸다. 현재 모리타 도지의 대표곡으로 꼽히고 있는 <우리들의 실패> 역시 1집 앨범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봄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에서

너의 다정함에 묻혀있던 나는 겁쟁이였어

언젠가 너와 이야기를 나누다 지쳐서 입을 다물어버렸지

스토브 대신 전열기가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어

지하의 재즈카페, 변함없이 우리가 있었지

악몽과 같은 시간이 흘러가네

 

나 홀로 남은 방안에서 네가 좋아하는

Charlie parker를 발견했지, 나를 잊어버렸을까

망가진 나를 보면 너도 깜짝 놀라겠지

그 애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을까, 다 옛날이야기지만

봄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에서

너의 다정함에 묻혀있던 나는 겁쟁이였어

 

1970년 3월 일본적군파의 요도호 납치사건(출처: 매일신문)
1970년 3월 일본적군파의 요도호 납치사건(출처: 매일신문)

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 말라는 전공투의 슬로건을 배반이라도 하듯이, 연대를 구하지도 못하고 결국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나약한 겁쟁이가 되어버린 전공투의 다양한 층위의 사상적 명제들이 결국은 폭력투쟁으로 변질되거나 그저 단순히 자기 확인으로만 그쳤다는 세간의 평가와 다른 시각에서 볼 때, 모리타 도지의 곡들은 당시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싼 내면적 고투의 격정과 상처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일본의 고도경제성장기를 지탱해갔던 전공투 세대가 자기표현으로서의 대중소비문화를 창출하면서 동시에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트로츠키적 세계혁명을 폭력투쟁으로 실현해내고자 했던 미숙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후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과 그것을 견인해가는 국가 권력의 완고함, 그리고 시민주의적 개인의 존재방식 등을 노정하면서 겪은 고투와 상처는 비단 그들만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전공투 세대가 지금까지 오랜 침묵을 지켜가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사 표시를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 세대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시대의 현장과 그 시대의 특별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는지. 은퇴 선언 이후 단 한 번도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모리타 도지는 2018424일 새벽, 심부전을 사망했다.

 

* 이 글은 웹진 <문화 다>(2015. 9. 23)에 게재했던 글을 수정한 것이다.

 

글: 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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