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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꿈과의 대화로 쓴 동화 -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훈기를 응원하며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꿈과의 대화로 쓴 동화 -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훈기를 응원하며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0.03.16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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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거리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느니 어떤 것이든 정해 잘 해보자 생각하면서도 하나를 잡으면 못 살겠고, 다른 하나를 잡으면 살 수가 없다. 사실 이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은 내 선택이나 취향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기에 보통 전자를 선택하여 후자를 취미 정도로 즐길 수 있는 삶을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뒤바뀐 이들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거나, 몽상가라거나, 혹은 그래도 너는 니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으니 다른 것들은 감수하라는 시선의 홍수 속에서 힘든 상황을 토로할 기회조차 빼앗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은 다행히 이 두 가지가 적절히 이뤄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의 미래를 쥐고 있던 감독이 죽기 전까지는.

갑작스레 감독이 사망하면서 그 감독과의 인연으로 커리어를 쌓던 찬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 찬실은 직업을 잃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찬실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결국 자신은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은 영화의 PD를 했던 것 뿐, 이렇게 영화판에 남아 있던 것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겐 현실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릴 만큼 남은 것이 없었고, 잔인하게 말해 하고 싶은 일을 하던 이의 결말이었다. 나이 마흔에 편안한 집 한 칸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 친했던 배우의 집안일을 해주며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그의 모습이 그 증거였다. 찬실은 도저히 차가 들어갈 수 없어 이고 지고 바리바리 싸들고 옮겨야 하는 곳으로 이사를 했고,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 그 꼭대기는 남들이 보기에 그의 삶에 결론을 내리는 유배지 같은 곳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찬실에게 이 공간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천천히 대면하게 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곳은 무엇보다 사람의 힘이 가득 들어찬 공간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유쾌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낙관으로 뭉뚱그리지 않는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모두가 살아 숨쉬는 듯 움직이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들은 마치 우리가 그런 것처럼 갑작스레 변하지 않는다. 단지 스스로가 쌓아온 범위 안에서 그들이 반복적으로 보내는 하루하루의 삶으로 시나브로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도, 위로를 하기도 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현실에서 잘 일어나지 않을 뜻하지 않은 환희나 극한에 가까운 낙담이 없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살아가고, 거기에서 의도치 않게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간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겨버리는 인간의 훈기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은 그 유명한 장국영 역할에서 잘 드러난다. 찬실이 장국영을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찬실에게 보낸 편지를 읽은 직후이다. 찬실의 아버지는 찬실의 안부를 물으며 결국 그가 가장 하고 싶었을 말, 네가 함께 하던 그 감독의 영화가 재미없고 졸렸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 말은 소위 예술영화만 만들었다던 감독의 영화에 대한 아버지의 진심이자, 딸에 대한 위로였을 것이다. 이 편지를 읽고 난 직후, 꽤 추운 날임에도 흰 런닝에 속옷을 입은 한 남자가 찬실을 지나쳐 간다. 스스로를 장국영이라 소개한 이는 그렇게 찬실과 만난다.

 

이 사고 같은 만남은 친실이 과거 좋아했지만 지금은 묻어 두었던, 그러니까 현재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더 이상 좋아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마음 한 켠의 떨림과 마주한다. 그렇다. 굳이 ‘옛날엔 좋아했었는데’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무엇인가? 왜 그것이 지금이 아닌 과거에만 좋아하던 어떤 것이 되어야 했을까. 물론 나의 취향이 바뀐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바뀐 취향은 과연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찬실이 술집에서 영과 나눈 영화에 대한 대화는 그 취향이,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장국영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야 장국영과 대면하게 되었을 이유를 말해준다. 미뤄두었던 영화에 대한 진짜 사랑,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과 엉겨 좋아하는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열과 희망을 갖게 해주었던 그 옛날. 그것은 장국영의 모습으로, 그 시대의 그것으로, <아비정전>의 한 장면으로 찬실에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보여준 인간을 통한 과거와 꿈과의 대화는 사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과거 자신의 희망이자 꿈을 인물로 표현하는 것은 연극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지만, 영화에선 오해를 불러일으킬 공산이 큰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이 경계를 잘 지켜가며 찬실이 가지고 있던 과거의 취향,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것을 무시해야 했던 현재,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결국은 포기할 수 없는 찬실이의 모습을 장국영과의 대화로 엮어 나간다. 장국영은 영화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찬실의 말에 토라지고, 그가 원하면 언제든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며 찬실을 안심시킨다. 그의 꿈이 었던 장국영은 찬실이 굳건하게 영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순간 응원과 함께 사라진다. 지금 당장 찬실이 할 수 있는 일은 버리겠다고 내놓은 많은 책들을 다시 방으로 들이는 것이나 누가 보아도 재미없어 보이는 시나리오를 열심히 쓰는 것이겠지만 장국영과의 속닥임으로 만들어낼 그 이후의 삶은 그가 원하는 모습으로 행복하게 도달하게 할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희망을 가지고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훈기는 서로에게 스며가며 살아나갈 힘으로 전환된다. 할머니는 사람도 꽃처럼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화분을 가꾸고 한글을 배운다. 배우 소피는 언젠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됐으면, 찬실의 후배들은 예전처럼 우리가 함께 하길 바란다. 이것은 서로에게 얽혀들며 함께 글을 읽고, 누군가를 위로하고, 또 누군가의 꿈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만든다. 이 사이에서 찬실은 처음 자신의 짐을 옮겨주던 그 친숙한 사람들과 어두운 길을 밝히며 함께 걷는다. 찬실의 옆에는 사람이 있고, 그들의 온기가 나눠지며 이제 그는 영화에 대한 또 다른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그리는 세상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 하고 싶은 일과 겹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이들의 지지와 응원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따뜻하게 보여준다(당연히 내 마음을 끝까지 잡아줄 장국영이 있다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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