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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0.03.23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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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이스피싱

십여 년 전쯤의 일이다. 보이스피싱에 넘어갈 뻔한 적이 있다. 전화가 걸려오고 이제는 널리 알려진 레퍼토리, “당신의 통장이 도용되었으니…” 사기꾼의 얘기를 들으면서 의심하기 보다는 그 즈음 분실한 주민등록증이 바로 떠오르면서 그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자 사기꾼이 한국말을 어눌하게 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여기기는커녕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직원일 거라고 나름 합리적인(?) 해석까지 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판단한 내가 너무 이상해서 되돌아보게 되었다. 먼저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을 때 범죄에 이용되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여기에 전화를 받기 직전의 상황이 문제였다. 당시에 나는 마감에 쫓기면서 원고에 관련된 영화(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를 급히 찾아보고 있었다. 영화는 공포영화가 아닌데도 기묘하게 무시무시했다. 다시 말해서, 분실한 주민등록증, 촉박한 마감, 무서운 영화 등, 작은 사건이 겹치면서 마음이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바로 그 때 보이스피싱 전화가 걸려왔고, 사기꾼의 얘기에 불안이 더욱 증폭되면서 이성적인 판단이 한 순간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보이스피싱의 피해자들 가운데 상식적으로 전혀 사기에 걸려들 것 같지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경찰이나 판사 등)이 있는 게 이해가 갔다. 그리고 사기꾼들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보이스피싱을 시도 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한 상태에 놓인 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스피싱에 걸린 사례를 보면 사기가 너무 뻔해 속는 게 이상해 보이지만, 마음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누구든지 걸려들어 낭패를 볼 수 있다. 멀쩡한 사람이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2. 마미야의 질문

1995년 3월 20일, 일본에서는 옴진리교의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옴진리교 신자들이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13명의 사망자와 6천3백 명이 넘는 부상자를 냈다. 그들의 목표는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천황을 폐위한 다음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신성법황으로 군림하는 신정국가 ‘진리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전대미문의 테러에 황당무계한 목표뿐만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는커녕 보잘 것 없는 중년 남자처럼 보이는 아사하라 쇼코의 모습 그리고 추종자들 가운데 좋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꽤 있다는 점 등은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1980년대 버블경제의 거품이 붕괴되고 나서 찾아온 장기 불황이 이러한 사이비종교가 유행하게 된 원인으로 손꼽혔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공격성을 극단적으로 표출한 옴진리교의 테러에서 일본사회에 만연한 불안 심리와 그 뒤에 억압되어 있는 분노를 보았던 것 같다. <큐어>(1997)는 그 응답 같은 공포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마미야라는 인물은 어딘가 아사하라 교주를 연상시키는 모습인데, 처음에는 바닷가에서, 그 다음에는 건물 지붕 위에서, 마치 하늘에서 강림한 듯 등장한다. 정신과의사 사쿠마는 마미야가 ‘세상에 의식을 퍼트리는 전도사’라고 말한다. 마미야는 우연히 마주친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런 다음 “당신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한다. 마미야가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행세하면서 자신에 대한 질문에 엉뚱하게 대답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더 이상 물어보기 어렵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은 어느 새 마미야가 던진 질문에 계속 대답하게 된다. 마미야는 무사시노 의대 정신과에서 공부한 인물로, 그의 방식은 프로이트학파의 정신과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정신과의사는 환자의 무의식에 억압된 문제를 인식하게 하고 의식에 통합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인 고통을 치료하려고 한다. 반면에 마미야는 그것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의 분노를 인식하게 만들고 극단적으로 표출하게 함으로써 파멸로 이끈다.

 

3.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희생자의 몸에 X자를 각인하는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자, 다카베 형사(야쿠쇼 코지)가 수사에 나선다. 현장에서 바로 체포된 범인은 회사원, 초등학교 교사, 경찰, 의사 등으로, 모두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다카베는 그들이 모두 마미야를 만난 다음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추적한다.

다카베에게는 우울증을 앓는 아내 후미에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후미에는 정신과의사 앞에서 『푸른 수염』을 낭독한다. 그녀의 우울증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여러 명의 아내를 살해한 푸른 수염 이야기’는 그녀의 병이 남편과의 갈등에서 빚어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카베가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면 여행을 가자’고 할 때, 후미에가 ‘무리하지 말라’고 대답하는 걸 보면, 그가 너무 바빠 가정에 소홀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다카베와 후미에가 처음으로 같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들은 평범한 부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눈을 잘 마주치지 않고 스킨십도 전혀 없다. 이 장면의 마지막 쇼트에서, 다카베는 식탁에 혼자 남아 저녁을 먹는다. 그들은 정서적인 교감 없이 형식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다카베는 남편의 의무와 책임을 저버릴 생각이 없지만, 후미에의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점점 지쳐간다. 그 때 다카베는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마미야와 처음 마주하게 된다. 마미야는 다카베 앞에 그림자 같은 실루엣으로 나타난다(사진1). 마치 다카베가 무의식의 심연에 억압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가 마미야를 심문할 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분노가 표출되기 시작한다. 다음 장면에서, 후미에가 길을 잃어버려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다카베는 깊은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후미에가 자살하는 환상을 본다. 말하자면 그는 아내가 사라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장면에서 다카베는 다시 마미야를 심문하려고 시도하지만, 오히려 질문을 받는다. “형사의 모습과 남편의 모습, 어느 쪽이 진짜인가?” 결국 다카베는 차마 의식할 수 없어서 무의식 깊이 억압했던 진실, “아내는 큰 짐이며, 너무 큰 고통”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가족에게조차 절대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아내와 서로의 고통에 대해 나누지 못했다”고 덧붙인다. 그런 다음 “사회가 나쁘기 때문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고 체념한다.

 

사진1. 다카베의 억압된 분신 같은 마미야 
사진2. 새로 태어나기 위해 마미야처럼 되어가는 다카베

다카베가 자신 안의 불안과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그의 모습은 허깨비처럼 보이게 된다(사진2). 이 장면은 마미야가 그림자처럼 보였던 이전 장면(사진1)의 반복이다. 그러자 마미야는 “기분 좋게 텅 비워 버리고 ‘나처럼’ 새로 태어나라”고 말한다. 마미야는 19세기말에 일종의 최면술인 메스머리즘을 일본에 도입해 사이비종교를 만든 교주에 홀려서 그렇게 되었다. 다카베는 “악의 눈이 내리기 전에 칼을 들고 치료하라(cure)”는, 교주가 남긴 설교를 듣고 마미야처럼 그의 추종자로 거듭난다. 만일 다카베가 세상의 악인 범죄를 다루는 형사가 되지 않았거나, 격무에 시달리지 않았거나, 아내와 서로의 고통을 나눌 수 있었다면, 그럼으로써 그의 마음이 평온했다면, 마미야의 질문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처에 위험이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경쟁이 만연한 가운데 가족들과의 정서적인 유대마저 사라져가는 환경에서, 마음이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큐어>의 끔찍한 결말처럼, 사이비 종교는 전염병같이 불안을 파고들면서 영혼을 잠식하고 퍼져나간다.

 

: 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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