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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일본 프로테스트 포크의 신,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이혜진의 문화톡톡] 일본 프로테스트 포크의 신,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0.04.0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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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바야시 노부야스 데뷔 50주년 기념공연 투어 결정 홍보 포스터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데뷔 50주년 기념공연 투어 결정 홍보 포스터

 

1960-1970년대에 걸쳐 대거 출연한 일본 포크 뮤지션들은 70대의 나이가 된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포크의 신(フォークの神様)’으로 불리면서 일본 포크 가수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오카바야시 노부야스(岡林信康, 1946-현재) 역시 201812월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 투어를 개최하면서 관록을 과시했다. 오카바야시 노부야스는 일본뿐만 아니라 1970년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포크 싱어 송 라이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1960년대 말 일본 전역에서 벌어진 전공투 운동이 본격화했을 때부터 1970년대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면서 학생운동이 괴멸되었을 때까지 그의 노래는 일본 정부와 기득권층을 향해 신랄한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면서 투쟁가요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드물게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도시샤대학 신학부를 중퇴한 오카바야시 노부야스는 교회 내부의 부조리에 반발하고 정치가의 무능을 조소하는 등 일본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 메시지를 반영한 노래를 만들어 폭발적인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수많은 곡들이 방송금지 처분을 받는 등 태생부터 반골기질을 드러냈던 포크 뮤지션으로 유명하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 성행했던 포크 잼보리를 개최하면서 수많은 콘서트 무대에 오르고 다수의 음반도 발표했지만 발표하는 곡마다 방송금지 처분을 받게 되자 직설적인 사회 비판적 가사를 노래하는 음악 활동에 많은 한계를 느꼈다고. 이러한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무력감은 1975년 국민에게 건전한 가요를 보급하겠다는 의도로 수많은 곡들을 금지하면서 대표적인 한국 정부의 문화 탄압으로 꼽히는 가요정화운동을 상기시킨다.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산야 블루스] 앨범 자켓(1969)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산야 블루스] 앨범 자켓(1969)

가령 그의 데뷔곡 「山谷ブルース(산야 블루스)(1968.9)와 데뷔 싱글앨범인 くそくらえ節(엿먹어라)(1968)는 도쿄 산야(山谷) 지구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날품팔이꾼들을 소재로 한 것인데, 도쿄의 산야 지구가 문제적인 이유는 당시 일본 대학생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무후무한 히트 만화로서 일본의 시대정신을 대변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あしたのジョ(내일의 조)의 중심 무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1960년대 말 고도경제성장기에 일본에서 성행했던 토목건설업에 종사하던 1만여 일용직 노동자들의 간이숙박업소 도야스마이(ドヤ住まい)’ 220여 채가 있었다. 집세 비싸기로 유명한 도쿄에서 도야스마이는 욕조 없는 공동 샤워실과 공동 화장실 사용을 조건으로 하여 일용직 노동자들이 저렴한 값에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기획된 집단 거주지였다. “오늘 노동은 힘들었네. 이제 남은 건 소주를 마시는 일일뿐이라는 노랫말로 시작되는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산야 블루스>는 바로 이 산야 지구날품팔이꾼들의 애환을 그린 곡이다.

2000년대 이후 노동자들의 고령화로 인해 이 산야 지구도야스마이도 약 160여 채로 축소되었는데, 그 동안 토지 개발이나 관광지 개발 등 공적 지원에서도 밀려난 탓에 현재는 옛 쇼와시대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추억의 산책 거리로 각광받고 있기도 하다. 4,500여 명의 거주자들의 평균 연령은 60세 이상이며, 이 가운데 약 60%가 여전히 생활보조수급자로 생활하고 있는 등 현재까지도 산야 지구는 일본에서도 얼마 되지 않는 도시 빈곤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무라카미 류 원작 영화 [69] (출처: 네이버)
무라카미 류 원작 영화 [69] (출처: 네이버)

한편 1970년대에 들어 학생운동 세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포크 붐도 잠시 주춤한다. 연합적군파의 아사마산장 사건(1970)이 대중에 가져다 준 충격, 그리고 1960년대 안보조약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반격의 주체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함과 동시에 대중의 냉소적인 시선이 수면 위에 떠오르게 된 것이다. 당시 오카바야시로 대표되는 사회 비판적인 포크 뮤직 노선에 서있었던 신주쿠 니시구치 포크 게릴라공연들이 쇠락해가는 프로테스탄트 포크의 명맥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 정부의 강경한 압력과 거대한 정치권력 앞에서 소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좌익운동의 무력감과 냉소가 대내외적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1960년 말 일본 학생운동에 대해 시종일관 냉소적인 시선으로 접근하는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소설 69는 이러한 당시의 무력감을 나약하고 철없는 청년들의 치기로 묘사하기도 했다.

 

스테이지에는 드럼이 없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마이크를 단 걸 봐서는 포크송을 연주할 모양이었다. 신주쿠에는 포크 집회가 자주 열린다는 신문 보도가 나온 후로, 규슈에서도 포크 공연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역시 포크 공연이었다. 아침 안개가 걷힐 무렵 공연이 시작되었다.

장발에 턱수염을 기르고 더러운 점퍼를 입은 남자가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노래를 불렀다. 간판에는 주최: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포크를 싫어했다. 베평련[베헤렌]도 싫었다. 기지의 거리에 사는 고교생의 눈에 포크송이란 나약하고 수준 이하의 음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을 때도 바보 같은 놈들! 하고 멀리서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공연 중간 중간에 연설이 들어갔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물러나라!

                                                                                                         -무라카미 류, <69> 중에서

 

신주쿠 니시구치 포크 게릴라 (출처: blog-日本近現代史の授業中継)
신주쿠 니시구치 포크 게릴라 (출처: blog-日本近現代史の授業中継)

19681021국제반전의 날은 일본에서 가장 치열했던 폭력투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때 일본 총평’(日本勞動組合総評議会)은 전 세계를 향해 베트남 전쟁 반대를 위한 공동행동을 호소하고 또 국내에서도 대규모 베트남 반전 공동파업을 선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이 날 일본 각지에서 학생들과 기동대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기도 했다. 특히 베트남전쟁의 후방 병참기지인 오키나와 반환문제를 둘러싸고 대규모의 시위대와 연결되어 있었던 일본 포크 뮤지션들은 신주쿠 역에서 연일 신주쿠 니시구치 포크 게릴라공연을 진행했다.

베트남전쟁이 격화되자 일본에 자리한 미군기지를 경유하여 대량의 무기와 병력이 전쟁터로 수송되고 있었는데, 이때 베트남 반전운동의 일환으로 규슈의 사세보 항에서 미군 잠수함 엔터프라이즈 호의 정박 저지를 요구하는 학생 데모가 전개되었다. 이때의 분위기를 고양시킨 중요한 수단 역시 포크음악이었는데,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 그리고 있는 장면은 바로 이 무렵에 전개된 대중의 냉소를 묘사한 것이었다.

그만큼 당시의 포크음악은 일본의 반체제적 사회운동과 반전운동을 이끌었던 주요 수단이 되었던 한편 점차 그 세력을 상실하고 있는 찰나를 겪고 있는 중이었는데, 당시 전 세계를 풍미했던 밥 딜런의 포크록 풍의 분위기가 다시 일본적 포크로 부활하면서 새로운 재기의 국면을 가져온 것은 1972년 요시다 타쿠로(吉田拓郎)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오카바야시는 꾸준히 통렬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와 하층 부락민의 애환을 읊으면서 포크음악의 재기를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1971년 돌연 기후현 나카스가와(中津川)와 교토 아야베시(綾部市)의 작은 마을에서 4년간 귀농생활로 은둔했다. 1975년 일본의 정치체제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정통 포크음악으로 귀환한 이후 현재까지 전국 투어 라이브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1970년대 공연장에서의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출처: blog-おはよう とみいさん)
1970년대 공연장에서의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출처: blog-おはよう とみいさん)

그는 여전히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접합을 실험하는 가운데, 특히 한국의 사물놀이 공연에 영감을 받는 등 실험적인 포크 장르를 개척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가령 샤미센과 같은 일본의 전통악기와 함께 장구, 꽹과리와 같은 한국의 전통악기를 접목하면서 헤야노 야노야 헤야노 야노 어기어차 뱃놀이 가잔다로 시작되는 <뱃놀이(ペンノリ)>를 열창하는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열정적인 영상을 감상해 보면, 오카바야시 포크음악이 추구하고자 하는 진면목을 가늠할 수 있다. 여기서는 오카바야시의 초창기 대표적인 포크 두 곡을 소개한다.

 

동지여, 동트기 전 어둠 속에서 / 동지여, 투쟁의 불꽃을 태우자 / 새벽은 곧 오리라, 새벽은 곧 오리라 / 동지여, 이 어둠의 저편에 / 동지여, 빛나는 내일이 있다.

동지여, 그대의 눈물, 그대의 땀이 / 동지여, 결실을 맺을 그 날이 오리라 / 새벽은 곧 오리라, 새벽은 곧 오리라 / 동지여, 이 어둠의 저편에 / 동지여, 빛나는 내일이 있다.

동지여, 떠오르는 아침 태양에서 / 동지여, 기쁨을 함께 나누자 / 새벽은 곧 오리라, 새벽은 곧 오리라 / 동지여, 이 어둠의 저편에 / 동지여, 빛나는 내일이 있다.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동지여(友よ)>

 

우리가 바라는 건 삶의 고통이 아니다 / 우리가 바라는 건 삶의 기쁨이다 / 우리가 바라는 건 사회를 위한 내가 아니다 / 우리가 바라는 건 우리를 위한 사회다 / 우리가 바라는 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바라는 건 탈취하는 것이다 / 우리가 바라는 건 당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바라는 건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이다

현재의 불행에 멈춰서는 안 된다 /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한 행복한 세상으로 이제 날아가야 한다 / 우리가 바라는 건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바라는 건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것이다 / 우리가 바라는 건 결코 우리가 아니다 / 우리가 바라는 건 영원히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의 불행에 멈춰서는 안 된다 /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한 행복의 세계로 이제 날아가야 한다 / 우리가 바라는 건 삶의 기쁨이 아니다 / 우리가 바라는 건 삶의 고통이다 / 우리가 바라는 건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바라는 건 당신을 죽이는 것이다

현재의 불행에 멈춰서는 안 된다 /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한 행복의 세계로 이제 날아가야 한다 / 우리가 바라는 건 /우리가 바라는 건

오카바야시 노부야스, <우리가 바라는 것은(私達の望むものは)>

 

 

* 이 글은 계간 <문학과의식>(2015년 겨울호)에 게재했던 글을 수정한 것이다.

 

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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