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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의 문화톡톡] 플렉스의 기원과 의미를 찾아서
[이은지의 문화톡톡] 플렉스의 기원과 의미를 찾아서
  • 이은지(문화평론가)
  • 승인 2020.04.0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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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의 세속화와 대중화

최근 젊은 세대의 소비경향을 가리키는 표현인 ‘플렉스(Flex)’의 기원은 한 래퍼의 개인방송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명 래퍼 염따가 유명 동료 래퍼의 고급 차량을 들이받아 그 수리비를 마련하기 위해 판매한 티셔츠가 20억 원 어치나 팔리게 된다. 차를 고치고도 돈이 남아돌자 그는 고가의 사치품 소비에 돈을 탕진하는 모습을 개인방송에 내보낸다. 그의 구독자들은 이를 보며 대리만족한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사치품에 쏟아부으면서 “플렉스 해버렸지 뭐야”라고 읊조리는 염따의 대사에서 플렉스라는 용어의 유행은 시작되었다.

 

출처 : YTN
염따가 판매한 티셔츠 및 굿즈. 출처 : YTN

“00해버렸지 뭐야”라는, 여유로움을 드러내며 으스대는 말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플렉스는 사치를 통해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과시하는 통속적이고 속물적인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기존의 사치와 플렉스는 변별되는 점이 있다. 사치는 자신이 가진 것에 상응하는 효과를 연출하는 데 반해, 플렉스는 자신이 가진 것과 무관하거나 자신이 가진 것을 초과하여 연출한다는 것이다. 즉 사치가 실재하는 것과의 긴밀한 영향 아래 놓인 연출이라면, 플렉스는 오로지 연출만이 존재할 뿐이며 연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는 점에서 사치보다 더욱 사치스럽다.

포틀래치(potlatch)에서 드러나듯이 인류 초기의 사치는 부와 지위를 가진 지도자들이 경쟁적으로 대향연을 베풀며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부는 개인의 소유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에 베풀어지며 그 대가로 명예를 획득하는 교환의 구조에 속해 있다. 그런가 하면 중세 이후의 부는 종교적 신성을 지상에서 대변하는 군주의 상징성을 드러내고 강화하는 목적에서 종교시설과 궁정에 집중되었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부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귀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궁정사회의 부는 왕조 전체를 위한 것이기보다 왕 개인의 향락을 위한 것으로 변해갔다. 궁정 바깥에서는 단기간에 부를 거머쥐며 새롭게 부상한 시민계급이 명예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화려한 궁정문화를 모방하며 사치함으로써 고급문화의 대중화에 기여하게 된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치와 자본주의』(문예출판사, 1997)에서 중세시대에는 시합이나 향연과 같은 공동체의 행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즉 간헐적으로 사치가 이루어졌다면, 이후 공동체를 벗어나 개인의 삶으로 들어온 사치는 ‘영속적’인 것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는 삶이 계속되는 한 사치도 계속되어야만 한다.

 

상황주의적 소비

왕족과 귀족계급의 사치를 모방한 시민계급의 사치는 신분 질서를 와해시키고, 개인의 노동으로 축적한 부의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는 시민사회, 즉 소비사회를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치에는 불평등한 신분사회에 만연했던 배타적 의식이 잔존해 있다. 사치품을 제조하고 유통하는 기업들은 이 점을 영민하게 포착하였다. 오늘날 명품 브랜드의 영업 전략은 초고가의 사치품과 적정 가격의 사치품을 공존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사치품은 대중들도 접근 가능한 한편으로 귀족적이고 배타적인 이미지 또한 고수할 수 있다.

『사치의 문화』(문예출판사, 2018)에서 질 리포베츠키는 사치가 오늘날 대중사회의 개인주의 문화와 결합하며 변모한 양태를 분석한다. 대중은 적정 가격으로 보급되는 동시에 귀족적이고 고상한 이미지를 고수하는 사치품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따라 자신을 타인과 성공적으로 구별지을 수 있을지가 결정된다. 소비를 통한 사회적 ‘차이’의 생성은 누구나 어떠한 외부의 제약 없이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새로운 개인주의의 확산에 따른 것이다. 소비한 사치품을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배치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소비에 관한 한 규율도 금기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대중은 그저 각자의 재력과 심미안에 맞춰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된다. 따라서 각자가 매 상황에서 최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소비를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적어도 사치를 하는 순간만큼은 계급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당신이 중상류층이 아닐지라도 금전을 유연하게 융통하여 명품 가방을 사거나 고급 호텔에 투숙할 때, 이를 소비하는 당신의 경험과 중상류층 소비자의 경험은 동등하다.

 

출처 : 한국일보
출처 : 한국일보

플렉스 또한 이러한 상황주의적 소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보세옷을 입고 저렴한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고가 브랜드의 가방을 사거나 하는 행위는 해당 브랜드를 소비하는 상황이 계급마저도 초월하는 강력한 유사 구원적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경험에는 사치품 브랜드의 영업 전략 또한 기여한다. 기업은 자신의 브랜드가 유행을 타지 않고 세월을 거슬러 영원불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한다. 공동체를 중심으로 행해지던 과거의 ‘주기적’인 사치와 다르게 개인의 삶을 단위로 하는 현대의 ‘영속적’인 사치와 이러한 영업 전략은 잘 맞아떨어진다. 삶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반복되는 소비의 굴레 속에서 영원에 가까운 가치를 보장하는 사치품을 소비하는 것은 최상의 상황주의적 소비라 할 만하다.

 

소비의 계급화

이처럼 소비가 개개인의 삶을 최선으로 연출하여 고양시키는 중요한 행위로 자리 잡으면서 역설적으로 소비 행위의 계급화가 이루어진다. 미학적 행위로서의 소비가 아닌 단순히 일상의 일차원적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소비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계급으로 보이게 된다. 볼프강 울리히는 『모든 것은 소비다』(문예출판사, 2014)에서 미학적 차원으로서의 소비를 긍정하는 한편 소비 양태에 따른 계급화를 문제적으로 바라본다. 고양된 차원의 소비를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모순이 소비의 계급화를 촉진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가령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샴푸 하나를 사더라도 최상의 제품을 골라 사고 샤워를 할 때마다 이 제품의 물신적 효과에 대한 기대를 통해 최적의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물신화된 제품이 주는 풍부한 경험을 울리히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로 진단한다. 반면 생활에 여유가 없어 오로지 생필품으로서 아무런 물신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값싼 샴푸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은 연출을 통해 고양된 경험으로서의 샤워를 할 수 없다. 이런 식의 소비 격차를 비단 샴푸에 한정하지 않고 두 사람의 삶 전체에 걸쳐 적용해보면 어떨까. 그러면 결국 소비 격차는 계급 격차의 또 다른 판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바로 여기에서 플렉스의 문제적 측면이 드러난다. 플렉스는 고가의 사치품이 주는 물신적 효과를 통해 계급 격차를 허구적으로 은폐하는 기만술과 같다. 다만 플렉스를 통해 소비하는 사치품은 물신적 가치가 훨씬 크기 때문에 기만의 효과가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참조할 만한 사례는 닐 부어맨이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미래의창, 2007)를 통해 들려주는 경험이다. 그는 자신이 소비하는 명품 브랜드들이 주는 물신적 효과를 비판하며 소지하고 있던 명품 제품들을 모조리 불태운다. 그 뒤로 그는 마약중독자가 마약을 끊으면 겪게 되는 것과 같은 금단 증상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울리히는 닐 부어맨의 명품 금단 증상뿐만 아니라 명품 화형식 또한 명품 브랜드의 물신적 영향 하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명품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면 명품 화형식의 효과 또한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비에 대한 저항 또한 소비의 위력을 역설적으로 재확인, 즉 반증하는 데 그칠 뿐이다. 달리 말하면 닐 부어맨과 같은 이들이 저항적 퍼포먼스를 할 때 그들은 단지 ‘소비에 대한 저항을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소비되지 않으면서 소비하기

이러한 논리를 따를 때 우리는 상품과 상표들로 촘촘하게 조형된 소비사회를 한걸음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저항하는 것마저도 저항의 대상을 닮아 있어 매번 소비 지옥으로 다시 끌려올 따름이다.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리시올, 2018)에서 이러한 악무한의 상태를 ‘반성적 무기력(reflexive impotence)’으로 정의하고 있다. 상황이 절대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행하는 반성은 끔찍한 무기력으로 되돌아온다. 이는 구체적인 적을 명시하지 않고 무엇이든 은근슬쩍 용인하는 자본주의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울리히는 삶을 연출하는 물신적 효과가 충만한 소비를 무조건 비판적으로만 접근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의 제안은 일견 순진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 하나는 상품이라는 ‘물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유일신교가 지배적인 사회의 무의식적인 반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신교가 지배적이었던 고대 그리스나 인도에서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가장 적합한 신을 그때그때 소비하듯이 섬겼다고 한다. 그러니 물신에 기댈 수 있으면 기대라! 다만 그것에 완전히 지배당하지도, 무작정 등을 돌리지도 말라.

 

출처 : 오마이포토
힌두교 사원. 출처 : 오마이포토

다른 하나는 소비 체험과 예술 체험을 위계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상품을 소비하며 감각하는 삶의 허구적 연출과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감각하는 상상력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상품미학에 대한 폄하와 반감은 서구사회의 구체제 말기에 종교적 영향력의 잔재에서 예술의 가치를 폄하했던 것과 유사하다. 바로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민음사, 2000)에서 우리는 도서 대여점에서 온갖 소설을 빌려보며 낭만적 상상에 젖어 있는 보바리의 취미에 대한 세간의 수근거림을 읽어낼 수 있다.

사치는 그 기원을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인류 문화의 핵심요소를 이루어왔다. 플렉스 문화 또한 단순히 최근 젊은 세대의 철없는 놀이로만 보아 넘길 수 없다. 다른 모든 소비를 악착같이 줄여서라도 명품 제품을 단 하나라도 소지하려는 이 기이한 열정은 공동체 내의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가 요구해왔던 품행과 무관하지 않고, 자국의 브랜드에 대한 욕망을 체계적으로 부추겨 타국을 경제적으로 식민화해온 서구사회의 전략과 무관하지 않으며, 불평등이 만연한 상황을 해결하기보다는 견딜 만한 것으로 연출하려는 우리 사회의 무의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플렉스가 문제적이라 해서 그저 플렉스 하지 않거나 플렉스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를 문제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효과를 허구적인 것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그런 능력을 기를 수 있는 한에서 어쩌면 사치는 권할 만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글 : 이은지

문학평론가. 2014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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