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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에 새겨진 잔혹의 역사 추적하기와 그 한계: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여성의 몸에 새겨진 잔혹의 역사 추적하기와 그 한계: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성진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0.04.06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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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이조 여인잔혹사>는 조선시대 가부장제 하에서 살아가는 세 여자에 대한 옴니버스 영화다. 1부 여필종부(女必從夫)에서는 망자에게 시집간 여자가 딸을 열녀로 만들어 출세하려는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2부 칠거지악(七去之惡)에서는 불임의 원인이 남편에게 있음에도 시부모의 원망의 대상이 된 부인이 다른 남자를 통해 아들을 낳고 자결한다. 유일하게 주인공이 죽지 않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3부 금중비색(禁中秘色)은 임금이 아닌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된 상궁이 다른 상궁들의 도움으로 궁을 빠져나가는 이야기이다. <이조 여인잔혹사>라는 제목이 말하듯 가부장제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압당했던 여성들의 잔혹한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1983년 ‘여인잔혹사’라는 제목을 단 영화가 다시 한 번 만들어진다. 바로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이다. 원미경과 신일룡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의 내용은 신상옥 감독의 <이조 여인잔혹사>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를 결합한 것과 유사하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주인공은 몰락한 양반집 딸인 길례(원미경)다. 가족을 위해 망자의 신부로 팔려간 길례는 열녀를 만들려는 시어머니로부터 혹독한 통제를 받다가 집안 남자에게 겁탈당한 후 쫓겨나고, 역적으로 몰려 노비가 된 남자 윤보(신일용)를 만나 살면서 양반인 주인에게도 고초를 당한다. 그리고 윤보의 가문이 복원되어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윤보의 불임으로 아들을 낳지 못하자 머슴을 통한 씨내리를 강요받고 아들을 낳은 후에는 자결을 강요받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거래의 대상, 통제와 억압의 대상, 욕망과 착취의 대상, 그리고 혈통을 잇는 생산 도구로 취급받아야만 했던 한 여자의 길지 않은 삶을 통해 조선시대의 가부장제를 고발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제목 뿐 아니라 내용과 주제 면에서도 <이조 여인잔혹사>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두 영화의 세부적인 차이들이 두 영화를 서로 다른 종착점에 데려다놓는다. <이조 여인잔혹사>는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인 제도 자체와 그것을 대변하는 인물 설정을 통해 인물 간 대립의 서사 구조를 명백히 하는 방식으로 여인의 수난에 기대는 가부장제에 비판을 가한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주인공 길례를 억압하는 제도에 대한 언급과 인물이 존재하지만, 그들과 길례와의 갈등 관계보다는  길례의 수난 그 자체에 집중한다. 더 중요한 것은 영화가 재현하는 가부장제의 폭력이 길례의 몸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아들이 몽달귀신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길례를 사오다시피한 시어머니는 길례를 열녀로 만들어 덕을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만든다는 목적으로 혹독한 노동을 시킨다. 육체적 노동으로 성적 욕망을 누르겠다는 것이 시어머니의 계획인 것이다. 병든 어머니와 배고픈 동생들을 위해 거래된 길례의 몸은 가부장제의 열녀제도를 위해 철저하게 통제당하고 억압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부장제가 길례의 몸에 가한 첫 번째 수난이다.

 

성인이 된 길례는 우연히 남녀의 정사장면을 목격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깨닫는다. 하지만 그녀는 성적 주체가 되기도 전에 한 남자의 성적 욕망의 대상, 배설구가 되버리고 만다. 시집에 데릴사위로 들어와 있는 한생에게 강간당한 것이다. 영화는 이 폭력적인 순간과 길례가 처음 성에 눈뜨는 순간을 겹쳐놓음으로써 이 사태의 책임 일부를 은연중에 길례에게 전가시킨다. 이처럼 자신에게 전가된 죄책감과 혼란 속에서 길례는 한생과 여러 차례 성관계를 갖게 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한생의 행위가 강간이었으며, 자신의 눈에 띈 가장 취약한 여성을 향한 폭력이라는 것이다. 한생은 과거 시험을 치러야 하지만 공부하는 척하며 숨겨놓은 술이나 마시는 인물이다. 처갓집의 위세에 숨죽이고 사는 한생에게 길례는 그 집안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로, 자신의 스트레스와 성적 욕구를 배출하고 잃어버린 남성의 권력을 확인하기 위한 대상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한생의 본성을 알았기 때문일까, 길례와 한생의 관계를 알게 된 시아버지는 한생을 죽이고 아무도 모르게 길례를 집 밖으로 쫓아내 다른 삶을 살 기회를 준다. 이와 같이 길례의 두 번째 수난도 그녀의 육체에 가해진다. 그리고 집에서 쫓겨나 머슴살이하는 윤보의 아내가 된 길례가 겪는 세 번째 고초도 주인 영감의 성적 대상이 되면서 겪는 것이다. 이때는 보호자인 가부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소유물과 다름없는 그녀의 신분으로 인해 그녀의 몸은 또 폭력 앞에 그대로 노출된다.

윤보의 집안이 복원되면서 세도가의 며느리가 된 길례는 마침내 자신을 보호해 줄 가부장과 신분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삶의 대가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길례는 불임인 윤보를 대신할 머슴을 통해 씨내리를 강요받는데, 길례에게 그것은 한생과 주인 영감에게 겪었던 고통스런 경험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길례를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 생산의 수단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편 윤보마저 가부장제의 규율과 자신의 위신을 지키기위해 아들을 낳은 길례에게 은장도를 내민다. 길례는 인격체가 아니라 아들을 낳는 몸, 쓸모가 다한 후 폐기처분 대상인 생산 기계가 된 것이다.

 

가난한 양반가 딸, 부잣집 청상과부, 머슴, 세도가의 며느리라는 어떤 위치에 있든 상관없이 길례의 몸은 그녀의 수난이 새겨지는 장소가 된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여성의 몸을 어떻게 통제하고 착취하는지 보여주는 영화인 셈이다. 이와 유사한 관점은 영화 <어우동>(이장호, 1985)과 <씨받이>(임권택, 1986)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에 집중할 때 자칫 그것의 의도와 상관없이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모순에 빠질 위험성이다. 칠거지악 등 유교적 사회가 여성을 억압하는 규율에 분노하여 집을 나온 양반가 며느리가 기생이 되어 양반들을 성적으로 희롱하고 조롱함으로써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이야기인 <어우동>이, 그 야심찬 기획이 무색할 정도로 ‘에로사극’으로서 큰 흥행을 거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대종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세계영화제에 소개되었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에로사극’으로 평가받지는 않는다. 절제된 연출과 연기는 그러한 평가를 뒷받침할만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중심 사회가 여성에게 가한 폭력의 역사를 여성의 몸에서 추적하는 이 영화가 여성의 몸, 더 나아가 여성의 삶을 대상화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 영화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회제도를 기반으로 한 과거를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 속 시대 그 자체가 대상화 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견고한 가부장제의 영향력과 여성 억압이 여전한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볼 때, 이 영화는 현재의 현실을 과거라는 막으로 가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가 가부장제 속 여성의 가혹한 삶을 조명하고 있지만, 그 주인공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에서도, 또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현상 유지에 기여하는 것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신상옥 감독의 <이조 여인잔혹사>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임금이 아닌 남자의 아이를 낳은 상궁의 궁궐 탈출기이다. 죽어서만 궁 밖을 나갈 수 있는 상궁은 살아서 궁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는 동료 상궁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그들을 용인해주는 궁궐 지기들이 있다. 동료상궁들은 여성으로서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궁궐 지기들은 남성이지만 궁 안에 갇혀 지내야 하는 같은 처지에서 그녀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 이상적인 엔딩을 통해 이 영화의 인물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엄격한 가부장제와 신분제 세계 밖,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꿈꾼다.<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어떤 신분에 있든지 상관없이 조선시대 여성이 가부장제의 폭력을 피할 수 없었음을 치밀한 서사로 비판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를 보는 현재의 관객에게 그 비판이 현상 유지에 균열을 낼만한 의미 있는 고발로 보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비판하고 있는 세계 바깥에 대한 상상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글·성진수

영화학을 전공하고 영화에 대한 글쓰기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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