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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끝내 다 타버리고 남은 건, ‘욕망’이라는 진실 뿐 - <미드소마>론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끝내 다 타버리고 남은 건, ‘욕망’이라는 진실 뿐 - <미드소마>론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20.04.29 14: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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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다소 ‘충격적인’ 이미지들에 노출될 수도 있음을 사전에 일러둔다.

 

<미드소마>(2019) 포스터

 

“오히려 보임으로써 숨기기”

확실히 어리석은 일일는지도 모른다. 망막에 안착한 이미지가 언제나 진실한 건 아니라는 식상하기 그지없는 문장을 구태여 입 아프게 쏟아놓는 번거로움을 무릅쓴단 것은. 물론, 퍽 이례적이라 할 만한 경우들을 논외로 밀쳐두고 생각한다는 전제가 덧대어진 한에서겠지만. 혹 사고의 수순을 뒤집어 역행시켜보면 어떨까. 단서조항의 존재를 감안하여 이렇게 문장을 갈음해본다 해도 그다지 무리는 없을 성싶다. 특정한 조건이나 까닭 하에서라면, 설령 눈속임이 일어난다고 한들, 진상을 온전히 분변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면 그리될는지. 대강 그 소이연(所以然)을 짐작해본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의 결과물들을 떠올려볼 수가 있을 법하다. 1) 정상적인 판단작용을 훼방하거나 교란시킬 만한 수준의 자극과 충격이 물밀 듯 개입하고 간여해온 탓이라든지, 2) 외려 썩 미더워 보이는 근거들이 사고의 궤도 주변에 겹겹이 배치됨으로 말미암아 예민하게 벼려진 반성적 판단력을 튼실히 지탱해주어야 할 적절한 긴장감과 경계심이 그만 느슨히 풀어져버린 탓이라고. 뭐, <미드소마>라면, 그 어느 쪽이든 두루 만족하겠지만.

처음의 처음, 그러니까 영사기로부터 전기신호가 방출되는 최초의 순간이랄까. 어두움을 찢어발기며 스크린을 장악해오는 건 프레임을 꽉 채운 거대한 벽면회화다. 조밀하게 암호화된 설정쇼트라 할 수 있는 이 그림 앞에 설 때면, 우선은 압도적인 크기와 정보량의 과잉으로 인해 어느 누구인들 잠시잠간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테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각을 가다듬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약 20초) 동안 상(像)이 휘발해버리지 않는단 사실.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면면을 들여다보면 ―심미안과 감식안의 고하에 따라 헤아림의 수준 차야 있겠지만― 이교제의에 얽힌 한 편의 이야기를 대강이나마 추출해내는 도상학적 직관에 그리 어렵지 않게 가닿을 수 있을 게다. 뭐, 과정이 썩 여의치 않았다 하더라도 민망해할 이유는 없다. 문제의 알속은 그게 아니니까. 더구나 설령 괄목할만한 파훼능력을 선보인다 한들, 영화텍스트를 읽은 후/읽어가는 노정에서 한낱 자랑스러움 따윌랑 무력하게 증발해버릴 게 분명하고, 나아가 덩그러니 구멍이 뚫린 자리엔 자취를 감춘 부듯함을 대신할 기함만이 질척하게 들러붙게 될 것이니.

자세히 풀어쓰자면 영화텍스트라는 준거맥락의 징검돌을 밟고 도상학적 직관에서 해석학적 판단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경험이란, 이미지계의 2차원적 허상이 3차원 역동세계 속에서 물질적 실체를 부여받는 촉지적인 구상(具象)화 과정을 목도하는 것이랄 수 있다. 벽화에 기록된 구체상황들이 마치 신적 역능을 부여받은 예언들이라도 되듯, 그런 까닭에 하나하나가 적확하게 들어맞아 성취되는 편이 오히려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힘주어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 영화 속 사태들로 고스란히 구현돼왔다는 점 말이다.

 

텍스트의 세례 전, 도상학적 직관에서
텍스트의 세례 전, 도상학적 직관에서

 

텍스트의 세례 후, 해석학적 판단으로
텍스트의 세례 후, 해석학적 판단으로

폭설이 내리는 겨울날 일가족의 몰살을 경험하게 된 한 생존자 여성을 포착하는 최초의 시점에서부터, 여인과 그녀를 위로하는 연인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그림을 취미삼은 내통자에게 꾐을 받아 발들이면 벗어날 수 없는 덫 속으로 몰아넣어져 가는 일련의 과정을 경유하여, 자신도 모르는 새 덫의 날이 점차 살점을 파고드는 연극화된 제의의 여정 속에서 맞닥뜨린 충격적 사건(노인들의 절벽수직낙하)의 조우를 지나, 마침내 죽음을 상연하는 절정의 대미에 참여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마치 물리법칙을 거슬러 미래를 미리 엿보고 상속받아온 자가 그린 그림처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심지어 이 기구한 희생양 무리의 인종적 분포나 개중 어떤 이(마크)가 어떤 모양새(광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는지를 표시해놓은 세세한 디테일까지도, 그러니까 비교적 사소한 사항들마저도 이 벽면회화가 빠짐없이 정확하게 묘파해내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는 데 성공한다면, 눈앞의 처치 곤란함 앞에서, 자칫 ‘항거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의 작용을 그려내는 오컬트 영화라는 허술한 진단을 텍스트에 부여해버리기 쉬울 테다. 더러는 ‘컬트적인 취향’을 다분히 짙게 머금고 있는 마니아적인 영화로 취급해버리게 된다든지. 이처럼 성급한 예단은 섭리적인 ―정확히는 그렇게 간주된― 내러티브운행에 수동적으로 몸을 내맡기는 형국으로 존재(관람객)들을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폭발적인 감각의 센세이션에 흠뻑 젖어들어 마취된 채 갈팡질팡 허우적대면서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도록.

능동적 지각능력을 마비시키는 동물적인 그리고 야성적인 힘에 압도된 채로 보이는 것들을 그저 묵묵히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도달하게 되는 종착점은 소박한 대결구도와의 만남이다. 다른 무엇보다 이 구도는 ‘원주민의 세계’와 ‘이방인의 세계’를 대별하는 것이라고 말해둘 수 있겠는데, 그건 다시금 ‘좀처럼 서사화 될 수 없는 숙명적 세계’와 ‘엄밀한 틀거지와 질서를 가진 상징적 구조세계’라는 대비도식으로 적절하게 ―그렇게 보이되 사실은 매우 무람없이― 치환될 수 있다. 진상이 그렇다면, 후자가 전자에 의해 피식(被食) 당하는 건 특기할만하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도 딱히 무리한 일만은 아닌 양 다가올 테고 말이다. 문제는 ―아래에서 목도케 되겠지만― 이런 해석이 심각할 정도로 문제적이란 것이다. 은밀히 속삭여오는 영화의 비밀한 음성과 완전히 평행선을 그린다고 할 만큼이나.

허면 함정에 빠져드는 근본적인 이유란 과연 뭘까. 한 걸음을 물러서 곰곰이 곱씹어보면, 쉽게 텍스트의 속삭임에 감응하지 못하도록, 좁다란 늪지에 빠져 제자리걸음하도록, 우리의 귀와 눈을 가리는 건 이것저것을 ‘선명히 드러내 보임으로써 외려 등뒤로 뭔가를 은근히 숨기려는 전략적인 말 걸기’의 기술 때문이다. 부정적 뉘앙스를 제해 한결 더 밝은 어투로 번역해본다면 직설화법 대신 ‘우회적이고 암시적인 방법으로 말을 걸어오는 풍부한 양식화(stylization) 전략’을 선택한 까닭이란 말을 동원해 문장을 갈음해 볼 수도 있을 테고. 영화언어를 조직하는 세심한 그리고 조금은 낯선 문법능력의 구사 앞에서 그만 방향을 헷갈리게 된 셈이라고나 할까. 양식화 실천을 통해 나름의 문제의식을 실어내는 것에  ―위대한 무성영화 시절부터 전승돼온―  ‘영화의 본령’이 있음을 떠올린다면, 진지한 (지각적) 사고실험과 부단한 지적도전의 여정을 들여다본단 건, 다른 한편으론 언제고 즐거운 ―허나 여전히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하겠다만.

 

“눈속임을 위한 여러 도구들”

기중 우선 염두에 둘만한 건, 신비감•이물감•기괴함•모호함•동물성 따위로 형용될 수 있을 법한 ‘이질감각의 현전을 극대화하는’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게는 사건들의 전반적 분위기와 도통 맞물리지 않고 계속 겉도는 동화적인 파스텔 풍 색조라든지, 신경증적 사운드의 활용 따윌 꼽아볼 수 있겠다. 일차원적으로 사람의 입에서 발화되는 짐승소리를 숫하게 삽입한다거나, 장엄한 제의적 음악에 고의로 불협화음을 간여시킴으로써 긴장과 불화의 감각을 한껏 고조시키는 방법 따위를 채택하고 있다면 옳을 게다.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내딛는다면 보다 복잡한 모양새로 운신하고 있는 갖은 기법들을 포착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음직한 중요요소를 혹 가려 선뵈자면, 그로테스크의 경험을 일부러 ‘더 낯설게’ 만든다든지, 반대로 익숙한 걸 외려 ‘더 상투적인’ 것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끈덕지게 관람객의 신경을 긁고, 거슬림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방편을 택한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으리라.

 

그로테스크를 현상하는 일반적인 방법
그로테스크를 현상하는 일반적인 방법
낯선 것을 한층 더 일반적이지 않게 담아내기
낯선 것을 한층 더 일반적이지 않게 담아내기

기괴함을 날것의 기괴함으로 맞닥뜨리는 민낯 그대로의 경험은 차라리 덜 충격적이라 하겠다.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이를테면 마치 왈츠를 추듯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별안간 예고 없이 한걸음을 몰아붙이듯 간섭해옴으로써, 무방비상태의 지각과정에 예기치 않은 장해와 혼선을 초래하는 경우다. 가령, 절벽에서의 수직낙하 장면에서 두 번째로 뛰어내린 노년의 남성은 바위를 빗겨난 탓에 즉사의 행운을 거머쥐지 못하고 공동체에 의해 타살된다. 여기서 주목해봐야 할 것이 바로 이 타살의 과정을 영화가 연출하는 특이한(왈츠의) 양식화 방식이다. 통상 그로테스크한 장면 앞에서 카메라가 오브제로부터 아득히 거리를 둔다는(extreme long shot) 건, 대개 감당하기 꾀까다로운 지점의 ‘직면’을 피하고, 남은 공백부분의 ‘벌충’을 관람객의 상상력 몫으로 돌리기 위함이다. 때로 주의를 끌어 시선을 이동/분산시킨다든지 더러는 강제적으로 스크린을 암전시킴과 더불어 상황을 짐작토록 할 만한 외화면 사운드를 이입하는 방법을 동원하는 등, 민감한 사태에 비교적 원만한 에움길을 경유해 다가서는 건, 회피의 의도뿐만 아니라 이 상상력의 역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처방이랄 수 있다. 그러니 긴장을 풀고 막 사고실험의 동력장치를 가동하려는 시점에서 돌연 감관을 비집고 틈입해오는 퍽 비릿한 것들의 출현을 마주한단 건, 욕지기가 치밀 만큼의 당혹감과 함께, 영화의 전체적 색감과 경향이 어떤 것임을 대강 헤아리도록 만든다. 그 밖에, 그렇잖아도 다루기가 만만찮게 껄끄러운 한 쌍의(어린 소녀와의) 성애장면을 다수가 관여하는 기묘하기 그지없는 짝짓기 제례로 바꾸어버린다거나, 또 어느 한 존재의 눅진한 서글픔에서 말미암는 제스처들을 경험(연인의 배반)이 결여된 기계적 모방과 복제의 방식을 띤 집단행동으로 전유해버리는 데서 오는 ―아울러 동시간대에 이루어지는 이 두 아카펠라의 모호한 대위법적 부대낌이 풍기는― 강렬한 이질감 또한, 근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 테다.

 

시공간을 잇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방법1
시공간을 잇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방법1
시공간을 잇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방법2
시공간을 잇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방법2

유치하거나 촌스럽다 여길 만큼 ‘과도하게’ 상투적인 요인들의 의도적인 남발 역시 영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저해하고 매끄러운 매듭짓기의 과정에 이물감을 개재시킴으로써, 관람객의 기대치를 가능한 하한선까지 낮추며, 결과적으론 텍스트에 가해지는 반성적이고 냉철한 판단의 자세를 거두어들이도록 만든다. 상게 이미지처럼 사건과 사건 사일 잇는 개연적 연결고리 없이 문을 닫는 순간 즉시로 시공간의 폭을 훌쩍 건너뛰어 버린다든지, 생각에 잠긴 인물의 표정과 제스처를 유지한 채 명암만을 달리함으로써 환경의 변화를 담아내는 고루하기 그지없는 전개방식을 구사한다거나, 그렇잖아도 도래할 일들을 충분히 예측해볼만한 상황 속에서 구태여 눈에 띄는 작위적 표지들을 첨가해 고조된 분위길 바닥 아래로까지 끌어내리는 것 ―가령 헬싱글란드로 향하는 도로에서 무턱대고 화면의 상하를 반전시킨 것― 등속의 조잡한 기법들의 현현은, 불쾌와 거북함 그리고 싸늘히 식어버린 기대감의 휘발과 함께 의심과 성찰의 여지 또한 공중으로 흩어버리기 충분하다. 실망에 젖어 잠자코 텍스트흐름을 따르도록 말이다. 동공의 움직임마저 망실돼버렸다고 할 만큼, 정말이지 무감각하게. 수풀 속에서도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만큼 화려한 머리장식을 가진 자와 술래잡기를 진행하는 느낌이라면, 적절한 비유일 성싶다. 긴장감이 바닥난 놀이만큼 거추장스러운 일도 드물 테니.

 

곳곳에 매설된 근거조항들1
곳곳에 매설된 근거조항들1
곳곳에 매설된 근거조항들2
곳곳에 매설된 근거조항들2

상술한 ―낯섦을 강화하거나 상투성을 북돋는― 방식들과는 전연 다른 양상으로 관람객의 반성적 지각작용을 훼방하는 영화의 '장치들' 또한 눈여겨 볼법하다. 환언하자면, 불쾌와 모호함의 정서를 부단히 자극함으로써 성찰적인 사고활동 그 자체를 기피하도록 충동하는 것과는 달리, 사방 곳곳에 명료하게 식별 가능한 해석의 근거들을 흩뿌려 둠으로써, 일정한 방향에 따라 텍스트의 내러티브가 전개돼 가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촉발하고 더 나아가 안도감에 물든 관람객들로 하여금 능동적 사고의 궁굴리기 작업을 곧장 내려놓도록 견인한다 말해본다면, 썩 정당한 해설이 될 듯하다. 뛰어난 성능의 GPS와 자동항법시스템을 탑재한 배 위에서 머무는 탓에 가끔 눈을 들어 전탐기를 살피는 일 외엔 도통 과업에 무관심해져버린, 심드렁하다 못해 잔뜩 풀어져버린 존재를 떠올려본다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여기서 일련의 장치들이란,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번역어를 취해본다면, 가끔은 무명천 위에 새긴 주되게는 건축물들의 벽면을 빼곡하게 메운 ‘그림들’의 다른 이름이랄 수 있다. 각 사람에게 할당된 침상 주위에, 저마다에게 곧 닥쳐올 상황들을 표해주는 벽화들이 꽤나 정교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말하자면 짐승처럼 도축과 정형을 당하게 될 사이먼의 운명도, 우스꽝스런 광대의 모습으로 죽게 될 마크의 최후도, 종족보전을 위한 짝짓기 수단으로 착취되고 버려질 ―더하여 어느 가택의 벽면에 새긴 이미지처럼 마침내 곰 가죽을 뒤집어쓴 채 불태워질― 크리스티안의 종말 또한 철두철미하게 사전예고 된 셈.

 

“그림자처럼 들러붙는 간접화된 목소리들”

견디기 힘든 이물감의 향연 탓에, 통어의 확신으로부터 아주 멀어져버리게 된 까닭일까. 거듭되는 식상함 앞에서 잔뜩 부픈 기대감을 그만 망실해버린 까닭일까. 혹 그것도 아니라면, 어찌됐든 모든 게 기위 정해진 섭리대로 차질 없이 흘러가게 되리라는 안심감에 푹 빠진 이유에서일까. 낱낱의 관객들에게 있어서 과연 무엇이 더 상대적인 지배소의 작용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곤 단언할 수 없을 테지만, 온몸에 힘을 빼고서 잠자코 텍스트의 물길이 운신하는 방향대로 부유하며 몸을 내맡긴다는 게, 이를테면 <미드소마>를 마주하는 관람성의 ‘주된’ 특징이 되리라는 사실 하나만은 아무래도 부인하기 어려운 일이지 싶다.

허나, 다른 한편, 어떻게든 존재자들을 ―일방통행로 속으로 발길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불러 세우려는 '희미한 음성'이 어딘가에서 미미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는 점 또한 외면할 순 없을 듯하다. 긴장을 있는 대로 누그러트려 이미 철저하게 무장이 해제돼버린 존재의 맨살을 스리슬쩍 파고드는 이 작은 음성은 확실히 기대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감지하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무력화된 비판적 사유기제의 최종 방어선을 유유히 건너 뇌중의 고갱이를 곧장 공략할 수 있을 테니까. 무엇에 맞먹는다면 좋을까. 그 효력은 사위를 잠식한 적막을 헤집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제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작은 도미노 조각에 비견될 만한 것이다. 그리 쉽게 '시동'이 걸리지 않으리란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왜일까. 요컨대 문제의 윗점은 이 음성을 듣는 게(식별하는 게) 그다지 용이치 않은 일이라는 데 놓인다. 다분히 암시적인, 간접화된 모습을 빌어 호소해오고 있기에.

서(序)에서도 간단히 기술한 바 있듯, 주권적 역능을 틀어쥐고서 텍스트 세계를 추동하는 힘의 의지와 그것의 자의적 운행 가능성을 긍정하는 건, 소박한 대립구도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낳을 수 있다. 바로 이 ‘숙명적 꿈틀거림의 신비로움’과, 거기 적응하는 데 실패한 ‘공교(工巧)히 질서 잡힌 체계’ 사이의 형질대립에 관한 허술하기 그지없는 믿음을 말이다. 애당초 그런 식의 대척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풍겨오는 분위기의 차이야 어쨌든지 간에, 그저 서로 다른 모양새를 가진 '복수의 질서들'만 존재할 뿐. 그렇담 본류대의 물길을 거스르는 지류 내지는 작용력의 반작용으로서 이 간접화된 목소리란 비질서 내지는 반질서적인 것, 그러니까 아마도 숙명의 숙명다움이라든지 순리의 순리다움에 의혹의 시선을 던지며 물음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것임을 추측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존재방식에 착안할 때, 역(逆)으로 감지하기 어려운 주파수(음성)의 발생지를 잡아내는 일 또한 가능해질 테다.

 

실은 정교한 질서에 의해 지탱되는1
실은 정교한 질서에 의해 지탱되는1
실은 정교한 질서에 의해 지탱되는2
실은 정교한 질서에 의해 지탱되는2

카메라는 왕왕 부감촬영(high angle)으로 한 장소에 군집한 사람들을 붙든다. 자칫하면 무감각하게 스쳐 지나가버리기 십상일 테지만, 그 와중에도 필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게 하나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장중의 무리들로부터 대단히 정밀한 기하학적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마지막 한 사람이 착석하기까지의 끈덕진 기다림의 순간을 묘사하는 상기 이미지(좌측)에서도 살필 수 있듯, 선수조건이 먼저 만족되지 않으면 그 다음의 과정으로 이행해 나갈 수 없다. 만약, 며칠 간 진행된 제의절차 가운데 혹 어느 부분 하나가 혹자의 실수에 의해 그만 결락돼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확인하게 됐더라면, 희생자들은 요행히 생명을 보전했거나, 최소한 그 목숨을 잠시나마 더 온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퍽, 기계적이지 않은가? 순조로운 자연의 길을 따른다기보다는 말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말해주는 바는 명확하다. ‘쉽게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는’ 외침이랄까. 철저하게 가장된 섭리/순리의 이면에는 극히 엄밀하게 짜인 질서체계가 존재하고 있으니까. 텍스트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패턴들은 단순한 신호(signal)로 간주될 수 없다. 각각이 언어적 기호(sign)에 정확히 대응한다고 말해두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문자 체계를 정비하도록 ‘발탁된’ 자가 장애인 영매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를 빌려오자면 강신무보다는 학습무가 어울리는 존재일 게다― 사실 그 자체에 시선을 빼앗겨서도 안 된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이 신통력에 요구되는 대가지불과는 전연 무관함을, 다만 공동체 차원에서 감행된 명백한 계획(근친상간)의 소여임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공동체의 요청에 의해 선택됐고, 또 공동체의 요청에 의해 모든 일상으로부터 배제된 그녀는, 별도로 마련된 작달만한 공간에 작은 몸을 눕히는 것 외엔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보통의 부족 여성들에게 허용된 의례장면(짝짓기)과 고독에 절은 그녀의 비참한 처지를 일종의 이중인화를 통해 하나의 스크린 위에 과감히 포개놓는 모순의 현상방식은, 엄격하다 못해 잔인하다 말할 정도의 기율들로 꽉 짜인 틀거지, 내지는 견고하기 그지없는 상징체계나 질서시스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이 텍스트 세계의 무대공간을 장악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오로지, 욕망뿐이라고나 할까”

허면 신적인 경륜과 그 대척점에 선 인간적 체계 사이의 길항관계라는 그릇된 도식을, 어떤 세속적 질서와 또 다른 현실적 질서 사이의 불화구도로 갈음해보는 일 또한 충분히 가능한 작업이 될 것이다. ‘룬 문자의 세계’와 ‘알파벳 문자세계’의 대립이라는 말로써 갈음해본대도 썩 좋은 번역이 될 테고 말이다. 그럼 어째서 한쪽이 남은 한쪽에 의해 삼켜지게 되고야 만 걸까. 섣부른 위상학적 접근을 꾀해선 안 된다는 지적만큼은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성싶다. 그렇다면? 표면적 이유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정보의 불평형성 환언하자면 정보격차의 기울기 때문이라고 정돈해 볼 수 있으리라. 죽음이 상연될 연극무대가 예비되었다는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부족공동체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조차 접할 수 없었던 대니 일행에 비해, 그들은 펠레를 이국에 파견한 시점부터 다년간에 걸쳐 끈덕지게 정보를 습득하며 ―일가족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일을 포함해― 일체의 준비절차들을 내외에서 차근차근 밟아왔으니 말이다.

어째서 그런 수고로운(?) 과정들을 무릅써야만 했을까. 질문에 적절히 답하기 위해서는 표피에서 진피로, 가지런히 질서 잡힌 표면층위에서 '내밀한 욕망'이 꿈틀대며 똬리를 튼 기저영역으로, 논의의 깊이감각을 한층 더 골똘하게 밀고나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게다. 미국인들이 스웨덴 행을 꾀한 건 ―혹자에게는 명목상의 이유일 뿐이라 할지언정― 그들이 속한 현실질서에서 꽤 유용한 것으로 더러는 자랑할 만한 것으로 통용될 법한 ‘만족스런 지식’을 획득하기 위함이다. 반면 부족민들이 오래도록 갖은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대니 일행을 끌어들여야만 했던 그리고 그 자릴 섣불리 떠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했던 까닭은, ―다른 방법으론 도무지 얻기 힘든 쾌락 때문이건 공동체의 체계와 기율을 한층 더 견고히 다지기 위한 희생이 필요했기 때문이건 이들 양자의 긴밀한 결합 때문이건 간에― 그들을 자신들의 눈앞에서 죽여 ‘불태우지 않을 수 없다는’ 종국적 목적의식 때문이다. 둘 중 어느 편이 보다 강한 소구력(appeal)을 발휘했을는지, 심장을 움킬 만큼 강렬한 흡인력으로 존재 깊이 호소해왔을는지 짐작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다소 범박한 축약이라는 힐난을 무릅쓰고 본다면, ‘욕망’의 크기와 밀도 때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봄도 좋을 듯하다. 말하자면 그 불땀과 열기의 현저한 격차 때문이라는 이야기. 무턱대고 이국행 비행기에 오른 이방인들의 거든한 맘과는 달리, 식을 줄을 모르도록 괄게 이글거리는 욕망이 아니었다면, 부족민들이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끈덕지게 인내할 이유란 애당초 없었을 터이니-.

 

아마도 알레고리로 간주하기에 충분한
아마도 알레고리로 간주하기에 충분한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니의 집 벽면에 걸려있던 한 폭의 중생대 이미지는 퍽 재미있는 통찰을 안겨다준다. 수면 위의 세계에서 운신하는 공룡들은 발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통 헤아리기 힘들지만, 물속 세계를 제 생의 터전으로 삼는 공룡들은 바깥 세계를 노니는 먹잇감의 동태를 살피고 면밀한 사냥의 전략을 구상하며 준비할 수 있다. 그 간절함만큼이나 육중한 몸을 솟구쳐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바로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뭐, 사실 엄밀히 말한다면 겨냥한 것이라고 보긴 좀 힘들지만, 한 질서(물속)와 다른 질서(물위)에 속한 존재(공룡)들이 대결을 벌인다는, 그리고 보다 큰 욕망(몸피)을 가진 이들이 상대적으로 덜 절박한 존재를 집어삼키는 데 성공한다는 ―고백컨대 약간의 조미료를 얹은― 이야기가, 영화 텍스트의 알심을 관류하는 알레고리로 그럭저럭 충실하게 복무한다(복무할 수 있다) 말해본대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렇담 영화가 끝끝내 말하고자 의도한 건 과연 뭘까. 따지고 보니 결국 ‘욕망만이 곧 전부이더라는’ 그런 유의 이야기?

 

오직 진실한 것은 욕망 뿐1
오직 진실한 것은 욕망 뿐1
오직 진실한 것은 욕망 뿐2
오직 진실한 것은 욕망 뿐2

실은 그렇게 뇌까린대도 ‘아주’ 틀린 말만은 아닐 게다. 생각해보라. 같은 시공간에서 유래한 자들, 동일한 ―여기 이 쇼트에선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삼각형의 건축물이 암시하는― 질서체계를 공유하는 자들이 한줌 잿더미로 화하는 여정에서, 대니는 어째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걸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욕망. 바로 그것이 자길 에워싼 촘촘한 직물조직보다도 우세하다는, 그러니까 더 본질적이라는, 그렇기에 껍데기야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갈아 치우는 게 가능하리란 인식에 기대지 않는다면, 좀처럼 설명하기가 어려운 일일 성싶다. 그녀의 얼굴과 불살라져가는 건축물을 겹쳐-쓰기로 처리한 이중인화 이미지에서 ―정확하게는 더블프린팅에서 모노프린팅으로 옮아가는 전환국면을 포착한 이미지에서― 대니의 표정변화와 건축물의 붕괴상황 사이에 일종의 비례식이 성립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끈덕지게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던 낡은 상징체계가 머문 흔적조차 없이 사그라져버린 바로 그때에, 비로소 그녀의 웃음은 더할 나위 없는 극점에 도달한다.

거듭 말하자면, 정말이지 중요한 건 결코 이 웃음이 하나의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옮아가게 된 사건의 물리적 정황으로부터, 달리 말해 ―그녀의 몸을 칭칭 둘러 결박한― 종속화의 끈을 거머쥔 주체(주인)가 바뀌고 구체적인 배속(위치지정)의 양상이 달라졌다는 표면적인 사실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후관계는 전적으로 뒤집어져야 한다. 웃음의 정체란, 외려 끈에 의해 유지돼온 이 주객의 예속관계를(마저도) 전도시키는 일이 가능하다는, 주체적으로 세계를 선택하는 작업이 실은 불능하지 않다는, 그리고 질서에 우선/선행하는 욕망이야말로 그것을 허락하여줄 가능조건이자 근본동력으로 역사하리라는 사실을 가감 없이 현출해내는 표상 혹은 시각적 술회라고 말해볼 수가 있을 터이다.

 

“아니,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대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욕망을 강조해서 얻을 수 있는 건 뭘까. 적어도 욕망이 중요하다는 텍스트의 언설이 그저 ‘의’고(pseudo-classical) 풍(風)의 답습만은 아니라면, 한갓 철지난 리버럴리즘의 구태의연한 재연(replay)은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또 무엇을 제안하고 있다고 읽어야 하겠는가. 한 장의 청사진에서 출발해보도록 하자. 지금여기, 우리시대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질서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날로 두터워지는 시대, 모든 걸 체계논리로 갈음하는 시대, 기술발전에 의해 인간의 인간다움을 지탱하고 증언하고 수호해주던 마지막 보루들마저 촘촘한 알고리듬과 축적된 데이터들의 처리역량에 의해 넉넉히 그리고 순적히 대체돼버리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하지만 모든 일들이 정말로 ‘그렇게 순조로운’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될까. 역으로 거슬러 올라 생각해보면, 결국 그 모든 체계적인 질서들과 장치들을 구상케 하고 가능케 한 중추에는 혹자의 혹은 혹자들의 이글거리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그렇다면 아무리 훌륭한 상징프로그램의 처마 아래에 깃들어 살아간다 하더라도, 사르는 힘이 한층 더해질 욕망(들)에 의해, 그리고 그 욕망이 채택하고 구동할 또 다른 입법논리에 의해서, 멋들어진 지붕 따위야 언제고 다시 바뀌거나 보수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세계의 동력원 또한 ―다질, 다층, 다원 그리고 복수적인― 욕망이다. 비단 개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닌 셈이다. 때로는 집적된 덩어리로 녹아 붙고, 때론 팽팽히 평행하며, 때로는 공명하거나 불화하는 욕망의 자장(磁場)권역 그 바깥에 존재하는 게 달리 뭐가 있을까. 대관절 무엇이 있어 그 아득한 영토를 월경(越境)할 수가 있을까. 가시적 문명의 수면 아래에서 작용하는 욕망이라는 근본동력의 작용을 망실한 채, 그렇잖아도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외표적인 현상들에만 집중하다보면, 문제는 더욱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배배꼬이고야 말 테다. 물론, 복잡성에 걸맞은 세련됨과 고급스러움으로 무장한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불쾌하고 때론 추잡스럽다고도 말할 수 있을 법한 욕망의 끈적이는 진실을 대면한단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껄끄럽다고 해서 외면할 순 없는 일이다. 음영의 직면은, 난해의 대해를 항해하는 오늘이야말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필수적인 ‘점검 작업’이 되어줄 터이니.

몇 번이고 반복한대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질서의 질서, 다시 그 질서 위에 또 다른 상위의 질서를 조직하고 체계화하기에 여념 없는 시절, 겉껍질과 속껍질이 교차하며 켜켜이 쌓여가는 중에 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것의 실체가 어느덧 눈에서 희끄무레해져버리게 된 시절이라는 분석 투의 현실 언급은. 어떠한가? 이런 와중에 영화텍스트가 동화적•몽환적인 것과 괴이스런 것을 한 데 엮어낸 반동(反動)적 무대장치에 힘입어 그 특유의 유독성을 상당부분 중화시킨 그리고 한층 더 그 입자들의 활동성을 가속시킨 ‘폭력과 성’의 문제를 ―본질상 이것들이 매우 강력한 욕망현상의 계기가 됨을 염두에 둬야 할 테다― 공성무기로 취하지 않았더라면, 견고한 맹벽을 허물고 여러 겹으로 잠근 자물쇠를 풀어헤치며 마침내 관람객들의 가장 내밀한 욕망을 간질이는 일이, 더 나아가서 그걸 밀원(密園)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의식의 수표로 길어 올리는 일이, 혹 가능이나 했을까.

어쩌면 주이상스지상주의로 전락하는 건 혹 아닌지 설왕설래 갑론을박하면서 머리를 죄 헝클어놓는 복잡한 논쟁은 멀찍이 밀어두기로 하고, 두서너 가지 가벼운 질문을 던짐으로써 글의 마침표를 갈음해보는 편이 어떨까 싶다. 비근한 삶, 아니, 갖은 질서들의 무게에 억눌려 파근해진 생 가운데서 정작 스스로가 무얼 진정으로 욕망하는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 밀실공간에서 짙은 갈증과 더불어 요동치는 녀석이 과연 무엇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능동적으로 되돌아보며 적극적으로 새김질하는 이들의 숫자란 과연 얼마나 될까? 진지하게 숙찰해보고, 또 답변해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영화 텍스트가 가지는 실천적/수행적인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겠는가? 정말로 유미적인 그로테스크라는 단편적인 진단명만으로, 광오한 텍스트 세계의 풍경을 온전하게 온존해 건사할 수 있는 걸까?

 

 

글: 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동물인 늑대의 이미지로부터 착안해낸 이름이다. 이 짐승은 홀로 쏘다니며 늘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이란 사실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 있을 게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에 대한 성찰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독특한 쓰기/읽기 형식으로서의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그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터이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면서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했다(201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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