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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의 문화톡톡] 운명적 사랑의 서사는 왜 이율배반적인가
[이정옥의 문화톡톡] 운명적 사랑의 서사는 왜 이율배반적인가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20.04.27 11: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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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문화 톡톡 | 이정옥(문화평론가)

 

운명적 사랑과 친밀성의 변화

 

로맨스는 운명적 사랑의 신화를 재생산한다. 운명적 사랑은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고 평생 일체감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신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 불변의 법칙에 기반을 둔 운명적 사랑은 숱한 사랑의 아픔과 이별을 거쳐야 비로소 실현 가능한 모험이다.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운명적인 단 한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복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과연 진정한 운명인지 여부를 가늠하는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설령, 단번에 그런 사랑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미처 감지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후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알아채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각자 존재하고 홀로 소멸해가는 각자도생의 고달픈 삶에 지친 현대사회에서 운명적 사랑에 대한 신념은 오래 전에 박제화 됐다. 이제 운명적 사랑은 냉정한 현실세계와 대비되는 친근하고 애정이 넘치는 대중매체의 허구적 서사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처럼 의미가 부재한 텅 빈 기호와도 같은 운명적 사랑의 신화가 거듭 재생산되고 있는 근저에는 친밀성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다. 친밀성은 차갑고 계산적인 근대 개인주의에 맞서기 위해 창안된 정서로, 초기에는 부르주아의 집단주의적 정서로 출발했지만 점차 핵가족 중심의 가족주의로 변질됐다.

빠르게 개인화 사회로 접어든 오늘날, 가족주의적 친밀성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약물처럼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운명적 사랑이 실현 불가능해진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그럼에도 로맨티스트 가이들은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신념을 고수하며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꿈에 사로잡혀 있다. 운명적 사랑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매력을 느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자유롭게 연애를 시작하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러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낭만적 사랑이 극대화된 허구이다.

로맨티스트 가이들은 결혼과 개인적 사랑에 영향을 주는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 유지에 몰두한 나머지 시대변화에 둔감함 편이다. 이들은 자신이 의존하는 여성의 현실을 외면한 채,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신념을 보편적 가치로 정당화하는 자기모순을 범한다. 누가 보더라도 실상과 정당화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감지되지만 도리어 그 괴리에 주목하는 여성들을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악녀로 규정짓는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소거된 채 남성적 시선으로 미화된 운명적 사랑의 서사가 이율배반적인 이유이다.

 

운명적 사랑의 종언과 사랑의 유동성

 

비장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한 남자가 장미 꽃다발을 들고 다른 남자와 행복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여자를 멀리서 지켜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 여자가 내가 니꺼야? 난 누구한테도 갈 수 있어라고 야멸차게 쏘아붙이며 떠나가던 이별 장면을 회상한다. 비통에 젖은 남자는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줘라는 카드 메시지를 보내지만, 이를 확인한 여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독백을 남길 뿐이다. 바로 이어 움직이는 인터넷이라는 광고 멘트가 뒤따른다.

이는 2000년 벽두에 울려 퍼진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한 통신사의 CF 카피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랑에 관한 명대사로 손꼽힐 정도로, 움직이는 사랑(mobile love)과 움직이는 인터넷(mobile internet)의 특성을 접목하여 사랑의 유동성을 절묘하게 부각시켰다.

이 광고는 헤어진 연인들의 애증과 삼각관계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시리즈로 편성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자유자재로 관계 맺을 수 있는 인터넷의 확장성과 개방성의 이미지를 자신의 감정에 따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변할 수 있는 사랑의 유동성에 밀착시켰던 것이다.

당시 이 광고가 빅히트를 치자 한 편의 광고가 사랑의 풍속도를 바꿔 놓았다는 상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광고의 수사학은 당대 소비자들의 감정구조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상품의 이미지와 슬로건을 접목시켜 감각적이고 강렬한 카피로 완결된다. 이런 점에서 이 카피는 사랑의 유동성이나 운명적 사랑의 종언을 알리는 최초의 선언이 아니라 최종적인 공표다.

운명적 사랑이나 사랑의 유동성에 관한 인식의 변화는 이미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적인 추세였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법칙이 난무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가족을 위해 희생하기보다 자신의 욕구와 생애기획을 우선시하기 시작했다. 빠른 시일 내에 각자도생의 개인화가 확산됨에 따라 친밀성에 대한 구조변동 역시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물론 성역할 관념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과 더불어 경제력을 확보한 여성들이 남성의 부양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핵가족제도를 이상화하는 가족주의적 친밀성도 급격하게 와해됐다.

앤서니 기든스가 지적한대로 18세기 근대 개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형성된 친밀성은 19세기 들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핵가족제도를 이상화하는 방식으로 정착됐다.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임노동을 담당하고 여성에게 가정 부양을 배당하는 성별분업에 근거한 핵가족제도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화라는 성별지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그러나 개인화된 사회변화에 따라 친밀성은 1인칭 단수의 개인주의적 정서로 빠르게 전환됐고, 이제 개인들은 가족이나 사회집단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관계에만 초점을 두는 친밀성, 즉 합류적 사랑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합류적 사랑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며 특별하거나 운명적인 사람의 발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관계에 초점을 두는 현대적 사랑이다.

이처럼 사랑 불변의 법칙이 무화됐음에도, 로맨티스트 가이들은 특별한 관계에 초점을 두는 합류적 사랑조차 특별한 사람과의 운명적 사랑으로 오인한다. “내가 니꺼야를 외치는 여자를 향해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줘라며 매달리는 남자는 난 누구한테든 갈 수 있어라는 특별한 관계성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치명적인 문제는 특별한 관계특별한 사람간에 어긋나는 감정의 불일치가 발생할 경우 그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는 데 있다. 따뜻한 친밀성의 정서를 버리고 이기적이고 차가운 개인주의를 추종하는 여성들로 인해 사랑이 메마르고 세상이 거칠어졌다는 논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모순이 강할수록 사랑의 유동성은 더욱 확고해진다.

 

운명적 사랑에 대한 이율배반적 집착과 여성의 악녀화

 

<봄날은 간다>(2001)는 사랑의 시작과 이별의 과정을 봄날의 풍경화로 담아낸 서정적인 영화다. “라면 먹고 갈래?”(정확하게 라면 먹을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명대사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CF와 더불어 사랑의 풍속도를 바꿔놓은 영화로 손꼽히고 있다.

방송국의 음악프로그램에 소개할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만난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와 음악프로그램의 아나운서이자 피디인 은수는 몇 차례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녹음여행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져든다. 찬란하게 피었다 무심하게 지는 봄날의 벚꽃처럼 강렬하게 다가왔던 사랑은 이내 흩날리는 꽃잎처럼 쉽게 변하고,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된 상우는 혼란스러워한다. 더욱이 잊을만하면 찾아와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은수의 행동에 상우는 배신감마저 든다.

이처럼 영화 전체는 상우의 시점으로 초점화 되어 있다. 때문에 상우를 향해 먼저 손을 내밀었던 은수가 왜 갑작스럽게 사랑을 끝내려는지, 변심한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우의 안타까운 심정만이 클로즈업된다. 우연히 발견한 결혼사진을 통해 이혼의 상처가 컸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봄날은 간다 (2001) 영화포스터
봄날은 간다 (2001) 영화포스터

 

그러나 세밀하게 두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면, “라면 먹을래?”라며 연애를 시작하는 은수 중심의 전반부와 마음이 변한 은수를 향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며 안타깝게 외치는 상우 중심의 후반부로 나눠진다.

전반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은수의 심리상태를 추론해보자. 은수는 라면 먹자고 들인 상우를 향해 자고 가라고 제안할 정도로 상우를 무척 좋아했다. 또한 어느 산골에 있는 무명의 소박한 부부의 봉분을 보며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라고 묻는 은수의 눈빛에는 상우와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소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랬던 은수가 싸늘하게 돌아선 시점은 아버지가 사귀는 사람 있으면 데려오래라는 상우의 말을 들은 직후다. 상우를 향한 사랑과 별개로 결혼은 버거운 짐이었던 것이다. 이혼 경력이 있는 은수에게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일찍 혼자가 된 홀시아버지, 혼자 사는 늙은 시고모까지 봉양해야 하는 가족제도는 곧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오직 상우의 아내이자  한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항변하는 상우에게 헤어져라고 이별을 고했지만, 은수는 상우를 향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마다 상우를 찾아간다. 특별한 관계의 합류적 사랑을 원하는 은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오직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종속적인 삶을 강요하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오랫동안 흔들렸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상우는 이런 은수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연민에 몰입해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평범한 러브스토리를 치매 걸린 할머니의 서사와 병치하여 봄날처럼 짧은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져다 준 심오한 영화라는 고평 일색이다. 물론 영화 미학적으로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답지만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은수를 향해 자기가 먼저 시작해 놓고 기분 내키는 대로 내치다 가라앉을 만하면 또 다시 흔들어 놓는 악녀라는 비난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기차역에 하염없이 앉아 젊은 적 바람피워 집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치매 걸린 할머니의 서사와 뜨겁게 사랑했다 이유도 모른 채 이별통보를 받은 상우의 서사가 겹쳐진다. 그러나 울고 있는 상우를 향해 버스와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는 할머니의 위로는 남성의 시선에 포착된 운명적 사랑의 서사가 갖는 한계를 명징화한다.

애절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새색시 때 입었을 법한 분홍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떠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가부장제에 순응하며 살아온 여성들의 회한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럼에도 이런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거부하는 개인화된 여성, 즉 은수에 대한 배려는 차단되어 있다. 벚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 다시 찾아온 은수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상우에게 은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이 흐릿한 존재로 각인되듯, 이 영화는 개인화된 여성에게 설자리를 내주지 않은 남성 중심적인 사랑의 서사이다.

 

건축학개론(2012) 영화 포스터
건축학개론(2012) 영화 포스터

 

<건축학개론>(2012) 역시 순진무구한 남자의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아니 순수했지만 오해로 인해 어긋나버린 첫사랑을 회상하는 두 남녀의 관점 차이를 드러내는 영화라고 해야 정확하다. 영화의 플롯이 첫사랑에 대한 회상의 서사와 15년이 지났지만 새삼스럽게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현재의 서사가 교차하면서 오해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슴 아픈 첫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로 분류되는 이유는 영화 전체를 압도하는 남자의 시점 때문이 아니라 첫사랑을 운명적 사랑으로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로맨티스트 가이들의 동류의식을 초점화한 데 있다.

건축학개론이란 수업에서 만난 건축학도 승민과 음대생 서연은 같은 동네에 사는 인연으로 팀플과제를 하면서 가까워졌다. 숫기 없고 내성적인 승민이 머뭇거릴 때마다 생기발랄한 서연이 이끌며 과제도 하고 풋풋한 사랑도 키워가지만, 금수저 출신에 준수한 외모까지 갖춘 선배 재욱으로 인해 오해가 쌓이면서 헤어지고 만다. 그러나 결별의 진짜 원인은 오해가 아니라 재욱에 대한 승민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강북 토박이 승민에게 학생 신분에 강남의 오피스텔과 자가용까지 갖추고 럭셔리한 생활을 누리는 재욱은 경쟁 대상조차 될 수 없는 넘사벽이다.

서연에게 멋진 남자이고 싶은 욕망이 클수록 가난하고 억센 엄마와 가짜 명품셔츠로 멋을 부린 자신이 부끄러웠던 승민은, 서연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하자 모든 여자들이 부자이자 킹카인 재욱을 선망하듯 서연 역시 재욱을 좋아할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불안해한다. 용기를 내어 서연이 살고 싶다는 집 모형을 만들어 고백하려고 서연의 집 앞에서 기다렸지만, 술에 취해 재욱의 차에서 내려 비틀거리며 집으로 함께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좌절하고 만다.

승민의 패착은 이 모든 의혹에 대한 해명을 서연에게 직접 확인하지 않고 재수생 친구 납득이의 잘못된 조언에 의존했던 점에 있다. 키스에 대한 납득이의 설명은 자기 경험의 언어화가 아니라 왜곡된 음담패설에 불과하다. 더구나 독서실에 다니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싱숭이생숭이라 이름을 붙이고 혼자 은밀하게 연애감정을 즐기는 정도임에도 마치 통달한 연애박사처럼 허세를 부리는 납득이의 태도와 관점은 여성을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하는 포르노그래피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납득이의 왜곡된 여성관은 이쁘고 착한서연을 일거에 쌍년으로 명명화하며, ‘순진한 승민을 가지고 놀다 차버리고 킹카인 재욱에게 가버린 악녀로 규정짓는다. 이는 서연을 독자적인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성의 속성으로 일반화한 다음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여성에게 혐오의 시선을 덮어씌우는 이중삼중의 왜곡이다. 문제는 이런 납득이의 왜곡된 관점을 그대로 수용한 승민이 서연을 향해 꺼져 줄래라며 절교를 선언한 후, 첫사랑의 아련함과 쌍년의 배신감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스스로 갇혀버렸다는 점에 있다.

15년 만에 만난 승민과 서연은 집을 짓는 동안 어긋난 기억을 복기하며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었고, 승민은 지난날의 곡해를 사죄하듯 결혼식까지 미루며 집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완수했다. 그럼에도 쌍년의 굴레는 쉽게 지워지지 않아, 서연을 연기한 여배우는 '국민쌍년이란 오명을 뒤집어 썼다. 운명적 사랑을 꿈꾸는 남자의 순정을 짓밟은 여성들은 범국민적 차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남성들의 연대의식이 작동한 결과이다. 첫사랑의 실패가 승민의 열등감과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합리적인 이해를 도외시한 채 오직 운명적 사랑에 집착하는 남성들의 시선이 위험하다.

 

뷰티인사이드(2015) 영화 포스터
뷰티인사이드(2015) 영화 포스터

 

이와 달리 <뷰티 인사이드>(2015)는 운명적 사랑의 판타지를 완성한 영화이다. 도시바와 인텔의 합작품인 The Beauty Inside 캠페인 CM을 영화화한 것으로,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디지털 세계의 가상적 상상력을 변화무쌍하게 변신하는 남자와 이런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운명적인 로맨스에 결합시킨 판타지물이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CF가 움직이는 사랑과 움직이는 인터넷의 특성을 접목시켜 현실세계에서 사랑의 유동성을 부각시켰다면, 이 영화는 끊임없이 변신하는 특이체질 남자의 운명적 사랑을 신비한 판타지로 구현했다. 비록 외면은 변화무쌍하게 변할지라도 본질은 변함 없다는 운명적 사랑의 서사는 현대사회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영화 곳곳에 환상적 리얼리티의 확보에 공을 들였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부터 늙은이, 심지어 다양한 민족과 인종에 이르기까지 자고 일어날 때마다 외모가 변하는 특이성을 122명의 배역을 동원하여 실감나게 표현했고, 특이체질을 집안 내력의 유전병으로 설정함으로써 비현실적인 기이함을 자연스러운 특수성으로 전환시켰다. 또한 나무의 고유성을 살려 맞춤가구를 만드는 가구디자이너와 가구회사 숍마스터만이 교감할 수 있는 섬세한 감정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겉모습이 달라지는 우진을 알아보는 단서로 활용했다.

그러나 생물학적 근거를 동원한 유전병이나 환상적 리얼리티의 치밀함에 호소할수록 모순을 은폐하는 자가당착은 배가된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유전되는 특이체질이나 시어머니에서 (예비) 며느리로 대를 잇는 가부장적 순응성은 이미 환상적 리얼리티로 봉합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것이다. 때문에 시대변화를 거스른 가부장적 유토피아로 미래의 시간을 통제하려는 상고주의적 열망은 물위에 떠 있는 기름처럼 도드라질 뿐이다.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이수를 남겨 놓은 채 체코의 작은 공방으로 숨어버린 우진과 젊은 시절 편지 한 장 남겨 놓고 훌쩍 집을 나간 후 다 늙어 돌아온 아버지의 행적은 평행적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아들의 행동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의 모순이 아니라 자신들도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특성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수나 아내를 위한 세심한 배려로 미화된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유전되는 변신의 특이체질이 수렵시대 이래 남성들의 DNA 속에 각인된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사냥꾼이론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평생 혼자서 육아와 가정경제를 책임졌음에도 다 늙어 돌아온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며 고마워하는 우진의 엄마나 체코에서 숨어 지내는 우진을 어렵사리 찾아내어 운명적 사랑을 완성하는 이수 역시 데칼코마니처럼 닮은꼴이다. 개인화된 현대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들은 운명적 사랑에 대한 신념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로맨티스트 가이들의 판타지에서나 존재하는 착하고 순응적인 여자들이다.

흥미롭게도 <건축학개론>의 서연과 <뷰티인사이드>의 이수는 착하고 예쁘고 청순한 첫사랑의 이미지를 공유한다. 그러나 남자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서연은 쌍년이라 비난받고, 이수는 지고지순한 순정녀로 미화된 점은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이와 더불어 변신의 주체가 여성으로 바뀐 드라마 <뷰티 인사이드>(jtbc 2018.10~11)에서 한세계를 사랑한 남자 서도재 역시 지고지순한 순정남임에도, 이수와 달리 변신을 알아채지 못하는 안면인식 장애자로 설정됐다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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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참고문헌>

김혜경 외, 가족과 친밀성의 시회학, 다산출판사, 2014.

앤서니 기든스, 현대사회의 성·사랑· 에로티시즘, 배은경·황정미 옮김, 새물결, 1999.

울리히 벡·에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사랑은 지독한 혼란, 강수영·권기돈·배은경 옮김, 새물결,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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