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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말?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말?
  • 김경욱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0.04.29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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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 <설국열차> 그리고 <노스텔지아>

인터넷에서 ‘코로나19 전과 후’를 검색하면, 위성에서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 대성당,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인도의 타지마할, 이슬람의 성지 메카 등, 관광객과 신자들로 붐비던 공간이 거의 텅 비어 있다.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2006)에서, 테오(클라이브 오언)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과 피카소의 <게르니카> 등을 가리키며 던졌던 질문이 떠오른다. “지금부터 100년 후에는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2027년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소요사태 등으로 기강이 완전히 무너진 가운데, 영국만 군대를 유지하며 버티어내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인류의 대부분이 원인도 모른 채 불임상태가 돼 18년 4개월 동안 신생아가 전혀 태어나지 않았다. 즉, 인류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영국의 미술품 보호청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파괴되기 직전의 미술품을 건져오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과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그렇게 같은 공간에 놓이게 된 것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기상이변으로 북반구가 급격하게 얼어붙는 <투모로우>(2004) 또는 전 지구적인 재앙이 잇달아 터져 인류가 멸종위기를 맞는 <2012>(2009) 같은 영화에서, 세계의 종말은 사람들이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빠르게 진행된다. 반면, <칠드런 오브 맨>의 생존자들은 느린 종말의 과정을 우울한 표정으로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중이다. 그들은 길거리에 방치된 쓰레기 더미를 지나, 일상화된 폭탄 테러를 피해가며, 밀려드는 이민자들을 잡아가는 군인들을 바라보면서, 미신과 종교에 매달리거나 자살용 약(정부에서 평온하게 죽을 수 있다면서 배급했다)을 만지작거린다.

테오의 어린 아들이 2008년, 전 세계를 휩쓴 독감으로 사망했다는 설정에서, 인류의 재앙은 예전에 이미 시작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재현된 파멸의 풍경은 코로나19 국면에서 더욱 묵시록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청년시절, 세상을 바꾸겠다는 신념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테오 역시 냉소와 절망 속에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믿을 수 없는 임무가 주어진다. 임신한 여성 ‘키’를 온갖 위험을 뚫고 인간의 멸종을 막으려는 과학자 집단 ‘휴먼 프로젝트’가 있는 병원선 ‘투모로우’로 데려가는 것이다.

아버지도 모르는 아기가 허름한 집에서 태어나고, 그 아기와 산모를 데리고 테오가 도주하는 장면은 요셉이 헤롯왕의 손길을 피해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갔던 일화와 유사하다. 그리고 투모로우 선이 나타나기 직전에 테오는 죽고, 키와 아이만 남겨진다. 키가 불법이민자이자 흑인이고, 아기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전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미래가 펼쳐질 가능성을 기대하게 된다. 

<칠드런 오브 맨>의 마지막 장면에서 봉준호의 <설국열차>(2013)가 생각난다. 이 영화는 다음과 같은 설정으로 시작한다.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냉각제인 CW7을 살포한 결과, 전 세계가 얼어붙으면서 모든 생명체가 멸종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 후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은 ‘설국열차’에 탑승한 채 살아가게 된다(비슷한 상황으로, 영화 <2012>에서는 인류멸망을 감지한 극소수의 특권층이 일종의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생존을 모색한다. 여기에 탑승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세계 최고의 권력자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다). 

 

설국열차는 자본주의 사회의 축소판으로, 인류의 종말이나 파국을 그린 많은 영화들처럼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빈부격차의 양극화 현상이 훨씬 더 심각해진 양상이다. 기차의 꼬리 칸에는 가까스로 굶주림을 면한 빈민들로 가득 차있는 반면, 앞 칸에는 부유한 자들의 호사가 넘쳐흐른다. 창문도 없는 꼬리 칸과는 대조적으로, 앞 칸에는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임에도 필요한 모든 것(심지어 양식장까지!)이 다 있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꼬리 칸의 열악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동지들을 이끌고 앞 칸으로 진격해간다. 동지들 대부분을 잃는 사투 끝에 커티스는 열차엔진의 설계자이자 지배자인 윌포드(애드 해리스)와 마주하게 된다. 이 때 윌포드는 ‘폐쇄된 기차공간의 시스템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원리’(즉, 자본주의의 시스템)를 설명한다. 기차의 엔진이 계속 가동되도록 하려면, 꼬리 칸의 5살짜리 아동의 노동력을 엔진의 부품처럼 이용(착취)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커티스의 반란은 열차의 인구조절을 위해 윌포드 자신이 ‘계획’한 것이다. 진압을 명분으로 반란자들을 학살하면, 생존자들은 꼬리 칸으로 돌아가 전보다 더 널찍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윌포드는 “커티스의 정신적 지주이자 꼬리 칸의 지도자(구루,Guru)인 길리엄도 사실은 그 계획의 협력자”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길리엄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빈민들이 서로 잡아먹는 양육강식의 지옥으로 몰려갈 때, 자신의 팔을 자르는 희생을 통해 존경의 대상이 되면서 꼬리 칸의 질서를 세운 인물이다. 봉준호는 커티스가 아무리 앞으로 진격한다 해도 결국 기차 안이기 때문에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길리엄이라는 인물의 정체를 통해 종교도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요소일 뿐이라고 냉소한다. 

윌포드는 ‘앞 칸과 꼬리 칸이 협력해야 시스템은 유지되고 인류는 멸종을 피할 수 있다’면서, 커티스에게 ‘다음 지배자가 돼 달라’고 제안한다. 커티스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꼬리 칸의 열악한 상황은 얼마간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차의 엔진을 멈추지 않게 하려면, 어린아이의 노동을 계속 착취해야 한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커티스에게 열차를 설계한 남궁민수(송강호)는 또 다른 선택지를 내민다. 그건 열차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결국 열차는 파괴 되고, 남궁민수의 딸 요나와 타냐의 아들만 살아남는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땅을 밟는다. 여전히 세상이 얼어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아마도 또 다른 아담과 이브가 될 것이다.

테오는 죽고 흑인 모녀가 남겨지는 <칠드런 오브 맨>과 동양인 소녀와 흑인 아동이 생존하는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은, 이전 세계를 이끌어갔던 백인 남성 중심주의와 결별한다는 선언이다. 결론은 비슷하지만, <설국열차>는 좀 더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열차를 파괴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극복하지 않을 때 결국 모든 변화는 그 안에 포섭될 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한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자본주의의 종말과 그 이후의 세계를 그린 영화는 없는 것 같다(물론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영화가 있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제 <설국열차>의 다음 이야기가 필요하다.

 

1984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소련 당국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서방세계로 망명했다. 소련 당국은 타르코프스키가 자본주의에 물든 영화를 찍는다고 비판했지만, 정작 타르코프스키는 자본주의 체제에 크게 실망했고 희망을 보지 못했다. <노스텔지아>(1983)를 보면, 미치광이로 낙인찍힌 노인 도메니코는 세상이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고 절망한다. 그는 주인공 안드레이에게, “예전의 나는 세계를 구하려 하지 않고, 내 가족만 구하려고 했다”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 로마로 간다. 그는 캄피돌리오 광장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동상에 올라 혼신을 다해 연설을 한다. 그러나 광장의 사람들은 그의 절규에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심지어 도메니코가 분신을 시도할 때조차, 그들은 무심히 보고 있을 뿐이다. 

도메니코는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해내려면, 너와 내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고 호소한다. 코로나19 사태에 직면해, 슬라보예 지젝은 “과거 우리는 다른 배를 탔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모두 같은 배 안에 있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메시지를 이제 행동으로 옮기자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코로나 집단감염의 상징이 돼버린 유람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의 신세가 돼버리거나,(1) <칠드런 오브 맨> 같은 영화에서나 보던 악몽의 풍경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 샨티, 샨티!(2)  

 

 

글·김경욱
영화진흥위원회 객원 책임연구원,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  『나쁜 세상의 영화 사회학』,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 등이 있다.


(1) 슬라보예 지젝, ‘우리 모두는 코로나 호에 함께 타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4월호.  
(2) <칠드런 오브 맨>의 엔딩타이틀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막으로, ‘샨티(Shanti)’는 ‘평화’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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