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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는, 그러나 몰랐던 그 여자 이야기 <화차>
[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는, 그러나 몰랐던 그 여자 이야기 <화차>
  • 최재훈(영화평론가)
  • 승인 2020.05.0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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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포스터

변영주 감독의 <화차>(2012)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꿈조차 이룰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묻는다. 원작은 한국에서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일본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이다. 1992년 발간된 소설은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작품 속에 매끄럽게 녹여내며 상처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를 설득하는 작품이다.

전작 <발레교습소> 이후 7년 만에 선택한 변영주의 작품으로 원작이 지닌 다층적인 힘을 빌어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드러내놓고 사회비판적인 작품이면서 동시에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 되었다. 문학성과 사회성, 그리고 대중성을 고루 갖춘 원작의 매력도 살리면서 감독이 가지고 있는 사회 비판적인 시선도 살려내기 위해 시나리오는 1992년의 일본이 아닌, 2000년대 한국으로 배경을 옮겼다. 우리는 IMF라는 큰 시련을 겪었다. 경제적 파탄과 신용불량자에 대한 비극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새로운 결말과 원작에 없는 창조된 캐릭터를 남자 주인공으로 두어 한국화된 비극을 잘 직조해냈다.

결혼을 한달 앞둔 문호와 선영은 안동 아버지 댁에 인사를 드리러 떠난다. 그런데 휴게소에서 선영이 갑자기 사라진다. 사라진 약혼녀를 애타게 찾으며 문호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약혼자가 사실은 선영이란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민희가 연기한 여자 주인공은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지우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빌어 살아가고 있다.

 

<화차> 스틸 컷

<화차>는 신용불량, 개인파산, 개인정보 누출, 보험사기, 신분 도용, 사채 등 새로운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다양한 이슈들을 극 속에 잘 녹여 넣는다. 주인공 강선영은 이 모든 사회적 문제를 옷처럼 입고 있는 인물이다. 무겁고 무서운 경선의 삶 속으로 들어간 카메라는 이 미스터리한 인물을 판타지에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판타지의 주인공은 가장 낮은 곳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중산층 수의사 문호이다. 문호를 만나기 전 경선이란 진짜 이름을 가진 여인의 공간은 어둡고 구비진, 낮고 허름하고 지독히 아무것도 없는 일상적 공간이다. 그리고 이 일상적 공간 속에서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은 욕망 하나 이루지 못하는 삶도 있다는 사실은 아릿한 통증을 남긴다.

경선은 아버지의 공장이 망하면서 부모님의 빚을 떠안았다. 경선의 삶을 측은하게 여긴 첫 번째 남편 승주는 그녀를 품지만, 사채업자의 협박 속에 끝까지 그녀를 지키지는 못한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화차>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경제적으로 휘청이던 시절, 대물림된 빚으로 고통받는 한 여인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사채업자는 목숨을 위협하며 협박하지만, 공권력은 누구도 보호하지 않는다. 사채업자는 폭행에 이어 인신매매까지 행하지만 공권력은 경선을 보호하지도, 잘못된 삶을 바로잡지도 않는다. 인간의 존엄이나 가치는 돈 앞에서 어떤 의미도 없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벌레취급 당하며 연명하는 수 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경선은 아버지가 죽어버리기를 매일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혹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 속 사채라는 고통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화차>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가장 낮은 계층 사람의 삶을 바라본다. 그리고 변영주 감독은 명백한 범죄자이지만, 경선을 동정할만한 피해자로 바라본다. 이전의 작품들이 주인공을 머리로 이해했던 것과 달리, <화차> 속 경선은 관객들의 가슴과 맞닿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그린다. 김민희라는 배우가 지닌 어딘지 연약하면서, 미스터리한 이미지도 한몫을 한다.

원작 소설에는 없지만 경선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혹은 경선을 이해하기 위한 다른 장치로 창조된 약혼자 문호는 사회적 비극 속에서 선량한 가해자, 혹은 무지한 방관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큰 시련이나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라난 중산층의 삶 속에서 그는 사실 온전히 경선이라는 인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차> 스틸 컷

살아남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고, 가짜 신분까지 입어야 하는 삶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동정하거나 경선을 이해하지 않는다. 오직 문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돈 때문에 속인 건지, 그럼에도 그녀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진심이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순진하기까지 한 문호의 질문, 혹은 문호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내 삶과 거리가 멀다고 낮은 곳의 사람들을 돌아보거나 이해하지 않고 방치하는 우리들의 진짜 모습과 가장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실질적인 폭행을 행하는 사채업자와 더불어 문호의 무지함은 그 자체로 다른 폭력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중반이 넘어가면서 문호는 사랑했던 여인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삶과 사랑이 기만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경선을 쫓는 것처럼 보인다. 경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숙한 여성이어야 한다. 자신을 속인 악녀여서는 안 된다. 그것만이 안온한 자신의 일상을 지키는 방법이라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를 추적할수록 문호는 자신이 허구의 여성성에 빠져 기만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은 사라지고, 분노가 더 강해진다.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던 문호라는 인물 때문에 영화 <화차>의 이야기는 훨씬 더 풍성해 진다. 문호의 갈급함과 그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에는 교감이 생긴다. 어떤 관점에서 보냐에 따라 문호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처럼 보인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범죄자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경선이라는 인물에 더 다가갈수록 이야기는 더 풍성해진다. <화차>는 김민희가 연기하는 경선이라는 인물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부글부글 끊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이 부어 화상을 입히는 영화다. 인간의 가장 저열하고 추악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죄의식을 공유하게 만든다. 마치 상처 난 살갗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다.

<화차>가 원작과 달리 만들어낸 마지막 장면은 어떤 선택지도 없는 자본주의 속 가장 가난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를 보여주며 비극으로 끝난다. 경선은 자신을 쫓아오는 형사들을 피해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백화점을 가로질러 달아난다. 그리고 더 달아날 곳이 없어지자 선로를 향해 뛰어내린다. 추락하는 것만이 경선이 자신의 삶에서 직접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시점과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배치를 통해 경선이라는 인물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변영주 감독은 손잡이가 아닌 날이 선 칼날을 관객에게 들이민다. 인간 본성이라는 민낯 뒤로 그 보다 더 잔인한 자본주의의 괴물을 숨겨둔 이야기는 불편하지만 우리 사회의 폐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화차> 스틸 컷

똬리 틀고 있다가 갑자기 독이 든 이빨을 드러내는 뱀처럼, 일상적인 모습으로 동그마니 웅크려 있는 분노와 불신이 자리한 우리 사회에 사실 이 모든 불합리와 차별을 극복할 대안은 없어 보인다. 살아남기 위해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 인물들, 범죄만이 생존의 유일한 도구가 된 사람들, 그리고 변영주 감독이 보여준 <화차> 속 세상은 판타지로 직조된 가공의 세계가 아니라, 수직과 수평으로 엄밀하게 구별된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담아낸 현실이라 더욱 뜨거운 지옥 같아 보인다.

 

사진출처_네이버영화_화차

 

: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9년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이보명화제 프로그래머, 3회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문화플러스 서울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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