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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의 문화톡톡] 기본소득의 길 앞에서
[이은지의 문화톡톡] 기본소득의 길 앞에서
  • 이은지(문화평론가)
  • 승인 2020.05.0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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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은 길

5월중에 정부가 지급하게 될 긴급재난지원금은 선별 조건 없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위축된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경기도가 선결적으로 재난기본소득 지급을 결정하면서, 여러 지자체들도 재난기본소득 지급에 동참하고 있다. 재난지원금과 관련한 기사도 꾸준히 보도되고 있다. 신청과 수령은 어떻게 하는지, 어디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안내부터, 지역화폐로 받은 재난지원금의 ‘현금깡’을 시도한 사례에 이르기까지, 지원금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선하기 그지없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일정 금액을 정기적으로 지불하는 기본소득 개념은 서구 사회의 진보적인 사상가 및 경제학자들을 통해 오랫동안 지지받아왔다. 실제로 특정 사회에서 이루어졌던 기본소득 실험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 진영은 기본소득의 효과를 일종의 도그마로 간주하며 지속적으로 공격해왔다. 혹은 자본주의를 심폐 소생하는 논리로 일부 보수 진영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데 대해 도리어 진보 진영에서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우리 또한 긴급재난지원금의 전 국민 지급을 결정하기까지 적지 않은 진통을 겪었다. 재원 마련 등을 이유로 소득 하위 70%에게만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과 100% 지급해야 한다는 견해가 대립했기 때문이다. 결국 진통 끝에 후자로 결정을 굳힐 수 있었지만, 개인 단위가 아닌 가구 단위 지급이라는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가구 단위로 지급하는 것은 세대주에 대한 가족 구성원의 경제적 독립성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재난지원금의 전국민 지급 결정이 기본소득이라는 가보지 않은 길을 미리 체감하게 해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재난지원금이 지급되고 유통되면서 나타나게 될 효과는 장차 우리 사회가 기본소득을 맞이할지 여부를 결정할 때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우리는 중대한 사회적 실험의 현장에 놓여 있는 셈이다.

 

무조건 지급의 의미

기본소득이 대상을 선별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 전원에게 무조건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 중 하나인 비용과 효율성 문제는 정부가 긴급재난지원금을 70% 지급에서 100% 지급으로 바꿀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상위 30%를 선별하는 데 드는 비용과 상위 30%까지 포괄하여 지급하는 비용이 사실상 크게 차이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원금 지급 기준을 정하는 과정부터 기준에 맞는 대상을 분류하기 위해 소득 및 자산 규모를 조사하는 과정까지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다.

조건부로 선별 지급하는 기존 복지기금의 경우 지급 대상에 해당하는 이는 자신이 지원금을 받을 만큼 충분히 가난하고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일종의 대가나 비용으로 지불해야 한다. 이는 지급 대상에 해당하면서도 (혹은 해당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용을 지불할 시간적, 육체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 그 자체로 커다란 장벽으로 작용한다. 나아가 지급 대상을 분류하는 조건은 아무리 합리적인 계산을 거쳐 산출되었을지라도 그 조건을 충족하는 이들을 향한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 지원금을 받는 이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즉 다른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낸 세금으로 생활하는 일종의 무임승차자라는 식의 낙인 말이다. 당사자는 그러한 사회적 낙인을 심리적으로 감당하기 위한 노력을 다시금 비용으로 지불해야 한다. 결국 조건부 지급의 최종 액수는 이러한 비용을 뺀 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사진 출처 : 창비 홈페이지
사진 출처 : 창비 홈페이지

 

기본소득은 구성원 간의 평등을 상징적으로 구현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단순히 행정적인 편의나 비용 절감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들에게 사회에 대한 ‘권리’로서 지급되는 최소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공동체 내에서 창출되어 축적된 부를 모두에게 공평하게 지급함으로써 사회적 부를 재분배하는 효과 또한 기대할 수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의 공동창립자인 가이 스탠딩은 『기본소득』(창비, 2017)에서 잉글랜드의 도시 미들스브러의 사례를 소개한다. 19세기에 철광석이 발견되어 산업발전의 요충지로 기능했던 미들스브러는 오늘날 완전히 쇠락한 도시가 되었다. 가이 스탠딩은 잉글랜드 타 지역에 부유함을 가져다준 미들스브러와 같은 곳에 사회적 부를 분배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기본소득은 공동체가 과거로부터 상속받은 부를 공유하는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노동하는 유토피아 신화의 종말

부의 재분배 효과가 중요한 까닭은 기존의 시스템 하에서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산업화 시대 이래로 노동에 대한 신화가 지속되어 온 점과 동시에 정작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지대소득과 같은 불로소득이 과도하게 팽창하고 또 그에 대한 세금이 충분히 부과되지 않아온 점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의 공장주들은 기계의 생산 속도에 맞춰 꾸준히 성실하게 근무하도록 노동자들을 훈육해야만 했다. 이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식의, 노동을 찬양하고 게으름을 경멸하는 가운데 산업화 시대를 통과하는 모든 사회에 단단히 뿌리 내렸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동녘, 2019)에서 이러한 그릇된 노동 윤리가 가난한 자들이 가난한 이유를 그들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고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에 도래한 경기호황은 한동안 거의 완전한 고용과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 특수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노동과 고용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23조에 ‘모든 사람의 일할 권리’가 규정되어 있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 맥락에서이다. 가이 스탠딩은 피고용인의 일할 ‘권리’는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일할 ‘의무’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산업화 시대를 지배해온 노동 윤리가 오늘날까지 도덕적 잣대로 작동하는 것은 완전 고용이 가능했던 찰나의 과거를 절대적인 척도로 오인하고, 고용주의 의식을 노동자가 자신의 의식처럼 여기는 허위의식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의 이윤 추구는 생산과 성장보다 주로 소비와 비용 절감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기업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줄이는 방식으로 실적을 올린다. 노동자의 소득은 온갖 종류의 불필요한 소비를 통해 시장에 다시 토해내게끔 부추겨진다. 안정적인 고용을 통한 생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은 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지만, 이를 사회적으로 재분배하는 조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 개입하여 불균형한 상태를 조정할 수 있다.

 

코끼리를 상상하는 장님처럼

이처럼 기본소득은 무조건 지급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가령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 앙드레 고르는 정치적 생태학과 탈성장을 모색한 책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에서 기본소득의 낙관적인 전망을 펼치고 있다. 기본소득이 자리 잡는다면 사람들이 생계를 위한 노동에 투자하는 시간은 줄이고 노동 시간, 노동 방식, 노동 영역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자본의 성장을 돕는 착취의 대가로서의 노동이 아닌 활동에 좀 더 많은 시간과 가치를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이 스탠딩은 이를 노동(labour)에서 일(work)로의 전환으로 표현한다. 소득과 무관한 활동을 늘리거나 게으름을 누림으로써 노동을 견디게 하는 소비에 대한 욕망을 누그러뜨리고, 보다 생산적이고 성찰적인 활동에 대한 욕망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전망은 노동과 노동자를 해방의 주체로 이상화했던 과거의 사회주의적 낭만성과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생산이 아닌 소비를 중심으로 경제성장의 초점이 옮겨져 온 오늘날, 기본소득은 사람들에게 노동에서 일로의 전환보다는 노동에서 소비로의 전환을 더욱 용이하게 해주지는 않는가? 기본소득 전문가들이 기본소득의 도입 이후를 사고하는 방식은 대체로 노동 해방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면 과도한 소비로부터도 자연스레 해방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소비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노동 윤리 못지않게 소비 윤리 또한 우리를 단단히 구속하고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을 하지 않으며 소비하는 이들, 혹은 소비하는 행위로부터 노동을 창출하는 이들조차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자칫 자본주의의 군불을 지피는 불쏘시개로 전락할 수 있지 않을까?

 

사진 출처 : 바다출판사 홈페이지
사진 출처 : 바다출판사 홈페이지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의 좌파 경제학자 바티스트 밀롱도는 『조건 없이 기본소득』(바다출판사, 2014)에서 기본소득을 만능으로 여기지 말 것을 주문한다. 기본소득의 도입이 얼마만큼의 사회 변혁을 가져올지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기본소득을 통해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사회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 것을 기본소득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나아가 기본소득 도입의 초당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기본소득의 경제적, 행정적 효율성에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

밀롱도의 비교적 유연한 접근은 기본소득이 실현된 세상에 대한 주장 또한 일종의 유토피아일 수 있음을 환기시켜준다. 기본소득 도입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지나치게 촘촘한 논리들은 도리어 기본소득의 유토피아적 성격만 강화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본소득을 반드시 도입해야 하는 백번 타당한 근거들이 아니라, 기본소득의 실현을 통해서만 펼쳐지리라 기대되는 세상을 기본소득 없이도 상상하고 꿈꿀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지 않을까? 어쩌면 기본소득은 그러한 암중모색의 가운데에서야 비로소 가장 구체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손끝에 와 닿을지도 모른다.

 

글 : 이은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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