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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나는 당신의 피사체가 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장윤미의 문화톡톡] 나는 당신의 피사체가 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0.06.04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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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관심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어린 시절 가족 모두가 즐겨봤던 티브이 프로그램 중 하나는 개그맨 이경규씨가 진행했던 <숨은 양심을 찾아서>라는 이름의 프로였다. 특정 장소에 카메라를 몰래 설치한 후 정해진 퀘스트에 성공한 ‘숨은 양심’들에게 ‘양심 냉장고’를 주는 내용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재미와 감동도 좋았지만, 몰래 지켜보는 데서 오는 쫄깃함과 동시에 ‘숨은 양심’을 찾아냈을 때 느끼는 희열은 나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가족을 티브이 앞에 모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청자로 하여금 ‘렌즈 밖 감시자’와 ‘렌즈 안 주인공’의 입장을 동시에 오가게 함으로써 양가의 감정을 느끼도록 한 것이 인기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렌즈 밖 시청자’ 입장에서는 몰래 숨어서 보고 싶다는 욕구(본능)의 감정을, ‘렌즈 안 주인공’ 입장에서는 양심-보상(초자아)의 감정을 유도하면서 보-는사람과 보-여지는사람 사이의 통제(감시)와 보상 심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시청률과 공익성을 모두 얻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저 몰카의 주인공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몰카’에 찍히기만 한다면 양심을 공인받는 것은 물론 보상으로 냉장고까지 받을 수 있는데 누군들 몰카 렌즈 속의 피사체가 되고 싶지 않았을까. 물론 몰래카메라에 찍힌다는 것, 렌즈의 피사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리가 없었으니 이런 소망을 꿈꾸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저 당시만 해도 티브이에 등장하는 사람은 ‘선택된 자’로 ‘가문의 영광’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 당시만 해도 ‘몰카’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공익에 이바지한다는 긍정적이고도 분명한 목적 덕분에 괜찮은 촬영 기법의 하나로 수용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때처럼 선한 목적으로 ‘몰카’를 찍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 행여 그러한 목적을 갖고 하더라도 찍힌다는 행위에 유쾌함을 느낄 주인공(피사체)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적어도 ‘몰카’하면 떠오르는 연관 검색어로 관음, 화장실, 성, 범죄, 피해자가 딸려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피사체가 된다는 것

2018년에 큰 이슈가 되었던 이른바 ‘엄마 몰카’ 사건은 그 피해자가 엄마라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초등학생들의 호기심으로 시작한 ‘엄마 몰카’는 온라인 상에서 가장 막강한 자본인 조회 수를 끌어올릴 수 있는 강력한 인기 콘텐츠가 되자 엄청난 양과 속도로 플랫폼 사용자들에 의해 생산/소비되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특정 신체를 찍어 올리면 구독을 해주겠다는 댓글에 부흥이라도 하듯이 엄마의 신체 일부를 몰래 찍어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고, 반대로 본인이 제시한 구독자 수가 성사되면 엄마의 신체를 찍어 올리겠다는 공약을 걸고는 실제로 엄마의 신체를 찍어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한겨레, <엄마 몰카, 선생님 몰카…아슬아슬 초등학생의 ‘엿보기 놀이’, 2018년 5월 16일 자 참고) 이후 관련 영상이 공론화되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유튜브는 해당 영상에 댓글 기능을 폐쇄하는 등 조치에 나서기 했지만 물리적 책임이 수반되지 않는 소극적인 제재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런 제재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금도 ‘엄마 몰카’를 검색하면 수많은 영상이 웹 플랫폼을 통해 공유되고 소비되고 있다.

스마트폰의 보편화, 대중화로 인해 미디어에 접근하거나 다룰 수 있는 연령은 낮아지고 그 시기는 매우 빨라졌다. 특히 어린 나이에 유튜버로 성공하여 또래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거나 돈을 벌었다는 ‘온라인 인싸’들의 성공 스토리텔링은 요즘 아이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아이들은 그들을 따라 하고 그들과 같이 영상을 찍으면 자신도 인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을 찍을지, 그것을 찍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들의 관심을 얻을 수 있는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한번 해보라고 부추기기는 사람은 있어도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튜브를 통해 재밌는 영상을 보여주는 부모는 있어도, 수업 과제를 영상으로 찍어 공유 플랫폼에 업로드하라는 선생님은 있어도, 어떤 것을 찍어야 하고 어떤 것은 찍지 말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카메라로 찍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주체-대상의 개념이 아직 장착되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의 눈과 카메라의 렌즈를 동급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과 카메라 렌즈는 분명히, 또 완전히 다르다. 그것이 무엇이든 동의 없이 사진(영상)을 찍고, 또 찍힌다는 건 꽤나 폭력적인 행위다. 나는 피사체를 선택하고, 그/것은 선택된다. 선택하는 것은 나이고, 나에 의해서 피사체가 선택되는 것이다. 한 개인은 누구의 피사체가 되고, 대상이 되는 순간 그/들에 의해 편집당하고 파편화되고 또 왜곡된다. 그러나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동의 없이 찍고 찍히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폭력을 단지 재미와 흥미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언가 찍고 싶다는 욕망은 권력을 향한 욕망과도 같다. 내가 찍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는 건 대상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욕망은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그리고 공유 플랫폼에서 절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인 조회수라는 조건이 보태지면서 더 강렬해지고 그 수위는 높아지게 된다. 높은 조회수는 ‘셀럽’ 혹은 ‘인싸’의 메타포이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좋아요’와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인싸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찍고 싶은 것이 아닌 (잠재적) 구독자들이 원하는 것으로 그 대상을 전환해야 한다. 그러면서 욕망과 권력의 관계는 이중적이고 더 복잡해진다. 카레라 렌즈를 쥐고 있는 나는 피사체를 다루는 주체인 동시에 사용자(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피사체를 소비해야 하는 (욕망의) 대리자가 되고 또 그 대가로 조회수를 얻는다. 이 과정에서 영상 속 피사체는 영상을 찍은 생산자에게, 그리고 그 영상을 소비하는 사용자에게 이중으로 소비 당한다. 이 과정에서 파생되어 재생산되는 것들, 예를 들어 악플, 외모 비하, 사생활 침해 등은 고스란히 피사체의 몫으로 돌아간다. 많은 아이들은 엄청나게 높은 조회수 뒤에 가려진 이와 같은 권력/폭력을 각각 인싸/관종이란 언어로 대체하며 유희하며 가볍게 받아들인다.

또 하나, 아이들의 경우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로 자신의 주변을 피사체로 문제의식 없이 쉽게 선택하곤 한다는 것이다. 특히 가족의 경우 개인-가족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일상의 대부분을 공유하는 까닭에 가족과 그 일상을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으로 구분하기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행위가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목적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보편적 논리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온라인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가르쳐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온라인 특성상 ‘무료 공유’가 기본값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엄마/아빠/친구들과 같은 주변의 일상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사용해도, 또 공유해도 되는 공공재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모든 피사체는 나의 일부가 아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동의와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걸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우리)아빠/엄마/형제/자매/친구의 몰카’를 찍는 것,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에 대해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영상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될 경우, 즉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이동할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위험성, 내가 찍은 피사체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염두하는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런 문제를 대표하는 예로 ‘신상 털기’를 들 수 있다. 신상 털기란 행위는 불특정 피사체를 '몰래 보고 싶다'는 시각적 욕구에 머무르지 않고 실체를 더 가까이 싶다는 관음적 욕망으로 그 초점이 옮겨가게 되면서 소비 대상이 실존하는 개인 사생활로 옮겨진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상 털기의 가장 큰 문제는 표적의 대상이 그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포털 사이트의 자동 연관 검색어 기능 탓에 가족, 주변, 친구, 학교까지 말 그대로 “탈탈” 털리는 수준이다. 그리고 그 영향력과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실제로 아이들은 자신의 신상이 털리는 것은 법적 처벌보다 훨씬 두려운 낙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타인의 신상 털기는 정보 또는 알 권리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포탈 검색창에 특정 인물 또는 사건을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들(~의 부모/가족/직업/결혼/나이/학교) 필터링 되어 등장하는데 이런 알고리즘은 자칫 아이들로 하여금 ‘신상 털기’ 행위를 범죄가 아니라 알 권리 또는 정보로 해석하게 만드는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은 이 모든 행위들이 재미가 아닌 심각한 범죄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법적 처벌의 경계선에 있거나 실제로 처벌이 사실화되었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알았다 하더라도 비난과 피해는 다행히도(?) 내가 아닌 피해자가 된 피사체에게 고스란히 돌아가는 사회적 분위기 덕분에 진심으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능력 있는 부모가 ‘우리 애가 호기심에 모르고 한번 찍은 것’이라는 변명으로 가해자를 무지와 '철없음'으로 쉴드 쳐주고, ‘조신하지 못해서 재수 없게 몰카에 찍힌 것’으로 피해자를 가십 대상으로 삼는 가벼움은 타인을 함부로 상품화할 경우 그 피해와 대가는 고스란히 가해자의 몫이 될 것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든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몰카’의 가해자들이 당당한 이유, 그리고 몰카 성범죄를 일으키는 가해자들의 나이가 점점 어려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무엇을 찍으면 안 되는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강력하게 요구되는 교육 중 하나가 바로 미디어 리터러시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PC와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용자의 미디어 사용 능력’에 초점이 맞춰졌던 만큼 수용자의' 능력 향상 교육'에 핵심을 두었다. 그런데 수용 능력 향상이란 말에는 이미 미디어(기술)와 관련된 교육을 선행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미디어 리터러시는 ‘수용자’의 교육 수준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등장‧보편화되면서, 그리고 스마트폰의 ‘사용자’의 나이가 절대적으로 낮아지고 그들이 미디어의 가장 강력한 소비자가 되면서 미디어 리터러시는 ‘사용자’의 나이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많이 배운 할아버지보다 미취학 손자가 스마트폰을 훨씬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이라는 미디어는 일상인 동시에 생태계 그 자체다. 스마트폰은 미디어 환경의 토대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토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나이에 따른‘수용자’의 ‘능력 향상’이 아닌 나이에 불분하고 ‘사용자’의 ‘미디어를 향한 비판적 사고’로 그 목적을 변화, 확대해야 하고 이와 관련하여 정부와 사회 역시 빠른 시간 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또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주도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자신만의 미디어 생태계를 만드느냐, 아니면 주어진 생태계에 수동적으로 점령되느냐 하는 문제는 개인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고민은 온라인 시대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를 소유할 만한 경제적 조건이 갖춰진 성인이 되어서나 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비판적 사고도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술 발전으로 인해 미디어를 소유하는 데 큰 비용이 들지 않기도 하고 미디어 활용 수준과 지적 수준을 비례 관계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빠르면 유아기부터 미디어 활용에 무의식적으로, 대량으로 노출되고 있다. 이런 토대에서 미디어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우선적으로 적용하여 활용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이를 기대하는 것 역시 무리다. 게다가 스마트폰을 소유하는 나이가 십 대 미만으로 낮아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긍정적인 것보다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줄지 않는다는 것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통한 비판적 사고와 태도 장착 여부가 앞으로 한 개인의 미래는 물론 그가 속한 공동체의 미래의 뱡향을 제시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는 의견에는 이견이 없다.

부모와 어른들, 그리고 사회는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더불어 자신이 관심을 받기 위해 아무것이나 피사체로 삼아 상품을 만들었듯이 언제든지 자신 역시 그 서비스의 상품이 된다는 것도 기억하도록 가르쳐주어야 한다. 세상에 공짜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1]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것, 나의 동의 없이 타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우리는 이것에 대해 좀 더 예민하고 섬세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반드시 장착해야만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분명하게 질문해야 한다. ‘재미를 위해 무엇을 카메라 렌즈에 담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찍을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찍지 말아야 하는가?’, ‘지금 내가 찍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확실한 동의를 구하고 찍었는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미디어를 소유/장착하고 그것과 연결되는 좋은 장점을 ‘자원’(모든 대상은 피사체로 이용할 수 있다)으로 삼아 이용하는 건 자유지만 그에 따른 ‘제약’(피사체의 동의 없이는 어떤 것도 찍어서는 안 된다)까지도 뒤따르며 동시에 책임져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은 교육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이른바 ‘초등 학생판 N번방 사건’과 같은 끔찍한 이름의 범죄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자원’과 ‘제약’이란 용어는 김성우‧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 빌려왔습니다.)

*참고문헌

[1] 톰 체트필트, 정미나 옮김, <인생학교-디지털 시대에 살아남는 법>, 쌤파커스,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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