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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남성 시선에 도전하는 불온한 여성,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남성 시선에 도전하는 불온한 여성,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성진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0.06.0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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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정진우, 1980)는 정비석의 단편소설 「성황당」을 각색한 영화다. 또한 이 영화는 배우 정윤희에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한국영화에 동시녹음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한 정진우 감독의 다섯 번째 동시녹음 작품이다. (영화는 ‘제5회 동시녹음 작품’이라는 큰 자막과 동시녹음으로 진행되는 촬영현장 스틸 사진으로 구성된 이색적인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원작 소설 「성황당」은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숲을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순이가 주인공이다. 숯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가는 현보와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순이의 일상은 우연히 만난 산림관리원 김주사로 인해 깨지게 된다. 순이를 탐하던 김주사는 허가 없이 나무를 베었다는 죄목으로 현보를 잡아가고, 순이는 김주사에게 겁탈당할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준 현보의 친구 칠성과 떠난다. 하지만 숲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이는 다시 숲 속의 움막집으로 되돌아온다. 소설과 영화는 모두 자연의 생명력과 그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삶의 건강함을 찬양하고 있는데, 순이는 바로 그 이상향이 육화된 인물이다. 그리고 순이라는 캐릭터에는 자연과 동일시하면서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남성 중심 시선과 그 시선을 향한 불온한 도전이 공존한다.

 

영화에서 현실의 여성이 축소되고 납작하게 재현되어 온 역사와 그에 대한 비판의 역사는 유구하다. 몰리 헤스켈이 『숭배에서 강간까지』에서 보여주듯이 그 양태는 한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숭배와 동경의 대상이든 강간의 대상이든, 여성이 주체가 아닌 대상의 위치에 놓인 이상 그 지위가 필연적으로 짊어져야하는 수동성을 여성 캐릭터는 피할 수 없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의 순이 또한 마찬가지다. 철마다 나는 산나물을 반찬삼아,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과 숲길을 마당삼아, 그리고 좋아하는 새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순이는 자연 그 자체다. 장작을 패고 숯가마에 불을 지피는 동안 온 몸을 뒤덮은 땀과 먼지는 계곡의 차가운 물에 씻어내면 되고, 숲속 어디든 현보와 함께 있다면 그곳은 둘을 위한 사랑의 공간이 된다. 땀 흘려 일한 후 계곡에서 함께 씻고 웃통을 벗은 현보가 저고리를 입지 않은 순이를 등에 업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자연에 완전히 동화된 낙원의 삶을 연상시킨다.

사실, 어린 시절 버려져 현보의 집에서 자란 순이가 숲과 일체된 삶을 살게 된 것은 현보의 영향 때문이다. 숲이 주는 혜택과 숲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것이 현보였다. 숲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영화가 현보와 순이를 위치시키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큰 나무를 베고, 불을 조절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순이에게 가르치는 현보가 자연을 통제하면서 동시에 그 일부가 되어 살기를 선택한 능동적인 주체라면, 숲 속을 제 집 앞마당처럼 뛰어다니면서도 장터에서 본 새로운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이는 외부의 영향에 취약한 인물이다. 현보는 김주사에게 받은 분을 하얗게 바른 순이에게 크게 화를 내는데, 이 장면은 보호자이자 스승으로서의 현보와 아직은 미성숙한 주체로서 순이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또한 영화가 중반을 흐른 이후 순이는 줄곧 김주사와 칠성에 의해 성적 대상화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순이는 카메라에 의해 자연과 동일시되고, 현보에 의해 미성숙한 인물로 위치지어지고, 김주사와 칠성에 의해 성적 대상화되면서, 남성의 시선이 만든 삼중의 억압 속에서 수동적 주체로 위치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영화에는 순이를 향한 남성들의 시선을 궁지에 빠뜨리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영화는 자연의 일부로서 순이가 가진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생명력과 성적인 에너지를 생생하게 담아내려는 노력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장면에는 순이를 수동적 주체이자 성적 대상으로 정박하려는 남성 중심의 시선과 그것에 너무나 충실히 응답하는 듯 보이는 순이의 과잉적 제스쳐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이 있다. 순이는 땀에 젖은 옷을 훌훌 벗어던진 채 계곡 물에 뛰어 들고, 저고리를 가져간 김주사 앞에서도 쉽게 주눅 들지 않으며, 현보와 함께 할 때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와 같은 인물의 거리낌 없는 태도는 그녀의 원시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녀에게 어던 불온한 힘을 부여한다.

 

현보가 김주사에게 잡혀 갈 때도, 그리고 김주사가 혼자 남은 순이를 위협할 때도 순이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현보에게 위험이 있을 것이라는 김주사의 겁박에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던 것이나, 혼자가 된 순이에게 또 다시 현보를 들먹이는 김주사의 협박에 맘대로 하라며 큰 소리 쳤던 것은, 순이가 세상 물정에 밝지 않고 미성숙한 인물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특징은 극중 남성들을 곤란에 빠뜨린다. 현보는 결국 잡혀가고 김주사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향한 억압적 시선의 요구에 충실히 임할수록 그 시선의 주체를 궁지에 빠뜨리게 되는 딜레마, 이것이 순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양가성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순이의 이러한 특징은 소설에 비해 약화된 바가 없지 않다. 그것은 영화가 단편 소설을 각색하면서 덧붙인 인물들의 전사와 달라진 엔딩 때문이다. 소설은 순이의 시점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반면, 영화는 소설에 없는 인물들의 전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현보에게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그리고 소설은 순이가 움막으로 돌아왔을 때 현보로 보이는 남자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나지만, 영화에서 순이는 되돌아 온 움막에서 김주사를 만나고 그를 껴안은 채 숯가마 안으로 뛰어들어 죽는다. 순이를 짝사랑했던 칠성은 빈 움막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돌아 온 현보에게 순이의 죽음을 알리면서 '순이는 네 여자'였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엔딩은 능동적 주체로서 숲으로 돌아가기로 한 순이의 선택을 현보를 위한 복수로 축소시키고, 전체 이야기를 남성의 관점으로 고정시켜버림으로써 순이의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던 소설과 차이를 만든다.

이처럼 여성인 순이의 목소리가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순이가 대표하는 자연의 순수함과 생명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남성의 시선에 도전하는 그것의 불온한 에너지가 스며있는데, 이는 순이를 연기하는 배우 정윤희의 기여가 크다. 청순미와 관능미를 동시에 대표하는 정윤희의 강력한 스타 페르소나는, 소설과 비교해 확연하게 약화된 순이의 목소리를 보완하면서 남성의 시선에 도전하는 영화의 전복성을 지탱해준다.

1970년대와 80년대 유행했던 에로영화를 연상시키는 제목과 카메라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여배우의 몸, 국제영화제 진출을 의식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 원시성의 과도한 전시 등, <뻐구기도 밤에 우는가>는 자기 스스로를 시선의 대상에 위치 지으려는 여러 의지의 복합적 산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의지의 과잉은 시선의 대상이라는 지위에서 미끄러져 전복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최소한 여성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순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불온한 에너지는 이 영화를 그저 그런 향토적인 에로티시즘 영화 그 너머 어딘가로 향하게 해준다.

 

 

글·성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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