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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문화톡톡] 헐겁지만 견고한 제약, 그 안에 생동하는 본질-<톰보이>
[김희경의 문화톡톡] 헐겁지만 견고한 제약, 그 안에 생동하는 본질-<톰보이>
  • 김희경(문화평론가)
  • 승인 2020.06.22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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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헐겁고 느슨해 보이는 제약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제약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때론 알면서도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무엇보다 불가항력적이며 견고한 장벽으로 작동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는 이 제약의 헐거움과 견고함을 함께 보여준다. 영화에서 큰 갈등이 일어나거나 커다란 충돌이 일어나진 않는다. 그러나 제약 안에 갇혀 버린 존재, 그 존재의 생동하는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그 이중성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느슨함을 단순에 견고함으로 전환

영화의 오프닝은 이런 제약의 특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카메라는 짧은 머리를 한 아이의 뒷모습과 바람을 느끼는 손을 클로즈업 한다.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비춘다. 달리는 차 위에 앉아 빛과 바람을 온전히 느끼려는 아이는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아이를 아래서 붙잡고 있던 아버지의 질문은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안 무서워?” 아이는 라며 짧고 명쾌하게 대답하고,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운전을 함께 해본다. 자유와 평온함에 불쑥 들어온 두려움에 대한 질문은 아마 이 열살 짜리 아이가 지속적으로 받게 될 질문일 것이다.

영화는 제약의 헐거움을 단숨에 견고함으로 바꾼다. 당연히 남자 아이일 것이라 여겼던 편견이 어머니의 첫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수면 위로 올라온다. 아이를 보고 우리 딸 왔구나하는 대사 한마디로 아이에게 주어진 제약의 실체를 끌어올린다.

아이의 이름은 미카엘로레. 미카엘은 아이가 스스로 명명한 것이며, 로레는 부모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즉 아이는 남성이고 싶어 하고, 주어진 신체 조건은 여성이라는 의미다. 이 간극은 결국 누군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러나 누군가에겐 오랜 시간 자신을 가두고 짓누르는 제약이 된다. 영화는 체념하거나 대항할 수 있는 어른보다, 이것을 숨겨야 하면서도 체념하기 보다 순수하게 갈망하고 원하는 아이를 통해 제약의 거대함과 무게를 부각시킨다.

 

양분하는 움직임, 연결하는 움직임

로레는 새로 만난 친구 리사에게 자신을 미카엘로 소개한다. 그리고 미카엘로서 동네 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어울리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스포츠는 신체적 조건을 기준으로 아이들을 양분시킨다. 축구를 할 수 있는 남자 아이들과 축구에서 제외된 여자 아이 리사다. 로레는 신체적 조건이 제약이 되는 것에 대해 처음엔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곧 남자 아이들이 웃통을 벗고 축구를 하는 모습을 닮고 싶어하며 이를 거울 앞에서 흉내낸다. 다음엔 용기를 내어 축구를 한다. 축구를 꽤 잘하는 로레는 그 신체적 조건이 실질적인 제약이 아닌 그저 편견이 만든 허울 뿐임을 보여준다.

이 편견은 미카엘이 된 로레에게 계속 눈속임을 해야 하는 제약으로 작동한다. 이름부터 신체까지 로레의 모든 것은 눈속임의 대상이 된다. 영화는 이 행위의 연속으로 긴장감을 만들어 내고, 로레에게 가해지는 압박의 형상을 보여준다.

감독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에서도 그랬듯 축구, 춤 등 움직임을 적극 활용한다. 축구가 신체적 차이를 인지하게 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 로레와 리사가 함께 추는 춤은 성별을 넘어선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감정을 표출하고 연결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두 아이는 춤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고 펄떡이는 생명의 본질을 보여준다.

 

존재의 본질, 본질을 이해하는 존재

영화에서 로레의 동생 잔은 어린 나이에도 로레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는 존재로 나온다. 잔은 로레가 마이클인 척 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로레와 마이클의 차이보다 존재 자체에 집중한다. 로레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며,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온전히 이해한다. 그렇기에 로레는 제약의 무게가 느껴질 때마다 잔의 곁에 있으며, 잔 역시 로레가 어머니로부터 상처를 받은 순간에 로레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존재의 본질은 그 본질을 이해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빛난다.

영화는 로레의 본질은 숲이라는 자연을 통해서도 강렬하게 표출시킨다. 오프닝에서 로레가 빛과 바람을 느끼고 있을 때 카메라는 푸르른 나무를 함께 비춘다. 그리고 영화 전반에 숲이라는 공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이 안에서 나타나는 로레의 모습을 비춘다. 숲은 온전히 로레의 비밀을 숨겨주는 곳만은 아니다. 로레의 비밀이 아이들에게 드러나고, 아이들이 로레를 둘러싸고 압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인간이 가진 편견이 아이들 안에도 얼마나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로레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원피스를 벗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로레와 리사가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종국에 숲은 로레의 본질이 휘청이는 모습을 다 알고 있기도 하며, 그 상처를 보듬어 안는 역할을 한다.

로레에게 주어진 제약은 그렇게 오랜 시간 이어질지 모른다. 느슨해 보이면서도 커다란 굴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마지막 로레의 옅은 미소를 보여주며 이에 대한 영화적 답변을 내놓는다. 그럼에도 로레는 생동하며 미소 짓고 있을 것이라고.

*사진출처:네이버영화

글:김희경(문화평론가)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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