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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의 문화톡톡] 시간의 정치학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영화: 2000년대 극영화들(2)
[박현선의 문화톡톡] 시간의 정치학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영화: 2000년대 극영화들(2)
  • 박현선(문화평론가)
  • 승인 2020.07.13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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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의 문화톡톡] 시간의 정치학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영화: 2000년대 극영화들(2) 

 

박현선(문화연구자)

 

1. 재현할 수 없는 기억의 영화적 표현: 홀로코스트와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역사는 종종 ‘아시아의 홀로코스트’로 비유된다. 마찬가지로 ‘위안부’ 영화는 홀로코스트 영화가 제기한 재현의 문제와 중첩되어 있으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시사하고 있다. 미리엄 바투 한센은 홀로코스트를 할리우드 양식으로 극화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분석하면서 이 영화가 “논쟁의 관점을 어떻게 끌어냈는지 뿐만 아니라 국가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한 주장을 하기 위해 다양하고 불평등한 담론 사이에서 논쟁을 가시화하는 방식(즉 동질적인 국가가 아니라 민족적 대중이 명백히 다르게 형성되는 것)에 주목한 바 있다. 

진행 중인 홀로코스트 기억과 소위 ‘홀로코스트의 미국화’(혹은 할리우드화) 문제에 대한 징후로서 영화를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오갔지만, 그 사이에서 이런 논쟁들과 더불어 한센이 주목한 것은 역사와 기억, 지식인과 대중문화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있다. “이 영화는 경험적으로 다양한 청중을 위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쇼아(Shoah)의 재현과 ‘공공 기억’의 문제에 관한 중요한 이슈들을 통해 생각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1)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한센의 홀로코스트 영화 분석에는 네 가지 뜨거운 쟁점이 등장한다. 문화 산업, 내러티브, 영화 주체성, 재현성의 문제가 그것들이다. 이들은 ‘위안부’ 역사의 극적 재현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이슈들과 맥을 같이 하는데, 이들 네 가지 쟁점들을 토대로 한국의 ‘위안부’ 극영화들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문화 산업의 측면에서 1990년 이전의 ‘위안부’ 극영화들이 철저히 상업영화의 틀을 맞춰 ‘위안부’ 역사의 성애화를 추구했다면, 2000년대 이후의 영화들은 대중영화의 양식을 벗어나지 않는 동시에 다양한 시도들을 실험해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예는 <아이 캔 스피크>로, 무거운 역사적 이슈를 되도록 경쾌한 코미디의 수사에 기대어 대중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밖에 최근의 ‘위안부’ 극영화들은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적극적으로 담아내면서 역사적 공공기억의 산업적, 정치적, 문화적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문화산업과 ‘위안부’ 극영화의 관계가 달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둘째, 내러티브의 문제는 대중영화의 고전적 서사구조에 기대어 ‘위안부’ 역사를 재현한다는 사실이 갖는 함의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구성주의적 단결, 동기 부여, 직선형, 평형 및 폐쇄라는 신 고전주의주의 원칙에 의존”한 재현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역사적인 경험의 불연속성과 타자성”에 질서를 부여하도록 강요하게 된다.(2) 다큐멘터리와 다른 면에서 대중 극영화의 서사화 과정이 갖는 근본적인 딜레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귀향>이나 <눈길>과 같이 극적 드라마투르기를 사용하는 영화들에서 ‘피해자중심주의’에 입각한 윤리적 내러티브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셋째, 일본군 ‘위안부’ 영화에서 주체성은 이중적인 방향에서 진행된다. 영화가 다양한 캐릭터들 사이에 주체성을 부여하는 방향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관객의 주체성이 연결되는 방향이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위안부' 여성들과 일본군 군인들, 그리고 주변의 가족, 친구, 혹은 이들의 미래 후손들이 상호작용할 때, 이 인물들은 그 어떤 장르 영화에서보다 더 강력하게 영화 이미지와 장치들을 움직인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 극영화들이 플래시백,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시점 쇼트 등을 사용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 관객들이 어떻게 동일시되고 연루되고 새로운 보기를 만들어나감으로써 영화 밖 역사적 기억을 형성하는 데 동참하게 되는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 재현 (불)가능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홀로코스트 이후 예술이 가능한가?”라는 아도르노의 질문에서 이미 제기된 바와 같이, 역사적 트라우마와 그 재현물들 사이에는 언제나 뜨거운 긴장이 존재한다. 일례로, <쉰들러 리스트>에 대한 반대 논쟁들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표현에 대한 금기를 위반하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의 이미지"를 부여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경험의 불연속성과 타자성에 어떤 질서를 강요하고자 하는 ‘재현’ 양식이 과연 ‘위안부’ 역사의 트라우마와 폭력성을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실, 단순히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는 이원론적 대립으로 재현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죽은 자들, 그리고 유린당한 자들의 기억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그 사건의 ‘특이성’(singularity)을 보여주는 재현양식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극심한 개인적 고통을 말하는 대신 ‘죽기 전에 정의를 보고 싶다’는 희망을 더 자주 표현해왔다. ‘위안부’ 역사의 극영화적 재현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은, “사건이 폭로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고령이 된 생존자들이 점점 사망해가는 상황에서 제작자나 관객 모두에게 있어 달라진 ‘위안부’ 문제의 위상을 반영”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3) 이에 덧붙여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개인들의 기억과 다중적 이야기가 더욱 중요해지면서 역사적 사건의 상상적 재구성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2. 2000년대 ‘위안부’ 기억을 다룬 영화적 재현의 세 전략들 

이 글에서 필자는 동일화의 역사 너머에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려는 상상력의 힘을 염두에 두고 2000년대 한국에서 제작된 ‘위안부’ 영화의 대중적 재현양상과 그 정치적 미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최근에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세 편의 ‘위안부’ 극영화들(<귀향>, <아이 캔 스피크>, <허스토리>)을 멜로드라마와 재현, 기억의 관점에서 비교해보고자 한다. 2000년대 ‘위안부’ 극영화들의 등장은 우리가 그간 생존자들의 증언과 '위안부' 운동 등을 통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슈에 대하여 과연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이에 대한 ‘문화적 재현은 어떻게 가능한지’ 등의 여러 문제를 제기해주고 있다.(4)  

1) 멜로드라마적 전환 

<귀향>, <아이 캔 스피크>, <허스토리>는 모두 다른 제작방식과 장르를 전유했지만 이들이 받은 대중적 관심에는 공통된 이유가 존재하는 듯해 보인다. 바로, 2000년대 이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시간의 정치학이 더욱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이 영화들은 멜로드라마적 수사학을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있다. 필자는 이를 2000년대 이후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멜로드라마적 전환이라고 보고자 한다. 멜로드라마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리얼리즘에 관심이 없이 ‘눈물을 끌어내기 위해’ 어떻게 관객과 등장인물들 사이에 지식과 관점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독특한 재현양식이다.(5) 멜로드라마는 관계를 맺고 있는 극단적 정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며 시각적이고 극적인 수단을 통해서 강렬한 정서, 심리 상태를 전달하기 위해 고투하는 수사적 전략이라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멜로드라마는 영화와 같은 시각적이고 극적인 매체의 바로 그 경계 안에 존재한다. 

파토스의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은 2000년대 한국에서 제작된 ‘위안부’ 영화의 크로노폴리틱스와 대중적 재현양상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요소로 비춰진다. 스티븐 닐이 설명했듯이 너무 늦게 오거나 거의 너무 늦은(아슬아슬한 때에) 깨달음(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등장인물들이 발견하는)으로부터 기인한다. “지연과 가능성으로 너무 늦어진다면 우연의 일치가 너무 늦거나 시간에 맞거나 간에 눈물이 나온다.”(6)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위안부’의 극영화가 상정하는 역사적 시간차에는 이미 멜로드라마적 파토스가 내재되어 있다. 앞서 말한 이중, 삼중, 오중의 침묵들로 인해 전쟁 성범죄가 자행된 시간과 피해자들의 상흔을 깨닫기까지의 시간 사이에 ‘너무 늦은’ 시간의 격차가 발생했다. 여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역사 뒤편으로 이들이 곧 사라져갈지 모른다는 ‘아슬아슬한’ 깨달음을 가지고 ‘위안부’ 극영화들을 보게 되며 ‘눈물’은 그러한 파토스의 표현이 된다. 

또한 최근 멜로드라마의 논의를 엮은 단행본인 <눈물 이후의 멜로드라마 Melodrama after Tears>라는 책에서 크리스틴 글레드힐은 상상력과 정동적 사유(affective thinking)의 모드로서 멜로드라마에 주목하고 있는데, 보다 복잡하게 얽힌 문화적, 정치적 범주를 아우르는 메타장르로서 멜로드라마가 지닌 정치적 담론성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감정과 미적 정동성의 문제가 중요해지는데, 크리스틴 글레드힐이 지적한 대로, 멜로드라마는 미학이 정치학으로 포섭되거나 혹은 둘 사이에 완전한 분리가 일어나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주기 때문이다. 글레드힐의 논의는 일본군 ‘위안부’ 극영화의 멜로드라마적 정치학과 연결될 수 있다. 이때 정동은 어떤 개인화된 심리적 상태나 사적 감정이라기보다는 ‘탈주체의 정치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정동은 사회적 환경과 그에 조응하는 인간 에이전시 사이의 효과로써 생산되고 고정된 범주가 아닌 잠재적 범주로서 항상 변형함으로써 주체의 주어진 자리를 항상 탈위치시키기 때문이다. 

'귀향'과 '아이캔스피크'
'귀향'과 '아이 캔 스피크'

2) 피해자성과 폭력의 재현

대중적 성공과는 달리 비평적 측면에서 적잖은 비판을 받았던 <귀향>은 1943년과 1991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횡단하며, 시골 소녀 정민이 위안소로 끌려가는 과거와 성폭력을 당한 소녀 은경이 무녀와 살며 영매가 되어가는 현재를 중첩시킨다. 이때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에는 1991년의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라 두 시대의 소녀들이다. ‘위안부’ 극영화의 멜로드라마적 전환에 있어서, ‘소녀’ 이미지의 확산은 대중적 공통분모를 이미 확보한 상태였고 따라서 소녀를 중심에 둔 기억구조는 매우 자연스러운 혹은 계산 가능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소녀들이 갖는 순수한 여성. 피해자성은 멜로드라마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의 쟁점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녀화’가 가부장적인 한국 민족주의의 관점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문화 속 ‘위안부’ 재현이 과거와 소녀 시절에 머무르는 것은 ‘피해자 민족주의’(victimhood nationalism)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반면 <아이 캔 스피크>와 <허스토리>는 통념적인 피해자 서사에 갇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허스토리>는 법정 드라마의 형식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을 부각시키며 ‘위안부’ 문제에 다가간다. 이러한 접근은 법정 드라마의 관습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둘러싼 극의 반전을 형성하는 동시에 증언대에 선 ‘위안부’ 여성이 ‘집단적 피해자’가 아니라 각각 고유한 스토리와 개성을 지닌 여성들임을 보여준다. 왜 법정에 선 피해자들은 전형적인 ‘피해자’ 상을 구현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와 같은 문제들에서 여성 피해자는 ‘피해자화’(victimization)됨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피해를 드러낸다는 것이 곧 피해자화를 가져오는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질 필요가 있다. ‘피해자화’와 ‘피해자중심주의’는 엄연히 다르다.(7)
 
<아이 캔 스피크>는 피해자에 대한 통념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피해자성의 진정한 의미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즉 피해자는 스스로 피해자성을 드러냄으로써 증언의 주체가 된다. 여기서 피해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옥분은 증언을 결심한 후에도 정부와 기관의 법적, 서류적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증언자격이 박탈될 위험에 처한다. 국민청원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절차를 거쳐 국제 증언대에 서게 되었을 때에도 ‘‘위안부’ 피해자로서의 증거’ 유무는 증언의 진실성을 넘어서는 강력한 기준이 된다. 증언의 진실성과 증거 유무 사이의 시소 게임을 뒤집기 위해서 김현석 감독은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옥분의 ‘위안부 피해자성’을 여러 차례에 걸쳐 지연시키면서 감정적 고양을 이끌어내는 전략을 취한다. 즉, 증거에 해당하는 ‘위안부’ 사진을 청문회장에 제출하는 시점을 옥분이 자신의 몸에 난 칼자국과 강제문신을 드러내 보이는 바로 그 순간까지 미룸으로써, 영화는 ‘살아있는/생생한 증거’로서의 ‘위안부’ 피해자성이 그 어떤 증거보다 우선함을 강조한다. 

이 클라이맥스의 순간은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의 힘을 빌어 고양된다. 옥분이 바느질상자 속에 감추어두었던 ‘위안부’ 사진은 옥분과 민재를 연결하는 감정적 심급을 먼저 건드린 후에 먼 거리를 뛰어넘어 때늦게, 그러나 너무 돌이킬 수 없이 늦은 것은 아니게 도착함으로써 ‘위안부’의 몸과 증언의 피해자성이 법적 심급에 도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순서상 그 반대가 아니라는 점은 <아이 캔 스피크>가 지닌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의 정치학과 매우 잘 연동되어 있다. <아이 캔 스피크>의 멜로드라마성은 ‘위안부’ 피해자 여성의 개인적인 삶과 자신의 피해자성을 확인하고 나아가는 정치적 삶 사이의 시차에 내재된 것으로, 그 역사적 파토스의 감각이 관객에게 감정적 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아이 캔 스피크>에서 ‘증언’의 언어가 영어라는 설정인데, 사실 이 국제적 언어가 거의 무화되는 순간이 이 영화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과거 한국영화들에서 영어회화를 배우는 캐릭터들은 코믹하게 표현되곤 하는데, 대중문화적 코드로서 언어를 낯설게 하기, 혹은 낯선 언어 앞에서 당황하기는 친숙한 소재이다. 그러나, 웃음기를 지우고 생각한다면, 국제사회의 공통어인 이 언어가 어느 면에서나 권력의 언어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넓은 곳에 가 닿길 바란 ‘위안부’ 피해자의 영어 연설은, 직접 피해자의 목소리에 메시지를 담아 최대한 많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국제적 연대를 호소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는 장면은 이 언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지점이다. 

옥분이 준비한 연설문을 발표하기 전에 누구보다 긴장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증언하기 위해 함께 나온 다른 ‘위안부’ 여성이다. 백인 ‘위안부’ 할머니(미첼)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지만, 참혹한 기억과 고통을 다 전달하지 못한 채 몇 번이나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옥분이 앞으로 나와 몸의 상처를 드러내고 한국어로 그 고통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좌중의 사람들이 서둘러 번역기의 이어폰을 찾아 꽂는 장면에서 유일하게 이어폰을 빼는 사람이 바로 이 할머니이다. 그녀는 언어의 경계와 상관없이 옥분의 고통을 몸으로 알며 옥분의 증언을 몸으로 듣는다. 서사적 흐름을 따라 옥분이 영어 연설문을 하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이렇게 다른 언어, 다른 민족, 다른 국가의 ‘위안부’ 여성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느끼는 순간은 짧게 지나가지만, 필자는 이 장면에서 언어의 차이를 상쇄하는 정동의 파동이 결국에 경험의 차이를 상쇄하는 멜로드라마적 정동의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지 않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스토리'
영화 '허스토리'

3) 메타기억으로서의 ‘위안부’ 극영화 

끝으로, 메타기억에 대한 담론의 영역으로 ‘위안부’ 사건의 극영화적 재현들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메타기억의 장은, “하나의 기억 자체가 격렬한 공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그 기억과 관련된 ‘주변’의 논쟁들이 그 기억을 ‘보여주는’ 혹은 그 기억에 ‘속하거나 일부가 되는’ 또 다른 기억의 장을 구성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된다.(8)  

<귀향>과 <허스토리>에는 ‘위안부’ 역사의 시각적 메타-기억화를 제시하는 동일한 장면이 등장한다. 일종의 원자료로서 1991년 김학순의 공개회견장면이다. 두 영화는 이 순간을 모두 TV 모니터의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 <귀향>의 첫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상에 나타난 김학순의 클로즈업에서 시작되는데, 이 화면을 다른 ‘위안부’ 피해여성이 보고 과거로 빠져드는 장면이다. <허스토리>에서도 틀어놓은 TV 화면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이 비치고 이를 극 중 인물들이 바라보는 것이 나온다. 이 첫 공개 증언이 기억의 방아쇠 역할을 하는 <귀향>에 비해서 <허스토리>는 다른 피해자의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촉발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주된 사건인 관부재판은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사실이 공개되면서 부산에 당시 ‘정신대 신고 전화’가 개설되고 함께 모이게 된 피해 여성들이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허스토리>에서는 기억과 역사, 재현의 문제를 정교하게 고양되는 시퀀스가 존재한다. 배정길은 자신이 끌려갔던 대만의 위안소를 방문하고 재판을 위해 문정숙은 이 여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지금도 남아 있는 건물을 거닐며 배정길은 자신이 있었던 방의 위치까지 기억하고, 문정숙은 묵묵히 뒤를 따라가며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다. 잡초가 무성한 건물 한켠에 배정길이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볼 때, 영화는 이 순간을 TV모니터 안의 배정길의 모습으로 전환시키며 자연스럽게 이접 된 시간과 공간을 교차시킨다. 이때, TV 모니터의 거친 질감과 조악해 보이는 색채감은 199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앞서 삽입되었던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 영상을 연상시킨다. 즉, 역사적 기억이 영상으로 전환되어 계속해서 기억되고 다시 등장하듯이, 허구 속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도 한 번 더 영상 속으로 들어가며 지금에서처럼 재판장에서 혹은 다시 언젠가는 다른 미래의 시간과 장소에서 재등장하는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3. ‘위안부’ 영화가 통과해야 할 관문들

위에서 살펴본 위안부 극영화들은 정체불명의 구별되지 않는 다수의 집단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개별적 인간 존재’를 향해 말을 걸며, 역사적, 정치적으로 정당한 공공기억을 위한 감정의 형태를 구축한다. 세 편의 영화 모두를 관통하는 특징으로 ‘위안부’ 여성들을 매개하는 현재의 존재들에 주목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극중 인물들(<귀향>에서의 영매, <아이캔스피크>의 구청직원/영어개인교사, <허스토리>의 여행사대표)이기도 하고, 영화제작과 상영, 담론적 확산을 가능하게 했던 관객들이기도 하며, 앞으로도 마음을 움직여 참여할 시민들이기도 하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멜로드라마적 상상이자 메타기억으로서, ‘위안부’ 극영화들은 ‘위안부’ 문제가 통과해야 할 역사적, 정치적, 미학적 관문들을 보여준다. 최근의 영화들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간의 관계를 넘어서 아직까지 위력을 발휘하는 식민 구조를 해체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적 과제이자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이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트랜스내셔널한 프로젝트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 무관심과 망각의 폐허 속에서 ‘위안부’ 역사의 진실들을 길러내고, 개인적인, 집단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비판적인 기억의 행위로 끌어내는 작업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이 글은 지난 번 글에 이은 연재 형식으로, 필자가 쓴 아래 논문의 일부를 축약, 수정한 것이다. 
박현선, 「일본군 ‘위안부’의 영화적 기억과 크로노폴리틱스」, 『대중서사연구』 26권 1호, 2020.
<각주>
1. Miriam Batu Hansen, “Schindler’s List is Not Shoah: Second Commandment, Popular Modernism, and Public Memory,” Critical Inquir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80
2. Miriam Batu Hansen, “Schindler’s List is Not Shoah: Second Commandment, Popular Modernism, and Public Memory,” Critical Inquir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81.
3. 정미나, 「일본군 ‘위안부’ 소재 다큐멘터리의 기억 기록과 담론 전개 방식」, 『영화연구』, 제68호, 한국영화학회, 2016, 157쪽.
4. 주유신, 「위안부 영화와 역사쓰기의 새로운 도전」, 『동북아 문화연구』, Vol. 51,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17, 99쪽.
5. 존 머서·마틴 싱글러, 『멜로드라마』, 변재란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147쪽.
6. Steven Neal, “Melodrama and Tears,” Screen, 27:6, 1986, p.11.; Linda Williams, “Melodrama Revisited” in N. Browne (ed.) Refiguring American Film Genres: History and Theor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p.48.
7. 양현아, 「증언을 통해 본 한국인 군‘위안부’들의 포스트식민의 상흔(Trauma)」, 『한국여성학』, 22(3), 한국여성학회, 2006, 141쪽.
8. 캐롤 글럭, 「기억의 작용: 세계 속의 위안부」, 나리타 류이치 외 지음, 『감정, 기억, 전쟁』, 정실비 외 옮김, 소명출판, 2014. 236쪽.

 

글 박현선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 『문화/과학』 공동편집장, 한국영화학회 상임이사로 현재 활동하고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한국학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게스트 프로그래머,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영화의 모더니즘과 정치적 미학에 관한 연구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얼바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시아 냉전의 문화정치, 한국영화의 정치적 미학, 기억과 정동 연구, 여성과 도시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출판과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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