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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불에 탄 여인과 사라진 아이
[이주라의 문화톡톡] 불에 탄 여인과 사라진 아이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20.07.13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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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표지 (copyright-현대문학)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표지 (copyright-현대문학)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불신은 공포를 소환한다.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 강화되어 개인의 일상이 무기력 상태에 빠질 때, 그렇게 죽음이 도처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할 때, 공포물은 유행한다. 조선시대 임진년과 병자년의 전쟁 이후 혹은 대규모 역병이 지나간 이후 귀신담이 쏟아졌다. 일본의 식민지로 복속되었던 1910년대를 전후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권력이자 폭력적인 타자인 정권에 대한 두려움으로, 조선의 골목에는 도깨비불이 횡행했고, 목 잘린 귀신들이 돌아다녔으며, 입이 찢어진 하이카라 여자 귀신이 사람들을 위협하였다. 괴담이 사실처럼 신문에 보도되던 시기였다. 군사 독재가 강화되기 시작하며, 전 사회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아래 보수화되던 1960년대 후반에는 한국 공포 영화의 대표작 <월하의 공동묘지>가 큰 인기를 얻으며, 여성들의 희생과 억압에 대한 원한을 풀어놓았다.

“우리들의 공포, 그것은 대부분 역사적이고 사회적 공포다.” - 마리아나 엔리케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소설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현대문학, 2020)은 현실의 문제가 어떻게 공포와 결합하는지를 매혹적으로 보여준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은 현재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대부분 국가에서 나타나는 독재와 빈곤 그리고 사회적 질서의 부재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떠한 위험에 처하게 하고 있는지를 그려낸다. 비판적 시선으로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리얼리즘 기법이 아닌 공포물이라는 장르적 기법에 근거한 작품이지만, 오히려 공포와 환상의 문법으로 발화되기에 현실의 문제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게 한다.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현재 아르헨티나 일간지 『파히나/12』의 문화 및 예술 섹션 부편집장인 언론인이자, 1995년 첫 장편소설 『내려가는 것이 최악이다』를 발표한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소설가다. 대표작은 2009년에 발표한 소설집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면 위험한 것들』이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2016년에 발표된 단편집이다. 이 두 소설집 모두 공포물에 기반한 단편 작품들의 모음집이며, 그래서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호러 작가로 알려져 있다.

Mariana Enriquez (copyright-Nora Lenzano)
Mariana Enriquez (copyright-Nora Lezano)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이 현재 우리의 시선을 끄는 지점은 억압적인 가부장제 사회 하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살해’의 모티프를 명확하게 형상화해 내는 부분이다. 표제작인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불에 타버린 여성들의 삶을 그려낸다. (참고로, 이 작품은 동명의 영화인 수잔 비르 감독의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2007)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다) 남편과 애인들이 자신의 아내나 여자친구를 의심하다가 결국에는 그녀들이 자는 동안 알코올을 몸에 붓고 성냥을 그어 그녀들의 몸을 불태운다. 그러나 그 불 속에서도 살아남은 여인들은 흉측하게 녹아내린, 상처 입은 몸을 전시하며 길거리를 활보한다. 그리고 말한다. “앞으로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남자들은 습관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 그러면 대부분 여성은 나처럼 되고 말 거예요. 목숨을 건진다면 말이죠. 그렇게 되면 꽤나 멋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시대의 아름다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수많은 여성은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기로 결심한다. 경찰들이 여성의 분신 사건을 막으려 경계를 강화하지만, 여성들은 경찰을 피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스스로 분신하고 살아남아 괴물이 된 채 거리로 나선다. 여성들은 중세 시대 마녀사냥으로 불에 타 죽은 여성의 숫자만큼(누군가는 4만 명, 다른 누군가는 수십만 명이라 추정) 여성들이 분신하지 않으면, 이 분신 의식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분신은 세상에 대한 여성의 분노의 표현이다. 여성의 신체를 가졌다는 이유로 쉽게 폭력에 노출된다면, 차라리 스스로 여성의 신체를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학기말」에 나오는 여학생 또한 머리에 포마드를 바른 난쟁이 남자의 명령에 조종당하고 있다. 물론 난쟁이 남자는 여학생의 환각이다. 환각 속의 남자는 여학생 스스로 자신의 몸을 자해하도록 명령한다. 여학생은 그 남자에게서 달아나려고 하지만 언제나 붙들린다.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어 뽑아버리고 턱을 면도날로 긋는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를 헐렁한 옷으로 가려버린다. 그녀의 환각은 다른 여학생에게도 전염된다. 다른 여학생은 허벅지에 상처를 낸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훼손하며 여성으로서의 신체를 스스로 부정한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뒤표지 (copyright-현대문학)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뒤표지 (copyright-현대문학)

폭력 속에 노출된 여성의 삶은 역시 폭력으로 희생되는 아이들의 삶과 맞물린다. 아이들은 빈민가 지역에서 실종되거나 살해당한다. 「더러운 아이」, 「검은 물속」, 「아델라의 집」은 마약 조직과 경찰에 의해 살해당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 작품들의 화자는 중산층 여성이며, 그녀들은, 일 때문에든 우연한 기회이든, 빈민가 지역의 아이와 연결되면서 현실에 노출된 공포와 직면한다. 아이들의 살해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 속에서 마약과 주술과 무기력과 폭력이 팽배한 빈민가의 전모를 마주하게 되고, 여기에서 극도의 불안을 경험한다. 경찰에 의해 살해당했다가, 한 사회의 모든 쓰레기가 모여 있는 ‘검은 물속’에서 살아나온 청소년의 유령은, 빈민가의 모든 기형아와 마약중독자를 불러 모아 길거리를 휩쓸게 한다. 빈민가에서 발원한 무기력한 분노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빈부격차가 격심하여 공공의 치안이 특정 지역에만 집중되는 도시에서 빈민가는 그 자체로 폐허이자, 폐가이며, 그래서 온갖 괴담의 온상이기에, 모두에게 공포를 유발한다. 가난 그 자체가 공포인 것이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호러 단편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불안이 심화되는 현실의 문제를 공포의 문법으로 풀어낸다. 「아델라의 집」은 전형적인 폐가 모티프를 가지고 왔지만,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교차시키며 폐가에 대한 공포가 현재 사회 속 빈부격차, 치안 불안, 불평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작중 화자는 여름 저녁 오빠와 함께 동네 폐가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집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름밤이면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서 놀았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늦게라도 집을 나오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저녁 늦게까지 골목에 나와 놀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제는 위험한 빈민가로 변해, 해가 지면 주민들은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폐가로 들어가는 위험이 이제는 골목 자체로 나가는 위험으로 대치되고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폐가에 대한 공포는 현재의 일상을 둘러싼 치안에 대한 불안, 안정적 삶의 불가능에 대한 공포로 변화하였다. 이제는 빈민가, 더 나아가 일상의 생활공간 자체가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 아이들은 실종 당하고, 여인들은 살해당한다.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검은 물속에서 살아나는 유령들처럼, 사회가 포기해버린 것들, 그래서 인간적으로 살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들이 사회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폭로한다. 즉 극도의 빈부격차, 불평등한 사회 구조, 그로 인한 사회 안전망의 상실이 현재 우리 모두의 삶을 공포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소설 속 인물들은 젠더와 관계없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역시 자신의 삶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없는 남성들의 힘겨움도 그려낸다.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 페티소 오레후도를 떠올리며」나 「초록색 빨간색 오렌지색」에는 그러한 남성들이 나타난다.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의 주인공은 범죄 투어 가이드인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 가부장으로서의 가지는 부담감 속에서 아내와 아이와 소통의 통로를 잃어버리고, 아이들을 골라 연쇄살인을 했던 살인자의 유령을 계속 보게 된다. 억압적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압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초록색 빨간색 오렌지색」의 남성은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사회에서 아예 도피해 버린다. 일본에서 말하는 히키코모리가 된 남성은 인터넷 속 범죄 세계에 점점 빠져든다. 이들 남성 또한 현실 사회에서 살아갈 활력을 상실하였다.

공포는 언제나 사회적 불안을 반영한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소설에 나타난 여성들의 분노, 아이들의 희생, 남성들의 무기력을 따라가다 보면, 아르헨티나 사회를 도저하게 감싸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사회는 불만족을 축적하고, 그러한 불만족은 한편에서는 무기력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를 심화시킨다. 이러한 무기력한 분노는 현재 한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좀비들의 대유행과 맞닿아 있다. <부산행>, <킹덤>, <살아있다> 그리고 <반도>로 이어지는 좀비물의 열풍은 좀비라는 존재가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생존에 내몰려 주체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무기력과 그 안에 내재된 우리들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호러 단편이 그려내는 무기력한 분노가 아르헨티나라는 한 국가의 특수성을 넘어 현재 우리의 보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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